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다리고기다리던 간식 시간
미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나는 굉장히 바른생활 어린이였다. 학교에 다녀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곧바로 숙제부터 하였는데, 특별히 착했다기보다는 미루거나 안 해도 된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책임감이 강한 탓도 있겠다. 숙제를 할 때 도움을 요청해 본 적이 없다. 숙제는 혼자 풀어야 한다고 배웠는 데다,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보단 내가 하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동생이 숙제가 할 나이가 될 때까지 부모님은 ’ 숙제를 시킨다 ‘라는 개념을 생각 못해보셨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하신다.
그렇게 나는 매일같이 정확히 30분 안에 숙제를 마친 뒤, 간식을 먹고 밖에 나가 저녁시간이 될 때까지 친구들과 뛰어놀았다. 시계 따위는 없으니 대충 노을이 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너무 늦게 들어가서 혼나진 않을까 막연히 조바심이 날 때쯤이면 저녁 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가 낡고 까만 우리 집 뚱보 텔레비전으로 Disney 채널이나 Nickelodeon을 시청하며 엄마가 차려 주는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나면 취침 시간 전까지 자유롭게 시간을 보냈는데, 보통 책을 읽거나,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모험을 떠나거나 (보통 뗏목에서 살아남는 상상 따위를 했다), 인형으로 역할놀이를 했다. (MBTI에서 확신의 N.) 치열한 경쟁이나 막중한 책임감 없이 평화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렇게 단조롭고도 행복한 나날들 중, 내가 유난히 기다렸던 시간이 있는데, 그건 바로 숙제 후 간식시간이었다. 당시 우리 집에는 간식거리가 많지 않았다. 방금 이 글을 쓰며 최근에 왜 이렇게 갑자기 살이 찔 수밖에 없었는지 깨달았다. 그렇기에 어느 날부터 엄마가 간식시간을 정했을 때, 무척 신이 났다.
일주일에 한 번씩 근처 Stop & Shop이라는 가게로 장을 보러 갔었는데, 거기서 초코칩 쿠키나 슈가 쿠키 중 한 상자를 살 수 있었다. 둘 다 너무너무 좋아하지만 굳이 고르자면 초코칩 쿠키를 더 좋아했기에 7:3의 확률로 초코칩 쿠키를 골랐다. 쿠키 한 상자를 품에 안고 나올 때면 마음이 얼마나 든든하던지. 언젠가 특별한 주간이었는지, 쿠키를 두 가지 맛 다 산 적이 있었는데, 세상이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그때 나는 쿠키 하나면 행복해지는, 알고 보면 참 쉬운 세상을 살고 있었다. 그때 먹었던 쿠키보다 더 맛있는 쿠키를 먹긴 힘들 것이다.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간식시간을 자랑할 만큼 들떠 있었다. 하지만 간식시간에는 내가 예상치 못한 복병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당근. 엄마는 나의 건강을 챙겨주시기 위해 쿠키 대신 당근을 간식으로 내놓으실 때가 있았다는 것이다. 쿠키를 먹을 생각에 잔뜩 기대에 부풀었던 나는, 당근을 보자마자 마음이 착 가라앉아버렸다. 한동안 일주일에 두 번만 쿠키가 간식으로 나왔는데, 쿠키가 간식이 아닌 날에는 기가 푹 죽어있었다. 그런 나의 모습에 본 엄마께서 이번에는 쿠키와 당근 두 가지다 모두 간식으로 내놓으셨다. 당근을 다 먹으면 쿠키를 먹을 수 있다는 약속과 함께.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당근을 입에 넣고 재빠르게 삼켰다.
사실 당근을 크게 싫어하는 건 아닌데, 아직도 생당근은 허머스에 찍어먹지 않는 이상 그것만 먹지는
않는다. 그러니 그때의 나는 오죽했으랴. 하교하면서부터 오늘 간식은 제발 쿠키만 나오기를 바랐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한 게 막상 쿠키만 나오면 노력 없는 보상인만큼 그 맛이 덜했다.
그렇게 당근과 애증의 관계는 깊어져만 갔다.
다만 자식 당근을 먹이려 애쓰셨던 엄마의 마음이 통했는지 이상하게 남편이 그렇게 생당근을 좋아하고 잘 먹는다. 허머스도 없이 잘도 먹는다. 좀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