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나는 쫓기듯 글을 써왔다. 언제나 제한 시간에 쫓기거나, 떠오른 생각이 금세 흩어질까 서둘러 적어야 한다는 조급함에 휘갈기듯 펜을 놀렸다. 그래서일까, 시간이 지나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보면 묘한 불안감이 따라붙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이 담겨 있어도, 삐뚤빼뚤하게 흐트러진 글씨를 마주하면 글 자체가 어쩐지 초라하고 부끄럽게 느껴졌다.
천재들은 악필이라지만, 모든 악필이 천재의 증거는 아니다. 글씨체가 그 사람의 지성을 대변하지는 않지만, 예쁘게 쓸 수 있는 사람이 굳이 그러지 않는다면, 아니, 예쁘게 쓸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에도 애써 시도하지 않는다면, 그건 어쩌면 실패에 대해 스스로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회피 아닐까.
나는 평생 악필인 줄로만 알고 살았다. 그런데 문득, 나도 제법 단정하고 예쁜 글씨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이 있었다. 글자가 많이 담긴 풍경을 그릴 때였다. 그 순간 글자를 단순한 문자가 아닌 이미지로 받아들이고, 그림을 그리듯 한 자 한 자 천천히 정성을 들였다. 완성된 그림 속에 담긴 글씨들은 예상보다도 훨씬 가지런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그때 비로소 알게 됐다. 조급함만 내려놓는다면, 나도 얼마든지 예쁜 글씨를 쓸 수 있다는 것을.
내 악필의 원인은 실력이 아니라 조급함이었다. 마음은 늘 앞서 있었고, 손은 그 마음을 따라잡으려 허덕였다. 생각이 달아나 사라질까 두려워 더 급히 써 내려갔고, 그런 초조함이 글씨를 흐트러뜨렸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실험을 해보았다. 노래 가사를 옮겨 적으며 시간을 쟀다. 한 번은 정성껏 또박또박 예쁘게, 또 한 번은 최대한 빨리.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두 방식 사이의 시간 차이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실험 전에는 예쁘게 쓰는 편이 두 배는 더 걸릴 거라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긴 차이가 나지 않았다. 결국 아무리 급히 휘갈겨 써도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서두르는 것에 얻는 이익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뒤로 나는 글을 쓸 때 그림을 그리듯 천천히, 정성을 들여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다. 그렇게 써 내려간 노트는 그 자체로 눈길을 머물게 하는 풍경이 되었다. 그러느라 떠오른 생각을 놓쳤느냐고?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금방 사라져버릴 생각이라면 애초에 내 안에서 그렇게도 간절하고 선명한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급함과 불안, 그 막연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부딪혀보는 일이다. 실체 없는 불안을 붙들고 망설이지 말고, 차라리 그게 정말 실체가 있는지 스스로 실험해 보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류는 상상으로 발전했다고 했다. 나는 그 상상이 가진 밝음과 어둠을 동시에 본다. 검증되지 않은 실패 예측에 스스로 갇혀 초조함에 휘둘리는 것, 그것이 상상이 가진 어두운 면이 아닐까.
깜깜한 방을 보면, 괜히 귀신이라도 있을까, 벌레라도 있지 않을까 겁이 날 때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평생 그 방에 들어가지 않고 문을 닫은 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할까? 아니다. 그저 방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켜보면 된다. 불을 켜면 귀신같은 건 없다는 걸 알게 될 테고, 벌레가 있다면 그저 퇴치하면 끝날 일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어둠 속 방을 평생 열어보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도 마음속에 그렇게 방치된 어두운 방을 몇 개씩 안고 산다.
오늘은 그중 하나쯤, 조심스레 불을 켜보면 어떨까. 그 방 안엔 귀신도, 벌레도 없다는 걸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조그마한 용기로부터, 꽤 많은 것들이 새로 시작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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