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말 '유럽 여행', 이건 어느 순간부터 이십 대의 통과 의례가 된 것 같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에는 청춘이라면 한 번쯤은 유럽에 여행을 떠나야 할 것 같은 의무감마저 들었더랬다.
그렇지만 마냥 좋다고 떠날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그곳을 향한 동경은 점점 커졌고 일종의 환상 같은 게 생겨나기도 했다. 이를테면 유럽 사람들은 모두 친절하다거나, 유럽의 것들은 모두 맛있고 세련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같은 것 말이다.
내가 처음 유럽에 방문한 건 서른이 다 되어서였다. 또래 친구들보다는 다소 늦은 시기였는데, 숨만 쉬기도 벅찼던 나의 이십 대에는 유럽 여행을 꿈도 꿀 수 없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이십 대의 끝자락에서 나는 우연이면서도 필연적으로 <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이라는 책을 만났고, 이를 통해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다.
"그래. 일단 저지르고 수습하자. 망한 것 같으면 죽지 뭐!"
이런 막무가내식 생각으로 800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을 대출받아 유럽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왜 하필 800만 원이냐면, 그것이 당시 나의 최대 대출 한도였다. 마음 같아선 1,000만 원을 꽉 채워 떠나고 싶었지만, 직업도 없는 내가 그런 돈을 빌릴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행운이었다. 그리고 그 정도 돈이면 적당히 먹고 자며 아쉽지 않은 여행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비행기표를 예매한 후 가족들에게 유럽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선포했다. 그러자 뜻밖의 일이 생겼다. 나에게는 한 살 터울이면서 두 학년 차이가 나는, 같은 배에서 태어난 형이 한 명 있는데, 그 형이 여행 경비로 쓰라며 100만 원을 건넨 것이었다.
삼십 년 평생 처음 받아보는 용돈에 놀라 황당해하고 있는 나를 보며 형은 이런 말을 건넸다.
"내가 스무 살에 유럽 여행 다녀와서 제일 후회하는 게 뭔 줄 알아? 그때 돈을 아끼지 말 걸... 하는 거야. 그때 돈 아낀다고 끼니를 바게트로 대충 때운 적이 많은데, 돌아와 곱씹어 보니 그 무미건조하게 보낸 한 끼 한 끼가 정말 아깝더라. 이제는 돈이 있어도 다시 갈 시간이 없는 그 시간이 정말 아쉬워. 너는 이 돈 가지고 하루 한 끼 정도는 비싼 요리 먹으면서 여행하고 와, 나처럼 후회하지 말고."
형은 자신이 범한 우를 내가 반복하지 않길 바랐던 모양이었다. 물론 내가 그런 궁핍을 직접 겪어보며 스스로 지혜를 얻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겠지만, 형 입장에서는 굳이 동생이 젖은 길로 가며 허우적 대지 않길, 아스팔트 길을 따라 예쁘고 멋진 경험을 가지고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테다.
그리고 어쩌면 지난날 자신이 유럽에 남기고 온 미련을 내가 대신 해소해 주길 위한 보탬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후회 없는 삶을 사는 일이 좀처럼 쉽지 않은 이유는 현재의 선택이 후회를 남기지 않으리라는 어떠한 확신도 할 수 없기 때문 아닐까. 배곯은 자는 배부른 자의 미련을 알지 못하고, 배부른 자는 배고픈 자의 아쉬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떤 선택이 최고의 경험인지는 그 누구도 예단할 수 없으리라.
다만 그 안에서 느낀 점이 있다면, 다만 무언가 배운 점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선택으로 남길 수 있지 않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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