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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탄만두 Sep 26. 2018

내 제사상엔 베이글을 놓아주련

영화 <코코>를 보고 나서



여유 있는 날이 생기면 보고 싶었던 영화 목록 중 1번인 '코코'를 드디어 봤다. 올해 초에 개봉한 영화인데 뭐가 그리 바빴는지 미루고 미루다 10월이 오기 전 추석 연휴가 되어서야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 영화. 추석 연휴에 보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부터 이어지는 글에는 <코코> 줄거리 및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코코>는 <죽음 너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사후세계'는 어쩌면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에 평생을 궁금해할 흥미로운 주제다. 누구도 죽어본 적 없으니까. 대체 우리는 죽으면 어디로 가는 겁니까? 오래 살았다고, 많이 배웠다고, 혹은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한들 그 누구도 명쾌한 해답을 내려줄 수는 없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찬란하다"는 드라마 도깨비의 명대사처럼 죽음 너머의 이야기는 나에게 영원히 이상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다. 마치 <열어보지 마시오> 같은 비밀스러운 문서 같다고나 할까. 죽은자들 끼리만 공유할 수 있는 아주 극비의 이야기. 난 아직 이승의 사람이기에 감히 궁금해하는 것조차 금기시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나는 명절이 싫었다. 아니다 과거형이 아니라 '싫다'로 고쳐야겠다. 지금도 엄청나게 싫다. 언제부터 싫었냐 하면 유치원 때부터 싫었다. 유치원 이전의 기억은 없으니까 기억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기억부터 싫었다. 명절엔 차가 밀린다고 자다 말고 눈도 못 뜬 채 옷을 갈아입고 깜깜한 밤에 그야말로 차에 실려 갔다. 정말 정말 끔찍이도 싫었다. 아니 대체 이렇게까지 일찍 가야 하는 이유가 뭔데. 조금 좀 늦으면 어떤데. 무슨 큰일이라도 나?


엄마는 얼마나 더 싫었을까. 시골에 도착한 어린 나는 곧장 방으로 들어가 모자란 잠이라도 이어 잤지만 엄마는 그때부터 제사 음식을 준비해야 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보이기 시작해 함께 음식 준비를 거든 건 내 나이가 두 자릿수로 바뀌면서부터다. 내가 기억하는 여러 날의 모습은 주방엔 온통 여자들만 가득했고 거실 TV 앞엔 남자 어른 및 남자아이 만이 가득했다는 것이다. 열 살 남짓한 내가 엄마를 도와 생선이며 고기에 밀가루 옷을 입히고 달걀옷을 입히는 장면은 그곳에선 전혀 이질감이 없었다. 그냥 그 주방에는 계속해서 여자들만 있었으니까. 그중에서 가장 바쁜 사람은 우리 엄마였고.


강산이 두 번은 바뀐 후에야 그 지긋지긋한 주방으로부터 엄마를 구해줄 수 있었다. 그것도 내가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내 밥벌이를 하는 어른이 되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교복을 입은 나의 목소리는 그들에게 닿지 않았다. 연필을 잡는 어린이의 손이 뒤집개를 쥐었고, 그 손으로 고구마전을 부치다 기름에 데었을 때 그곳에서 가져다준 것은 죽염 치약이었다. 에피소드를 적는다면 열 페이지는 쓸 수 있지만 그걸 다 쓰면 영화 이야기는 하지도 못한 채 혈압만 상승할 것 같아서 그냥 이 정도까지만 쓰겠다. 시골은 열악했고 그곳의 사람들은 무지했으며 나는 빨간 날이 돌아오는 게 오랜 시간 동안 너무나도 싫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제사도 싫었다. 대체 죽은 사람이 뭐라고. 심지어 나는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잖아. 왜 죽은 사람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고통받아야 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머릿속엔 온통 물음표만 가득했다.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날들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명절 음식을 싫어한다. 그나마 먹고 싶어 하는 건 송편 정도인데 그마저도 콩 송편은 못 먹겠다. 나의 시골에서 콩 송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제사에 참석하지 않은 이후 서울에서 처음으로 사 먹어 본 깨 송편은 정말 달콤했다. 꼭 재료의 맛 때문은 아니었겠지.


명절 음식 중에 가장 싫은 건 전이다. 기름 냄새만 맡아도 허리가 아픈 것 같다. 지인들에게는 그냥 느끼해서 싫다고 했지만 아마 나의 내면 깊은 곳에는 그런 괴로운 기억들이 아직 남아 있는가 보다.








영화 <코코>는 <죽은 자들의 날>이 중요한 배경을 만든다. 영화를 보고 찾아보니 실제 멕시코에서 매년 10월 말~11월 초에 기리는 명절이라고 한다. 영화가 시작되고 [Día de los Muertos]라 불리는 죽은자들의 날을 설명하는 장면에서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볼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거 제사 이야기야? 참나 그래도 저기는 1년에 한 번뿐이네 하는 생각도 함께 곁들여서.


멕시코인들은 세상을 떠난 이들이 1년에 한 번 가족과 벗을 만나러 내려온다고 믿으며 생전 그들이 좋아했던 것들을 준비한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주인공 '미구엘'의 가족도 죽은 자들의 날을 신성시 하며 조상님들을 생각하는 것의 중요성을 설명하지만, 역시 주인공은 괜히 주인공이 아니지. 본인의 꿈은 무조건 반대한 채 죽은자의 메시지에만 집착하는 가족들로부터 소년 '미구엘'이 달아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결-기-승-전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 영화가 참 좋았다. 그리고 제사는 여전히 싫다. 다만 한 가지 변화의 전구를 켠 감정은 있다. 누군가의 기억에서 영원히 잊혀질 때 비로소 죽는다는 설정 덕분이다.


<코코>의 세계관은 이렇게 구성되어있다. 1년에 한 번 저승에서 이승으로 넘어갈 수 있는 다리가 생기고 그 다리를 넘을 수 있는 죽은자들은 한정되어있다. 그것을 결정하는 건 바로 <사진>이다. 나의 살아생전 사진이 이승에 놓여 있냐 없냐가 이승행 티켓팅을 할 수 있냐 없느냐로 이어진다.


살아있는 동안 국내에서 국외로만 넘어가도 심사가 엄격한데 하물며 생을 넘나드는 건 오죽할까. 까다로운 절차와 심사를 통해 죽은자들은 1년에 한 번 이승으로 넘어갈 수 있다. 가족들과 벗을 만난 (그렇다고 실제로 만난건 아니다. 살아있는 자들은 죽은자를 보지 못한다) 저승으로 다시 돌아올 때도 재입국 심사를 받아야 하고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인천 공항의 붐비는 모습처럼 모두가 물품 신고를 한다. 


개인적으로 이 설정이 너무 참신했다. 그래 그렇다면 음식을 하는 게 의미가 있지. 죽은 자들이 음식을 바리바리 싸 들고 저승으로 들고 갈 수 있다면.




-신고하실 물품 있나요?
-우리 가족들이 만든 츄로(추로스)가 있네요!
-좋습니다! 다음 분!

/ 영화 <코코> 中



엑스트라로 나온 <죽은자 1>이 추로스가 담긴 접시를 손에 들고 함박웃음을 짓는다. 덩실덩실 어깨춤까지 춘다. 빨리 저승으로 재입국해 먹고 싶은 눈치다. 뒤이어 사과, 빵에 와인까지 한 아름 품에 안고 줄 서 있는 영혼들이 보인다. 너무나 신나 보였다.


이 장면을 보며 나는 이마를 쳤다. 그래 이거지! 만약 죽은자에게 음식을 준다면 그들이 좋아했던 걸 만들어 줬어야 한다. 왜 산적이며 생선전만 만드냐고요! 홍동백서니 건좌습우니 동서남북 위치만 따져가며 상을 차리냐고! 나는 전 안 좋아해!!! 내 자손들아. 그때는 없어졌길 바라지만 혹시나 내가 보고 싶어 상을 차리려거든 베이글과 크림치즈를 놓아주길 바란다.아 맞다. 아이스아메리카노도 같이. 샷은 1샷 만이다. 알겠지?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따뜻하게 흐른다. 장면마다 웃음도 있고 곳곳엔 감동이 가득하다. 그러다 결국 절정으로 가선 눈물이 터져 나온다. 디즈니와 픽사가 '가족' 이라는 주제를 담아 콜라보해서 만들었으니 눈물 안 나면 반칙이지. 자 여러분들 여기서 우세요! 하는 장면에서 나는 네!!!!! 하고 눈물샘을 곧잘 터뜨리는 감독이 좋아할 만한 관객이다. 그래서 때에 맞추어 엉엉 울었다. 휴지를 곁에 두고 코를 거칠게 풀었다. 집에서 혼자 보는 영화는 시끄럽게 울어도 돼서 정말 좋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기도 받기도 싫어하는 나란 사람은 영화관에서 울 때도 볼륨을 낮춘다. 코도 시끄러운 장면에 맞춰서 풀고....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죽음에 대해, 그리고 '가족 愛'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분명 그러라고 만든 영화다. 감독이 말하고 싶은 명확한 메시지가 있고 나는 그 메시지를 똑바로 전달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제사는 싫다. 다만 먼저 떠난 이들을 오랜 세월 기억하는 것이 꽤 중요한 역할임을 깨달았다.


이 영화를 보면 그저 육신의 불꽃이 꺼지는 것이 죽음의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된다. <코코>의 또 다른 흥미로운 설정은 이승에서 죽은자를 단 한 명도 기억하지 않는 순간,  저승에 있는 영혼마저도 끝내 소멸한다는 것이다. 생물학적 죽음부터 기억속에서 잊혀지는 완전한 죽음까지 일종의 단계를 거치는 것이다. 죽어서도 또 죽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쓴다.


모든 생명은 반드시 죽는다. 언젠가 나의 사랑하는 벗도 가족도 반려동물도 생을 마칠 것이다. 마음이 컸던 만큼 오랫동안 슬퍼할 것이며 때때로 보고 싶은 날마다 눈물 한 바가지씩 쏟을 것이다. 너무 힘들어 죽었다는 사실 자체를 까맣게 잊고 싶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이 닿는 한 기억해야 한다. 기억 속에서 잊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죽음이다.


다 좋은데 <코코>의 흥미로운 설정은 몇 가지 물음표를 남긴다. 한 명에게라도 잊혀지지 않으면 저승에서 불멸인가? 유명인이나 범죄자인 경우에는? 정말 미워서 죽고 나서도 잊히지 않으면? 극도로 잔인한 범죄자라 뉴스를 보고 기억하는 사람이 아주 많으면? 혹은 '미구엘'의 할머니, 즉 코코가 치매에 걸린 것처럼 기억하고 싶어도 뇌의 어떠한 기능적인 문제로 기억해 낼 수 없으면?




영화 <코코> 스틸 이미지. 죽은 자들은 1년에 한 번, 저 다리를 건너 이승으로 올 수 있다.



다양한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준 영화이기에 충분히 잘 만든 이야기라는 주관적인 평점을 주고 싶다.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입체적인 생각을 할 수 있으면 내게는 좋은 영화다. 이렇게 글을 한 바닥 쓸 수 있게 해주니까. 완벽한 건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렇기에 모두를 만족시키는 결말은 존재할 수 없다.


이 영화의 저승 세계관이 불편하다고 하는 평도 당연히 보았다. 결국 이승의 명성이 저승으로도 이어진다는 그 설정 때문이다. 치열한 삶의 끝이 END가 아닌 AND니까. 저승에서조차도 또 빈부격차가 나뉜다니 우울하긴 하다.


하지만 늘 그렇듯 동화의 끝은 아름다워야하고 <코코>도 권선징악의 결말을 맺는다. 그 후로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나도 행복했다. 영화 보고 이렇게 울어본 게 얼마 만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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