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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같은 퇴근길

by 오제이


아내와 함께 집에 가는 길, 1호선 배차간격이 절망인 것을 확인하고 심란해졌다. 동묘앞이나 광운대를 향하는 열차는 드문드문 있었지만, 경기 북부로 향하는 열차 간의 거리는 30분 이상 벌어져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그걸 고민해 봐야 좋지 않은 기분만 들 게 뻔했으므로, 나는 서둘러 해결책을 찾는 쪽에 마음을 쏟았다.


우린 이미 각자의 일정으로 모두 1만 보 이상 걸어 발이 불어 터진 상태였다. 그대로 버스 정류장까지 돌아간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다, 이미 지하철 개찰구에 카드를 찍고 들어왔으므로 일종의 낙장불입 같은 상황이었다. 일단 오는 걸 타고 다른 호선으로 갈아탄 뒤 버스를 타고 갈까도 고민해 봤지만, 그 선택지가 뒤이어 오는 열차를 기다리는 것보다 현격히 낫다는 보장이 들진 않았기에 나는 우선 광운대행을 타고 가서 석계에서 갈아타는 쪽을 선택했다.



오늘 1호선에는 무슨 일이 있던 걸까. 평소와 달리 광운대행에도 사람이 들어차 발 디딜 틈 없었다. 게다가 1호선 특유의 냄새와 함께 별 별 소동이 많았는데, 우리가 탄 노약자석 앞쪽 공간은 오늘따라 더 번잡하고 소란스러웠다.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한 할머니가 자신보다 더 연배 있는 증조할머니 격 노인께 자리를 양보하는 이타심을 보였고, 그러는 사이 많은 승객이 발을 밟히고 그녀의 묶어두었던 짐 수레가 널브러지는 등 매우 어수선한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드디어 격전의 땅 석계에 도착했다. 그곳은 경기 북부를 향한 원정길에 오른 다양한 사람이 이미 터를 잡고 있었는데, 평소 보던 석계역 풍경과는 사뭇 다른 비장함과 격앙된 모습에 자칫 정신을 놓았다간 열차를 탈 수 없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얼핏 보아도 많은 인원이 플랫폼 앞에 서 있었고, 나는 재빠르게 곁눈질로 인원을 가늠해 보았다. 이대로라면 열차 두 대가 와도 우리는 탑승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판단을 내린 나는 반대편에서 오는 열차에 냉큼 탑승했다. 뒤따라 열차에 오른 아내는 의아했는데, 나로선 이전 정류장까지에 가서 미리 열차를 타는 것이 저 경쟁자 무리를 해치울 묘안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한 정거장 전으로 역주행을 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마주한 풍경은 신비로웠다. 객실은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 이 시간에 서울 중심으로 향하는 지하철의 풍경은 이랬던가? 역시 사람은 겪어 보기 전까지 알 수 없는 일이 많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친구들과의 약속을 잡지 않게 된 이후로 늦은 시각에 번화가로 향하는 열차를 타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그 풍경이 낯섦과 동시에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한 정거장 전에 도착한 열차. 하지만 내리는 문이 반대쪽일 거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그대로 계단을 타고 반대편으로 넘어가기에는 우리의 발은 너무도 피로했다. 그래서 다음 정거장으로, 그다음 정거장으로. 좌우로 오가는 열차의 출입구를 공유하는 플랫폼이 나올 때까지 이동했고 그대로 가다간 종로까지 다시 가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살짝 겁이 날 무렵, 우리는 회기에서 반가운 풍경을 만났고, 서둘러 건너편에 열린 열차의 문으로 뛰어들었다.


괜한 꼼수를 부리다 더 늦어버린 상황. 내 시간뿐만 아니라 아내의 시간까지 허비한 미안함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그때, 아내가 먼저 위로를 건넸다.


“오늘은 꼭 기차여행을 하고 온 것 같네. 색다른 경험이라 즐거웠어요.”


그 말에 비로소 굽었던 등이 펴지고 내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무척 고맙고 참으로 사랑스러운 다정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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