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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연 Aug 06. 2019

책 <내게 무해한 사람>, 마음의 겹겹을 헤집다.

'어쩔 수 없음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한 뼘의 성장에 대하여.






'어쩔 수 없음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한 뼘의 성장에 대하여.





한국소설과 단편소설과 젊은 작가라는 카테고리를 썩 내켜하지 않는 취향으로 이 모든 조건을 가진 책을 선택하고 읽는다는 건 큰 모험이다. 바로 얼마 전 같은 조건을 가진 책을 혹시나 해서 읽었다가 '역시…….' 하며 데이고 내려놓은 기억이 생생한 때여서 더 그랬다. 간직하고픈 단어 하나, 문장 한 줄, 마음 한 켠 건져내지 못한 채 떠나보낼 책을 읽은 시간이 아까워 후회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모험을 감행했다.



최은영 작가는 <쇼코의 미소>를 쓴 작가이고, 그 책에 실린 단편들도 나쁘지 않았던 인상이 있었지만은, 무엇보다 작품들의 발치에 실린 '작가의 말' 몇 마디로 나를 울린, 많이 울게 한 작가이므로 충분히 모험을 감행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출판사와 작가와 책들 가운데서 보석을 한 번 발견하면 그것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다음을, 그 다음을, 또 그 다음을 믿고 기다리는 나만의 규칙 또한 최은영 작가에게 유효했으므로.



그 책, <쇼코의 미소>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최은영 작가는 지난 날의 자신에게 이렇게 썼다. 「(전략) 그애에게 맛있는 음식도 해주고 어깨도 주물러 주고 모든 것이 괜찮아지리라고 말해주고 싶다. 따뜻하고 밝은 곳에 데려가서 그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다. 그렇게 겁이 많은데도 용기를 내줘서, 여기까지 함께 와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292쪽) 이를 읽고 나는 이렇게 썼다. 「지난 날 생존하기 위한 대가로 삶이라는 파도에 휩쓸려 보낸 많은 감정들을 보상받는 것 같았다. 읽는다는 것의, 문장을 찾아 헤맨다는 것의 의미가 여기에 있으려니 한다.」 이같이 쓰고 다시 울었다.



두 번째 소설집 <내게 무해한 사람>에서도 작가는 여전히 아릿함이 느껴지는 손길로 마음을 어루만진다. 어른이 된, 아니, 어른이 되어버린 현재 시점에서 어렸던 과거를 회상하며 이젠 빛바랜 상자에 꽁꽁 넣어 지난 일로 묻어둔 관계와 그 순간엔 진심이었던 마음들과 미처 드러내지 못했던 작은 마음들에 대해 쓴다. 어떤 형태로든 상실을 겪어온 우리의 지난 날을 어루만진다. '그때로 돌아가면 더 잘할 것을'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할 것을' 같은 류의 하지 못했던 일에 대한 전복적 상상보다는, 단지 '나는 그렇게 견뎠구나' '당신은 그랬었구나' 라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식을 택하면서.



작가는 삶에는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리 잘하려고 했어도 누구에게나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나 '어쩔 수 없음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한 뼘의 성장에 대해 쓴다. 그 과정에서 최은영의 소설 속 화자들은 지난 날 뾰족한 마음으로 자신을 찌르며 스쳐갔던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에 다다른다. 그렇게 세월의 더께가 두텁게 내려앉은 마음의 겹겹을 헤집는다. 그 긴 시간의 방황 끝에 찾아낸 진심은, 그 마음은 결국 나를 용서하고 나를 받아들이며 나와 화해하는 '지금의 나'에 닿는다.



가을방학의 노래 <베스트 앨범은 사지 않아>가 떠오르는 책이었다. 특히 자신을 드러내는 재주가 유독 없었던,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좋아하면서도 내심 괴로웠던 이의 이야기가 담긴 『모래로 지은 집』에서 많이 그랬다. 나를 아껴주는 사람에겐 나의 '베스트'만 필요하지는 않다는 걸, 그저 나의 '모든 모습'이 필요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은아의 마음이 내 마음이 비친 것 같았다.



많은 단어와 문장과 문단들에서 눈물이 고였다. 아프고 예민한 마음을 위로받고 있다는 것에 위안받는 자의 마음이 당연 그러하듯이. 아릿한 문장들이 유유히 흘러가는 가운데 어린 날의, 지난 날의 내가 그 행간에 서 있었다. 아무리 눈을 피하고 장을 넘겨도, 어느 곳에서나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 눈동자가 어찌나 망연했는지. '어쩔 수 없음의 영역'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그 하릴없이 슬픈 눈동자를, 무해한 사람으로 자라나지 못했음을 스스로 책망하며 슬퍼하는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나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책이 끝났다.












얼마를 기다리든 결국 엄마는 왔다. "집에서 자라고 했는데 왜 나와 있는 거야. 위험하게 이게 뭐하는 거야. 다시 이러면 진짜 혼낸다." 다그치다가도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딸들에게 볼을 비비대던 엄마, 엄마 손을 잡고 집으로 걸어가던 길, 늘 엄마를 만날 수 있었던 그때의 기다림을 윤희는 아프게 기억했다. 어른이 된 이후의 삶이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윤희야, 온 마음으로 기뻐하며 그것을 기다린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고 사랑해주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99쪽, 지나가는 밤)



그때의 나는 화가 났을까 슬펐을까. 아마 외로웠던 것 같다. 모래의 말은 맞았다. 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의 자아를 부수고 다른 사람을 껴안을 자신도 용기도 없었다. 나에게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영혼은 "안전제일"이라고 적힌 조끼를 입고 헬멧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상처받으면서까지 누군가를 너의 삶으로 흡수한다는 것은 파멸. 조끼를 입고 헬멧을 쓴 영혼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152쪽, 모래로 지은 집)



그러네, 대답하고 나는 이어 말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길거리에 널브러진 비닐봉지 같은 존재였다고, 바람이 불면 허공으로 날아갔다가 가까운 나뭇가지에 아무렇게나 걸려버리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가고 있었다고 말이다.

(248쪽, 아치디에서)



그렇지만 마음이 아팠다. 삶이 자기가 원치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 가버리고 말았을 때, 남은 것이라고는 자신에 대한 미움뿐일 때, 자기 마음을 위로조차 하지 못할 때의 속수무책을 나도 알고 있어서.

(274쪽, 아치디에서)



많은 이들이 최은영의 소설에서 감지한 다정함은 누구나 한 번쯤 베인 적 있는 상실의 감각에 대해 예민한 촉수로 그려내는 것을 넘어서, 거대한 세계와 사소한 개인 사이의 위계를 무너뜨려 버린다는 게 있을 것이다. 작가는 다만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혼돈일지라도 그것이 세계 종말 이상의 사건이 될 수도 있음을 전제한 채, 나비가 날개를 파닥이듯 얇게 흔들리는 마음의 무늬들을 그리는 데 집중한다.

(304쪽, 해설 : 끝내 울음을 참는 자의 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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