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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찬우 Jun 11. 2019

영친왕의 친일파명단 제외사실은 마냥 불편하기만 하다.

대한제국 황실의 다른 이들도 등재되어야 한다. 

의민태자, 즉 영친왕 이은이 일본육군 중장이자 사령관으로 1943년 7월부터 1945년 3월까지 부임했던 일본육군제1항공군(第1航空軍, 1FA)은 제10비행사단, 제5비행여단, 제12비행여단, 그리고 제16비행여단 산하 총 10개 전투비행전대가 편성되어 있었다.  


제1항공군은 산하 전투비행전대 중에서도 가장 병력수가 많은 제 10비행사단의 전투비행전대에서 인원을 차출하여 "진천제공대(震天制空隊:신텐세이쿠우타이)"라는 별명을 가진 공대공특공대(空対空特攻隊)를 신설한다. 1944년 11월의 일이다. 


편의상 "신텐타이"라고 불리는 이 부대는 일본 본토 공습을 위해 괌에서 이륙하는 미군의 B-29 폭격기에 대해 "자살공격"을 감행하는 이른바, "특공대(特攻隊: 토우코우타이. 독고다이가 여기서 나온 말이다)" 중에 하나였다.  


일본육군항공대의 "자살공격"은 1943년부터 있어왔지만, 실질적으로 "자살공격"을 조직적으로 계획하기 시작한 것은 1944년부터의 일이다. 


1944년 6월 19일에서 21일까지 3일간 벌어진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 연합함대가 치명적인 괴멸을 당하고 도쿄를 비롯한 일본의 주요 도시가 미군에 의해 장거리 공습을 당하게 되면서 연합군, 특히 미군의 압도적인 항공전력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자살공격"이 유효하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늘어났기 때문. 


1944년 9월28일에 대본영으로부터 각 항공군에 "자살공격을 감행하는 특공대"를 편성하라는 명령이 하달되며, 1944년 11월에 제1항공군과 제3항공군이 각각 특공대를 편성한다. 이후 특공대 편성은 일본이 패망할때까지 지속되었다.  

같은 시기에 일본 서부를 방어하는 임무를 띈 서부군관부 산하의 제6항공군((第6航空軍, 6FA)은 예하의 제12비행사단에서 인원을 차출하여 공대공특공대를 조직하는데, 이 조직은 “카이텐테이(回天隊)”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고, 본토방어공군전력의 양대 핵심 중 하나였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바로 의민태자, 즉 영친왕 이은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다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는 현재 총 5,207명의 친일행위자가 수록되어 있는데, 영친왕은 "알제 강점기 당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의해 일본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인질로 잡혀갔으며, 강제적으로 끌려간 처지였기에 친일파로 분류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친일명단에서 제외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파를 규정하는 선정 원칙은 친일 행위의 "자발성, 적극성, 반복성, 중복성, 그리고 지속성"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영친왕 이은이 어릴 적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의해 볼모로 끌려가고 또 당시 일본 정부에 의해 정략결혼의 대상이 된 점은 역사 상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강제적으로 끌려간 인물의 행적"이라고 보기에는 그의 일본에서의 경력이 다른 이들에 비해 너무 화려하다. 


일본의 화족으로서, 그리고 왕공족으로서 여타 친왕가와 동등한 대접을 받아왔다는 점.

아니 조선의 “왕”으로서 대접을 받았다는 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는데 그치지 않고 상위교육기관이었던 일본육군대학까지 진학하였다는 점. 제59보병연대장, 제2근위보병여단장을 지내고, 일본육군교육통감부와 일본육사교관 및 예과 부교장을 역임했으며, 중일전쟁 당시 북경에 사령부를 두고 중국 침략의 첨병으로 활동했던 북지나방면군(北支那方面軍)의 참모를 겸임하고(실제로 중일전쟁에 참전했다!)  각각 4사단(오사카), 51사단(우츠노미야)의 사단장을 지냈다는 점.  제59보병연대장으로 재임하던 시기에는 2.26사건이 벌어지는데, 통제파의 일원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황도파의 부대를 제압하기 위해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출동하기도 했다.  

최종계급은 중장. 단, 당시 일본의 계급체계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부분이 있으니, 일본군에서의 중장은 오늘날 대한민국 국군의 대장 급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일본군의 장성계급은 소장, 중장, 대장, 대원수의 4계급체계이고, 대원수는 텐노에게 주어지는 명예직이니, 당시에 일본군에서 중장 계급이 얼마나 높은 위치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자살공격을 감행하기 위한 특공대"가 편성되던 당시 제1항공군의 사령관이었다.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제1항공군은 일본의 본토 방어를 위해 1942년에 편성된 6개 항공군단 중에 하나였으며, 1945년 1월에 본토결전을 대비하여 텐노의 직할 부대로서 신설된 항공총군(航空総軍, FSA)의 주요 항공군단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6개 항공군단은 다음과 같았다.  


제1항공군(1FA) - 일본본토 방어가 그 목적. 활동지역은 텐노가 거주하고 있는 동경을 포함한 동일본 전체


제2항공군(2FA) - 만주국을 비롯한 만주 전체를 방어하는 목적


제3항공군(3FA) - 미얀마, 인도네시아, 태국,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등의 동남아시아 지역을 방어하는 목적


제4항공군(4FA) - 뉴기니아, 필리핀 등, 남동방면을 방어하는 목적


제5항공군(5FA) - 중국 및 한반도를 방어하는 목적 


제6항공군(6FA) - 관서지방을 방어하는 목적 


이 중 제1항공군과 제5항공군이 항공총군 산하로 편성되었고, 본토방어를 위한 "자살공격특공대"가 가장 먼저 편성된 것은 영친왕 의민태자 이은이 사령관으로 재임하던 당시의 제1항공군이다. 


당시 사령관이었던 그가 이런 사실을 몰랐을 리 없으며, 그의 일본군 내에서의 위치나 화족으로서의 지위를 고려해보았을 때, "친일 행위의 자발성, 적극성, 반복성, 중복성, 그리고 지속성"의 모든 면을 충족하고 있지 않느냐는 거다.  

아니, 자발성과 적극성에선 이미 2.26 사태 당시에 제59보병연대병력 전원을 자신의 재량으로 출동시켜 황거의 방어에 주력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이 “업적<?>”을 인정받아 근위보병여단장이 된 거고. 


1945년 4월1일, 즉 코이소 쿠니아키 내각 말기에 그는 제1항공군에서의 "업적"을 인정받아 제국주의 일본의 실질적인 사령부이자 역시 텐노의 직할기관이었던 군사참의원(軍事参議院)의 참의관(軍事参議官)으로 영전한다.  과연 그 업적이 무엇이었을까 심히 궁금해진다. 


군사참의원은 메이지20년(1887년)에 처음 설치되어 일본이 패망한 후에 폐지된 기관으로, 중요한 군사적 안건에 대해 텐노의 자문에 응하는 자문기관이다.  1939년에는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에서도 군사자의원(滿洲國軍事諮議院)이라는 기관을 설치했었다.  


군인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던 메이지 텐노의 치세에는 그래도 정치색을 띄지 못하는, 어디까지나 군무에 대한 텐노의 의견을 수렴하는 기관에 불과했지만,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타이쇼 시대 중기부터 변질되기 시작하여, 쇼와 시대에는 오히려 군부의 의견을 텐노에게 역으로 전달하는 기관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군사참의원에 내정되는 군인들은 육군대신, 해군대신, 참모총장, 해군 군령부장, 그리고 각 방면 사단사령부장관 및 교육총감으로, 당시 일본군의 가장 핵심에 속하는 인물들로만 구성된다는 특징이 있었다. 영친왕이 군사참의원으로 승격된 시기에는 요나이 미츠마사, 아나미 고레치카 같은 당시 일본군의 거물들이 모두 군사참의원이었던 시절이니, 망해가는 순간이라고 해도 대단한 거라고.  앞서 영친왕은 제1항공군 사령관이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일본이 패망하면서도 ‘본토 방어’, ‘1억 총 옥쇄’라는 병크를 터트리던 그 중심에 속하는 항공전력이, 그것도 텐노가 사는 동경을 방어하는 책임을 지고 있던 부대가 바로 제1항공군이라는 점을 감안해본다면, 하하, 어느 정도의 수준이었는지 알겠지?  


참고로 메이지 시대 이후 군사참의관으로 영전한 화족은 총 8명인데, 이 중 영친왕이 유일한 한국인이다. 유일하다고.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일제시대에 모든 왕공족들은 나름 대접을 받았다고 하지만 텐노의 직속기관, 그것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비롯한 당시 일본의 침략전쟁의 선봉에 있던 일본 군부의 입김을 대변하는 기관에 속하게 된 유일한 한국인이 친일부역자가 아니라는 말이 과연 타당하냐고.  일본군에서 중장 계급까지 올랐던 한국인은 영친왕 이은을 비롯하여 홍사익, 조동윤, 이병무, 조성근, 어담, 이희두의 8명이 있는데, 이 중 홍사익과 영친왕을 제외하면 모두 대한제국군에서 일본군으로 전향한 전형적인 배신자들이다.

홍사익은 뭐, 자발적으로 군인이 되고자 한 인물이고, 영친왕은 뭐 앞서 수도 없이 설명했고.  민족문제연구소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왕공족들은 일본의 황족과 화족들, 그리고 조선 귀족들 사이의 지위를 일본이 정할 당시에 특수한 지위를 부여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하여 고급 관료직이나 고급 간부직을 부여한 것이기 때문에 “친일부역에 대한 댓가라고 보기에 무리가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조선 및 대한제국의 인사들 중 친일행위를 한 자들은 남김없이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올린 반면, 대한제국 황실 인사들 중 일본 황실의 왕공족 대우를 받은 이들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흥친왕 이희(초대 운현궁) 및 그의 아들이었던 영선군 이준(2대 운현궁)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친일행위자로 규정하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친일 행위보다는 조선 및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일본의 일개 친왕가로서 규합하게 된 것에 대한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묻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망국의 군주와 그 자손들이라는 세간의 동정론도 작용했다.  독립운동과 상해임시정부를 암암리에 지원했던 사동궁 이강(의친왕)이나 3대 운현궁 이우(흥영군)처럼 반일적 스탠스를 보였던 인물들이 없던 것도 아니다. 따라서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들 왕공족들에 대해 왕공족에 들어갔다는 이유가 아니라 실질적인 친일 행적이 있는지 여부로 친일파인가를 판단했다고 한다.  


문제는, 을사조약이 이루어진 후, 일본으로부터 대한제국 황실의 인물이라는 이유로 위로금 한번 받은 것 이외에는 이렇다할 친일행위를 한 적이 단 한번도 없는 흥친왕 이희(고종의 친형)조차 적극적인 친일행위를 한 골수 친일파로 규정되어있다는 거다.  


그 아들, 영선군 이준(고종의 조카)는 말년에 뚜렷한 배신행위(단군신화를 짜집어서 일본의 건국신화의 한 에피소드로 꾸며,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가 한반도에 환웅을 파견한 것처럼 꾸미려다가 말아먹었다)를 일삼았으니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뒷끝이 좋은 이야기는 아닌거다.  뇌물 한 번 받아먹은 걸(물론 잘했다는 거 절대 아니다) 사람은 용서할 수 없는 민족의 배신자 낙인이 찍히고, 반대로 일본이 패망하고 GHQ에 의해 텐노의 직계를 제외한 모든 황족과 화족, 왕공족들이 신격강하를 당하면서 민간인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식민지배 시절에 호의호식하면서 화려한 일본군 경력을 거쳐 일본 군부의 금자탑이었던 군사참의원 자리에까지 오른  영친왕이 친일인명사전에 누락되어 있는 것은 솔직히, 덤덤히 “아 그는 어릴 적에 볼모로 잡혀갔었으니까"라는 이유로 친일명단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은 백번 천번 양보를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미군정, 즉 GHQ가 일본의 황족과 왕공족, 그리고 화족들에게 신적강하(귀족이나 왕족의 신분에서 일개 민간인으로 그 신분을 낮춘 것을 의미함)를 단행한 건 1947년의 일이다.  


해방 후 바로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던 사동궁 이강(의친왕)이나 3대 운현궁 이우(흥영군)와 달리, 일본이 패망했어도 일본에 머무르며 일본의 황족에 준하는 대접을 받았던 사람을 어릴 적에 볼모로 끌려갔으니 이해해주자는 건 솔직히 말이 안되잖아.  


그의 정실인 이방자 여사(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梨本宮方子. 대한제국의 시호는  현덕정목온정자행황태자비: 顯德貞穆溫靖慈行皇太子妃) 는 남은 평생을 장애아들을 위해 봉사하다 가신 분이니, 충분히 존경할만한 인물이긴 하지만.  


형평성에 어긋나잖아. 


게다가 영친왕 이은이 신적강하로 그 지위를 박탈당하기 전까지 그가 한반도를 방문한 건 고작 4번에 불과하다고.  그 중에 한번은 한반도 사람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억압의 가장 선봉에 있던 상징물, 조선신궁(아이러니컬하게도 현재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있는 곳) 참배하러 간거였고.  


뭐 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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