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약 죽는다면. 우리의 묘비에는 어떤 글을 새기게 될까? 나만의 멋진 한 마디를 적을 수도 있고, 살면서 좋았던 점에 대해 적을 수도 있고, 감사했던 사람이나 일에 대해 적을 수도 있다.
그런데 묘비에 새기고 싶은 문구로 '남은 재산 목록'을 적는 사람은 없을 거다. 그것만큼 바보 같은 죽음은 없을 테다. 우리 함께 자문해 보자. 과연 '나는 묘비에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 한 발 더 나아가 '나는 세상에 무엇을 남기고 싶은가'.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한다. 존재하는 것 자체로서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우리 삶의 소명은 무엇이고 우리의 존재 이유나 의미는 무엇일까. 철학적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심오하기까지 한 질문이라 막연하고 답답한 느낌이 든다.
이렇게 막막한 질문을 마주할 땐, 질문을 살짝 비틀어 봄으로써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질문을 조금 고쳐보자.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현재 삶의 태도가 곧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에, 그 질문에 대한 답이 곧 우리 묘비에 들어갈 문구가 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산다. '아닌데요? 저는 가족을 위해 사는데요?'라고 반문할 수 있다. 물론 배우자와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삶은 아름답다. 진짜로 그런 사람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마음 한 편에 자신만의 욕망을 숨기고 산다. 가족에 대한 희생보다 더 앞선 자기만의 우선순위를 하나쯤은 품고 산다. 단지 당장은 그럴 여건이 되지 않아 잠시 미뤄뒀을 그런 욕망 말이다.
만약 우리가 모든 욕망을 채우고 난다면 어떨까? 갖고 싶은 것을 다 갖고, 하고 싶은 일을 다 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자연스레 이어질 허탈함과 허무함, 그 채울 수 없는 공허함에 일종의 인생판 번아웃이 들지도 모른다.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삶은 어렵다. 어려운 만큼 숭고하다. 그러나 예로부터 '곳간에서 인심 난다'라고 했다. 일단은 자기 형편이 좋아야 남을 챙길 수 있다. 그러므로 현재 삶의 우선순위는 나를 향하는 게 맞다. 그것은 욕망의 노예가 되는 일도, 부끄러워해야 할 일도 아니다. 마치 비행기에서 자기부터 산소마스크를 쓴 다음 자녀를 챙기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여유롭지 않은 상황에서 이타적인 삶만 고집할 순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일종의 욕심이다. 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바라볼 필요도 있다. 여기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예가 있다. 지금 당장 자신이 기부할 수 있는 금액을 떠올려보자. 그리고 미래에 스스로 성장한 다음 기부할 수 있는 금액도 떠올려보자. 두 시기 중에 언제 기부하는 게 더 큰 영향력을 끼칠까.
좋은 영향력을 위한 삶. 선한 영향력을 펼치는 사람. 모두 좋은 말이고 멋진 삶의 목표다. 하지만 그건 어떤 면에서 결실이다. 열매가 결실을 맺기 전에 냉큼 따먹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지금 당장과 미래. 그 둘을 비교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마치 새싹채소와 순무를 비교하는 것과 같다. 둘 다 맛도 쓰임새도 다르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다만 나는 미래를 선택하길 조심스럽게 추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