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과 움직임에 대한 어떤 상(像)
보건소에서 시니어 분들을 상대로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가동 범위가 큰 화려한 동작이나 근육을 사용하는 움직임보다는
일상을 당장 편하게 만들 수 있는 수업을 준비하고 싶었습니다.
할머니와 점심을 먹으며 여쭤봤습니다.
"할머니, 언제가 불편해? 어디가 제일 불편해?"
"언제가 제일 불편하냐고? 걷는 것도 힘들다.."
'관절에 부담이 가지 않는 걷기'를 주제로 삼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바로 전에 쓴 글도 '걷기'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요즘 '걷는다'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나 봅니다.
언젠가부터 매트 위에서만 하는 특별한 움직임보다는
일상에서 자주 하는 움직임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걷기'는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기본적인 움직임 중에 하나입니다.
하루 60분, 일주일에 3-5번 매트 위에서 열심히 움직임을 해도
나머지 시간에, 일상에서 움직임을 하실 때 적용되지 않는다면
몸의 변화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수년간 경험을 통해 배웠습니다.
특별한 기구나 도구를 사용해 특정 근육을 타깃 해서 이리 당기고 저리 당기면,
체형이 교정되고 움직임이 개선된다고 하는 방법들을 종종 봅니다.
그러한 서비스들이 매력적이라는 것을 압니다.
오랫동안 가지고 있는 통증이나 문제점, 불편함을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면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이실 분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저 또한 그랬으니까요.
전 너무 많은 시간과 돈을 낭비했습니다.
2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다양한 움직임 메소드와 레슨을 받았습니다.
거기에서만 그쳤다면 그래도 전 괜찮았을 겁니다.
그런데 제 몸과 움직임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 방법들이 기본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인체와 움직임에 대한 분절적이고 의도적인 접근으로 인해
왜곡되고 인위적인 상(像)을 갖게 되었습니다.
내 몸과 움직임에 대해 어떠한 관념을 가지고 있는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매 순간 내가 의식하건, 의식하지 않건
내가 존재하고, 움직이는 방식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것을 고치는 데에 아주 많은 노력과 에너지가 들었습니다.
지금도 불쑥 예전의 습관과 패턴이 발견될 때마다
오랜 시간을 성실히 잘못된 방법을 익혔던 제가 안쓰럽습니다.
게다가 그런 메소드에서 요구하는 동작들을 제대로 행하지 못할 때마다
저는 저를 탓했습니다. '내 어깨는, 고관절은, 척추는 왜 이 모양일까'
원망에 가까운 마음을 갖기도 했습니다.
요즘도 저와 같이 레슨 하실 때
'아 이게 왜 안되는지 모르겠어요. 몸이 완전 엉망이에요.'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저는 그때마다 진심을 담아서 말씀드립니다.
"그냥 그렇구나, 그게 잘 안되는구나, 네가 고생을 좀 했겠구나.
앞으로는 사이좋게 잘 지내보자. 내가 그 방법을 좀 익혀볼게"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라고 말씀드립니다.
보건소에서 '바르게 걷기'를 주제로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관절면을 타고 움직일 때 팔다리가 어떤 식으로 협응을 이루어
움직이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동작들과
체중이 이동하는 느낌을 따라 한 다리로, 두 다리로 안정적으로 몸을
지탱하는 감각들을 함께 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좀 바르게 걷지 않아도 당장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직은 여유가 많은 근육과 관절들이 서로 보상을 만들어 주어
당장의 문제가 겉으로 발현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지속해 온 몸에 부담이 되는 걷고, 서고, 앉고, 눕는 방식은
티슈 한 장의 무게만큼 가벼운 부담이었지만 세월의 무게만큼 쌓이고 쌓여
나의 삶의 질(quality)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무엇으로 나타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자주 바꾸지 못하는 가구의 배치, 장시간 일을 하는 환경의 구조
내가 처한 상황과 관계 등으로 인해 그럴 수 있습니다.
삶이란 나를 위해 세팅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억울한 것은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이 그것이 바른 방식이라고 말을 해줘서
그 방식을 열심히 따랐는데, 일부러 그렇게 했는데
그것이 사실은 나에게 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걷기' 수업이 끝나고 많은 질문이 나왔습니다.
보통 레슨에서 감각한 방식이 기존의 것과 차이점이 클 때 질문이 많이 나옵니다.
내가 여태 '바르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
의문이 많이 생기니까요.
"선생님, 제가 하루 만보씩 걷거든요. 그런데 발가락이 너무 아파요. 뭐가 문제일까요?"
걷는 모습을 좀 보여달라고 요청드렸습니다.
그런데 특이점은 발이 아니라 손에서 보입니다.
"어머니, 손은 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이유가 있을까요?"
"아 이거요? 이거 그때 어떤 운동 선생님이 이렇게 하라고 해서 쭉 이렇게 했어요."
그 운동 선생님이 어떤 '의도'로 그런 방식을 고안했는지 알겠습니다.
어깨를 펴고 날개뼈를 등뒤에서 모으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견갑을 그런 식으로 잡아끌어 모양을 만드는 것 또한 인위적인 의도입니다.
(이에 대해서 다른 글에서 다루었습니다.)
손가락에 더한 인위성은 발가락에도 불필요한 감각과 긴장을 유발했을 겁니다.
우리 몸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걷기'는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움직임입니다.
인위적인 모양을 더하거나 만들지 않습니다.
인위적인 것은 '의도'를 넣는다는 것이고, 자연적인 것은 의도를 갖지 않습니다.
외부에서 나에게 요구하는, 요청하는 움직임 말고
내 몸이 편하고 즐거운 움직임을 시간을 들여 찾아보세요.
왜 그렇게 움직이는 게 좋은 건지 정말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면
그렇게 움직이지 마세요.
그 방식을 말한 사람이 내 몸을 책임져 주지 않습니다.
그 방식이 진실로 옳은 것이라면 나를 설득해 보라고 요청하세요.
설득이 안된다면 그 방식에 따라 움직이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