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책의 깊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연 Jun 17. 2020

책 <딩씨 마을의 꿈>,  매혈賣血로 환상을 사다






<딩씨 마을의 꿈>
옌롄커
자음과 모음
2019년 6월





<딩씨 마을의 꿈>은 작가의 전작들과 비슷한 수순을 밟았다. 인민의 사상을 왜곡한다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출판 금지 조치를 당했고, 이 작품으론 한 발 나아가(?) 출판사로부터 '운영 상의 손실을 입혔다'라는 이유로 소송에 휘말리기까지 했다. 자유로운 발언과 바른 말 한마디에 감수해야 할 것들이, 이 낡디낡은 세상에서는 너무 많다. 그러나 그런 현실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영역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는 이들 덕분에 세상은 굴러간다는 지당한 이치를 다시금 되새긴다.





그럭저럭 굴러가는 농촌 마을이었던 '딩씨 마을'에 매혈賣血의 바람이 분다. 어느 동네는 피를 판 돈으로 올린 2층 양옥집이 즐비하다더라, 또 어느 동네는 신작로에 매끈한 콘크리트 포장을 했다더라, 하는 풍문 끝에 '우리도 잘 살아 보자'고 시작한 매혈이었다. 기본적인 주의사항도, 위생수칙도 없이 퍼져나간 매혈은 결국 딩씨 마을을 무너뜨린다. 번듯한 양옥집의 멀끔한 방 한 칸을 마음놓고 누릴 새도 없었다. '열병'이라는 막연한 이름으로 위장한 에이즈가 휩쓸면서 매일같이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마을은 폐허에 가까워져갔다.


딩씨 마을뿐만이 아니었다. 매혈로 쌓아올린 양옥집의 환상에 빠졌던 거의 모든 마을이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작가 옌롄커는 그 폐허의 구석구석을 들추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혈을 뽑는 수전노 관리와 그를 방관하는 국가 그리고 그 아래서 무지無知로 고통받는 군상의 모습을 담담한 참혹으로 그려낸다.





620여 쪽에 이르는 참혹은, 마을 사람들을 매혈로 몰아넣어 큰돈을 벌고 열병의 난리에서는 쏙 빠져나온 '딩후이'의 아들의 시선에서 묘사된다. 그의 아들은 이미 죽었다. 매혈로 인한 열병에 책임을 지지 않고 쌓아놓은 돈만 세고 있는 딩후이는 마을 사람들의 미움을 받았고, 그중 누군가가 딩후이의 집 근처에 가져다 놓은 독 묻은 토마토를 먹고 이미 죽었다. 이미 죽어 땅속에 묻힌 아들은 마을의 모든 것을 보고 듣는다. 열병이라는 극한 상황에 몰린 인간들의 밑바닥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울퉁불퉁 융기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본다. 열병에 잠식되는 마을과 사람들을 지켜본다. 담담한 그 시선에 가치판단은 배제되어 있지만, 독자는 볼 수 있다. 행간에서 드러나는 빛바래고 갈라진 인간성의 말단을 보고야 만다.





표지는 마을 사람들이 피를 팔며 염원했던 3층 양옥집과 그 그럴듯한 집을 아우르는 황허 고도의 푸르름이 겹쳐진 모습이다. 마음속에서만 번지르르하게 세워진 욕망은 단 한 번도 그곳에 실재했던 때가 없음을 역설하듯, 너무나도 번듯하고 담담한 그림이다. 책을 덮고 표지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어보았다. 오돌토돌한 종이의 감촉이 마치 햇볕에 반짝 빛나는 벽돌의 표면 같았다.












<딩씨 마을의 꿈>은 현실을 쓴 것인 동시에 꿈을 쓴 것이고, 어둠을 쓴 것인 동시에 빛을 쓴 것이며, 환멸을 쓴 것인 동시에 여명을 쓴 것이었습니다. 제가 쓰고자 한 것은 사랑과 위대한 인성이었고, 생명의 연약함과 탐욕의 강대함이었습니다. 인류의 생존과 발전을 둘러싸고 있는 고난을 극복하고 선과 미를 추구하고자 하는 영혼의 교육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과 내일에 대한 기대와 인성의 가장 후미진 구석에 자리한 욕망의 그 꺼지지 않고 반짝이는 빛이었습니다.

(7-8쪽, 한국 독자들께 드리는 글 중에서)




이제야 마침내 <딩씨 마을의 꿈>을 출판사로 넘기게 되었다. 원고를 넘기면서 내가 출판사에 넘겨주는 것이 한 편의 소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두루마리의 고통과 절망도 함께 넘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여전히 내가 직면해야 하는 현실의 생활과 현실의 세계이다. <딩씨 마을의 꿈>이 잘 쓴 소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부끄러움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십만 자에 달하는 이 작품을 쓰면서 내가 소모한 것이 체력이 아니라 생명이었다는 사실이다. 내 목숨의 뿌리였다는 사실이다. 이십만 자가 넘는 글을 이십만 자로 고치면서 나는 내 생명에 대한 사랑을 느꼈고, 소설 예술의 멍청함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이해를 경험했다.

(623쪽, 작가의 말 중에서)




소설가는 완벽하고 아름다운 허구를 통해 역사가들이 꿈꾸는 진실에 도달하고, 문제의 발견에 탁월한 독자들은 소설을 통해 역사의 진상을 유추한다고 한다. 우리가 정말로 노련한 독자라면 이 책에서 오늘날 인류가 처해 있는 역사의 진상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옌롄커는 <가상(假想)>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오늘날 인류가 처한 현실에 대해 이렇게 진단하고 있다.


이미 인간의 약육강식 상태가 극대화되는 시기가 되었다. 이런 추세는 이미 점진에서 맹진의 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사실 인류가 진정으로 문명의 상태에 속했던 단계는 오늘이나 내일이 아니라 어제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적어도 농경시대에는 해가 뜨면 나가 일하고, 해가 지면 들어와 쉴 수 있었고, 배가 고프면 먹고, 추우면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소박하긴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가장 진정한 의미의 문명 시기가 아니었을까? 남자는 밖에 나가 일하고, 여자는 집에서 옷감을 짜던 시기야말로 인류문명의 절정 단계가 아니었을까? 그 뒤로 인류가 처한 모든 생산관계의 단계는 절정을 지난 내리막길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628-629쪽, 옮긴이의 말)

매거진의 이전글 책 <나의 칼이 되어줘>, 예리하지만 연민이 깃든 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