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회고(22): 2.25 - 3.3
1.
유년시절 내게 피칸파이를 손수 구워 내어 주시던 친구의 엄마 가긴 투병 생활 끝에 떠나셨다. 동료, 지인의 부모도 최근 들어 돌아가시는 일이 많았다. 부모상은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차마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이다. 동시에 굳이 겪어 보고 싶지 않은 감정이다. 미룰 수 있다면 최대한, 있는 힘껏, 미루고만 싶은 일이다.
그런데, 한참을 미루고 나면 더 괜찮아질까?
생각을 덧대니 윤주님(www.instagram.com/nonan.roh) ‘인생 끝카피’ 세션이 궁금하다. (진작 마감이다) 나의 죽음을 선명하게 하는 글쓰기, 진지하고 유쾌하게 진행할예정이라는데 죽음과 삶을 새롭게 바라보며 나를 정의해 본다는데, 흥미롭다.
일 년 전, 인생 첫 카피 수업 당시 나의 장례식장에서 플레이할 음악을 고르고 묘비명을 카피라이팅 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 없이 즐겁기만 했는데. 하늘 위에서 내 장례식장을 내려다보며 누가 누가 제일 슬퍼할까 그냥 다 같이 웃을 수도 있겠다고 막연히 상상했었는데. 내가 죽는 건 즐겁고 유쾌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나의 부모님의 죽음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헤맬 게 분명하니 그저 피하고만 싶은 마음이 드나 보다.
2.
육아휴직에서 복직한 해인 2020년. 팀장으로 리더 직책을 처음 맡게 된 해이기도 하다. 한창 코로나로 내가 소속된 팀에 리소스가 집중되었고 성과에 대한 압박도심했다. 리더가 처음인 나는 앞만 보고 달렸고 팀원들을 못 살게 굴었다. 당시에는 몰랐다. 팀원들 편을 들어주지 않은 채 탓만 했고 마이크로 매니징의 끝판왕이었다. 2~3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팀원 중 총 3명은 그룹 내 다른 계열사로 전배 되었고 1명은 산업군을 바꾸어 이직을 했다. 그때도 몰랐다. 최상위 역량을 가진 팀원들과 함께였다는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자의 반 타의 반 팀원들이 대부분 바뀌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팀원들에게 연락이 통 없어 그간 서운했다(사실 내가 그만큼 별로였기 때문이겠지만) 찾아주지 않아서 연락이 통 없어서 기다렸다. 한참이 지난 후에 우연히 서로 연락할 일이 생기면 메시지로 나마 뒤늦게못다 한 마음을 전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틈틈이 했다. 조금씩 그 마음이 전해지고 옮겨 갔을까?
최근에 다 같이 만나 저녁을 먹었다. 옛날이야기를 나누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 시간을 놓치지 않고 또 한 번 전했다. 앞으로도 계속 못다 한 마음을 전해보려 한다. 아직도 많이 남았다. 함께여서 행복하고 좋았다고. 그때는 몰라서 미안했다고.
3.
아이의 봄 방학이 2주나 된다. 2주 휴가 상신은 불가능할뿐더러 친정 엄마가 돌봐 주시기도 긴 시간이다. 첫 주는 내가 이틀의 휴가를 내고 나머지 날들은 남편과 친정엄마의 돌봄 등으로 쥐어짜서 보냈다.
다행히 둘째 주는 시부모님께서 봐주신다고 하여 강릉으로 보냈다. 세상에 아이 없는 일주일이라니. 아이의 부재가 나의 여유로 이어질 줄 알았건만 오히려 운동도못 가고 업무로 숨 가쁜 한 주를 보냈다. 설상가상 감기몸살로 체력까지 바닥났다. 강릉으로 떠나기 전날도 몸살 기운으로 기침을 해댔는데 아이가 선물이라며 핑크색 박스를 내밀었다. 오버사이즈의 박스 안에는 카드와색종이로 접은 하트가 있었다.
선물을 하고 카드를 쓰고 주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던 나는 어느새 주는 것에 인색하고 받는 것이 어색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았을 때 도통 어쩔 줄 모르겠다. 그래도 아이에게는 온 마음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나도 아이가 될 수는 없을까?
“엄마 아직도 빨간색 좋아해?”
“응 그럼”
“엄마가 좋아하는 빨간색으로 그 하트 접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