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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비한 순간도 경험이 될까?

by 오제이


하루 종일 바쁘게 살았지만,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아무것도 이룬 게 없어 허무해지는 순간이 있다. 분명 정신없이 바쁜 날을 보냈음에도 제대로 해낸 일이 하나도 없으니 민망하기 그지없다.


이런 순간도 다 경험이라며, 나중에 어떻게든 소중히 쓰이게 될 자산 아니겠냐며 위안 삼아보지만, 왠지 그 말이 선뜻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가끔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소위 말해 현타가 오게 되는데, 어제도 나는 그런 기분을 맛보고야 말았다.



나는 어제 아침 일찍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 늘 하던 대로 움직였다. 컴퓨터를 켜 지난 하루 일과를 정리하고 오늘 할 일을 추린 뒤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집중이 안 돼 몇십 분 동안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도무지 생각이란 걸 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가게 되었고, 애꿎은 배경색이나 글자색만 바꾸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아무 소득 없는 두 시간이 지나버렸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잠들기 전까지 반복됐다.


밥 먹는 시간만 빼고 오늘 내게 주어진 거의 모든 시간을 낭비한 기분이 들었다.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지 않겠나? 생각하고 넘어가 수도 있겠지만, 내 좁아터진 마음 씀씀이로는 그렇게 맘 편한 소리로 어물쩍 넘어가지질 않았다. 이유를 찾아 고쳐야 분이 풀릴 것 같았다.


기어이 분 단위로 쪼개가며 내가 낭비한 시간과 이유를 계산해 보고야 말았다. 그렇게 낱낱이 분석해 까발리고 나니 내가 정말 못나 보였다. 마치 도둑질이라도 한 것처럼 스스로에게 실망했고, 마음이 까맣게 변해버렸다. 그냥 넘어가고 내일 다시 힘을 냈으면 되었을걸, 괜한 짓을 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은 예쁜 옷을 입으면 자신이 예쁘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예쁜 것은 옷이지 자신이 아니다. 이 사실은 집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거울 속에 투영된 자신의 헐벗은 몸을 보며 진실을 마주하게 되고, 씁쓸한 맛을 삼키게 된다.


나의 내면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글을 쓰고 열심히 산다고 해서 나 자신이 보다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드러나는 겉모습일 뿐, 실제로 가꿔야 하는 것은 내 머릿속에 있는 생각이다. 그 생각이 정돈되지 않아 시간을 낭비하고 만 것을, 나는 애꿎은 곳에서 답을 찾아 벌하고자 한 건 아닐까.





살면서 경험한 다양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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