이모가 수건이랑 기모 고무장갑이랑 행주 같은 '리빙' 카테고리 생필품을 한 상자 보내줘서는 같은 층에 사는 이웃들에게 조금씩 나눠줬다. 그중에는 엄마가 최근 들어 조금씩 친분을 쌓기 시작했다는 새로운 이웃도 있었다.
이사를 하고 같은 층과 위 아랫집 이사떡을 돌리는 것을 시작으로 엄마의 네트워크는 조금씩 증가하고 있었나 보다. (최근에 김치 주고받기로 친해졌다고 들었다) 아무튼 뉴페이스 어머님이 오늘 저녁에 리빙용품 나눔에 동참하러 우리 집에 오셨고 잠시 토크박스가 열렸었다.
예전에는 엄마 친구들이 집에 오면 인사만 하고 방에서 잘 나오지도 않았다. 그러다 몇 년 전부터는 물 마시러 나왔다가 "아이구 딸내미도 와서 과일 좀 먹어~" 하는 어머님들의 초대장을 받고 누구네 집 딸이, 아들이, 며느리가, 손자가, 사돈의 팔촌이 어쨌다더라 하는 이야기들을 듣고는 한다. 생각보다 재밌더라.
그러다 왜곡된 보도를 찰떡같이 믿는 분에게 진실을 알리기도 하고 자기 아들 같은 신랑이 어디 있냐는 분에게는 그건 대단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라며 젊은이 소식을 업데이트 해드리고는 하는 것이다.
젊은이 미션에는 스마트폰 및 인터넷 구매대행도 종종 포함된다. 오늘 H아주머니의 사진 전송 퀘스트를 수행하고 자리에 앉아 대화에 참여했다. H아주머니와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는데 무슨 이야기 끝에 아주머니가 하는 말이
- 우리 집에서 나만 바보를 만들어 놨어
그 말을 듣자마자 거친 콧바람이 나왔다. 속에서 분통이 치밀었다. 내가 아는 그 장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 집에서 여자라고 공부 안 시켰죠!!!!!
- 아유 나만 안 가르쳤어 오빠들 셋은 대학까지 다 보내 놓고.
격분한 나는 H아주머니께 이것저것 물었다. 오빠들 학교 가면 집에서 밥하고 빨래했다는 너무도 익숙한 레퍼토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연신 하마처럼 큰 숨을 쉬었다. 그러다 또 무슨 말 끝에 H아주머니가 들릴 듯 말 듯 작은 혼잣말을 했다. 워낙 작게 말해서 엄마는 못 들었는데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 최소 내 이름만이라도 쓸 수 있으면 좋겠는데..
순간 진짜로 심장이 철렁했다.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었다. 실례가 될 수 도 있었지만 나는 다시 물어야만 했다. 내가 뱉을 다음 말을 위해서는 저 말이 혼잣말로 사라져서는 안 됐다.
- 진짜로 이름...못 적으신다는 거예요?
H아주머니는 머쓱한 듯 허허 웃으며 그렇다고 했다. 다음 말을 꺼내기 전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앞으로 그녀와 나의 일상은 오늘을 기준으로 분명 변하겠구나. 이어서 한 가지 확신도 들었다. 내가 더 큰 걸 배울 수도 있겠다.
- 괜찮아요.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이제부터 저한테 배우세요.
평생 잊지 못할 순간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