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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탄만두 Oct 21. 2018

대체 내가 이 회사에 왜 들어왔지



새로 생긴 버릇이 있다. 지하철 개찰구에서 카드가 제대로 찍혔는지 확인하는 것. 한 달 전인가 출근길 카드를 찍고 나가려는데 오류가 뜨고 문이 안 열리기에 HELP라고 써진 곳을 누르고 도움을 요청했다. "문이 안 열려요 도와주세요" 2분 쯤 지나 역무원님이 도착했고 카드를 달라고 했다. 가지고 온 손바닥만 한 기계에 내 카드지갑을 올려놓고 조회를 하던 그가 갸우뚱한 표정으로 하는 말 "탑승 기록이 없으신데요?"


예? 그게 무슨…카드를 찍었으니까 지하철을 타고 여기 오지 않았을까요? 황당한 표정의 역무원 앞에 서 있는 나 역시 황당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역무원도 내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네요. 혹시 버스도 타고 오셨어요? 버스 탑승기록만 남아있어요.


나는 집 앞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지하철역에서 '환승'을 한 후에 회사 앞 역에 내렸다. 분명 카드를 찍었으니 탑승지역에서 문이 열렸을 텐데 황당한 상황이었다. 역무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며 내 카드에 무슨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이내 바쁜 듯 빠르게 사라졌고 나도 빠르게 회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계가 다시 태그하라고 했는데 보지도 않고 힘으로 밀고 들어왔나. 카드 찍힌 곳 확인을 안 해서 모르겠다. 오케이 사인을 받고 들어왔다는 확신이 없었다. 덕분에 늦을까 봐 진땀 좀 뺐었다. 그래서 그다음부터 탑승 시 동그라미 표시가 뜨는지 확인하는 버릇이 생겨 버렸다.


오늘도 그랬다. 금액과 옆에 붙은 초록색 동그라미 표시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계단을 내려오다가, 나도 모르게 "어휴 잘 나가려면 잘 들어가는 게 제일 중요하네" 라는 말을 내뱉었다. 뜨끔. 내가 최근 들어 계속해서 생각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신은 때로 인간의 목소리를 빌려 답을 준다더니. 뜻밖의 자문자답이었다.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에 마음이 지치고 너절해진 나는 출퇴근을 하며 종종 "아 대체 왜 여기를 기를 쓰고 들어와서 이 고생이야"하곤 했는데 꼭 그 말에 대한 답변 같았다.




왜 들어왔냐면. 잘 나가기 위해서



누군가를 우연히 만나는 건 없어
누군가 우리 인생에 나타났다면 그건 이유가 있는 거지.
근데 그 이유는 아주 나중에 알게되는 거야.
지켜보자. 우리가 서로 왜 만났는지

/다정한 사람에게 다녀왔습니다



좋아하는 책에서 본 좋아하는 문장이다. 이 편지를 읽고 내 삶이 조금 많이 바뀌었다. 나에게 일어나는 안 좋은 일들도 언젠가는 이유를 알게 되겠지 하고 어쩐지 기대하게 됐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도 이렇게까지 안 좋아지는 것도 뭔 이유가 있겠지. 다만 아직 알게 될 날이 아닌가 보다. 기다리게 됐다.


내겐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복이 와요' '웃으면 행복해져요' 등의 응원보다 이쪽이 더 효과가 있었다. 끝난 줄 알았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음회차에 계속…이런 느낌이라 조금 더 흥미진진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복선을 발견한 것처럼 이건 또 무슨 의미일까.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풀어질까? 다음 편을 기대하는 건 나쁜 상황을 버티는 위로이자 작은 기쁨이었다.






힘들게 하는 회사에선 배운 게 분명 많았으니 정신력이나 업무 스킬 같은 게 성장한 것도 중요한 장면 중 하나였지만, 그런 시시한 추리는 내 무릎을 치기엔 영 부족했다. 그런 전개는 어느 회사에 가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이런 뻔한 반전일 리가 없어.


주말 출근하는 지긋지긋한 오늘, 지하철 개찰구에서 난 그 복선을 발견한 것 같다. 내가 이 회사에 왜 들어왔는지. 이곳에 애써서 들어온 이유는 잘 나가기 위함이구나. 한 달 전, 나는 지하철 안으로는 쉽게 들어왔지만 쉽게 나갈 수가 없었다. 역무원을 불러야 했고 출근 시간에 지장을 줄까 마음을 졸였다. 결과적으로 역 안에 있긴 했지만 들어오는 게 다가 아니었다. 밖으로 나가 두 발로 걸어 출입증 찍고 내 자리에 앉아야 출근이니까.


나는 지금 회사에 들어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당시엔 간절했다. 첫 회사처럼 단순히 이력에만 맞춰 넣은 회사가 아니라 내 적성에 맞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오랫동안 이 일을 잘할 수 있나? 꼼꼼히도 비교했다. 그래서 합격했을 때 뛸 듯이 기뻤고(실제로 많이 뛰어다님) 입사 후 1년 정도는 우습게도 평생직장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악화될 줄은 몰랐지만.


오늘 개찰구에서 내가 느낀 감정은 소소한 기쁨이었다. 내가 그래서 그때 그 회사에서 버텼구나. 그래서 이직이 그렇게도 안 됐구나. 더 버티길 잘했네. 잘 들어가서 잘 나왔구나. 라고 말하는 내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쓰고 보니 당연한 소리를 정성스레 길게도 쓴 것 같긴 하지만. 어쨌거나 뭔가 찾은 기분이다.


몇 화에 밝혀질지는 모르지만 오늘 내가 찾은 복선을 풀어 쓸 날이 올 거라 믿는다. 내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작가이자 감독이니까. 일단 오늘은 지하철 계단에 서서 "헐.." 하는 대사와 함께 멈춰서 있는 장면에서 컷!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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