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의 겨울, 수술대 위에서
첫눈이 조금 일찍 찾아온 그 해, 나는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릴 때부터 소화가 잘 되지 않았고,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아도 체하거나 역류성 식도염처럼 속이 자주 쓰리곤 했다. 늘 있는 일이었으니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부모님께 말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비슷했다.
“너가 좀 예민하잖니. 마음을 편하게 먹어라.”
자퇴를 하고 시간이 남아서 동네 종합병원에 찾아갔다. 몇 년 전 맹장수술을 했던 그곳이었다. "요즘 자주 소화가 안 되고 속이 불편해요. 약을 먹어도 별로 나아지지 않고요." 정확히 어떤 말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런 식으로 의사 앞에 앉아 있었던 것 같다.
의사는 특별한 표정 없이 말했다. "그럼 내시경이나 한 번 해보죠." 아마도 '그렇게 불편하다면 해보는 김에 해봐. 근데 별 건 안 나올 거야' 그런 뜻이었을 것이다.
수면 마취가 덜 풀려 헤롱헤롱한 채로 "나 괜찮아! 집 가자~" 하고 까불다가 복도에 주저앉아 "어지럽네…" 중얼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두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사의 얼굴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위는 괜찮은데… 저 아래쪽에 뭔가 덩어리가 있어요. 추가 검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곧장 CT를 찍었다. 그리고 더 심각해진 표정으로 우리를 기다리던 의사가 있었다.
내 몸에 꽤 큰 종양이 있단다.
그 말을 들었을 때도 나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너무 어려서였을까, 실감이 나지 않아서였을까. 어쩐지 괜찮기까지 했다.
의사는 CT를 다 복사해서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그 지역에서 가장 큰 암센터로 소개장을 써주었다. 그곳에서 맹장수술 때 찍었던 CT까지 열어본 교수님은 엄마에게 조용히 말했다.
"암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검사를 더 해봐야 알겠지만… 크기가 전보다 빠르게 커졌고, 수술을 빨리 진행하는 게 좋겠습니다."
엄마는 하염없이 울며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지 못하는 모습이 기억이 난다.
나는 그런 엄마를 보며, 이상하게도 엄마를 안심시키는 말들을 떠들어댔다. "어쩐지 요즘 소화가 안 되더라니. 그래도 이제라도 병원 와서 다행이지 뭐." 지금 생각하면 의미 없는 말들이었는데, 그때의 나는 그것밖에 할 수 없었다.
아빠는 인맥을 총동원해 서울의 대형병원에 빠르게 예약을 잡았다.
그때부터 나는 서울에 자주 갔다. 병원에서 한두 시간을 기다리고, 5분에서 10분 정도 교수님의 설명을 들으면 그 뒤로는 잠깐의 '서울 나들이'를 할 수 있어서 이상하게 좋았다.
통원과 입원을 반복하며 몇 번의 검사를 마치고, 수술 날짜는 금방 잡혔다.
"종양을 떼어내 봐야 정확히 알겠지만 암은 아닐 것 같아요. 하지만 자라는 속도가 빠르고 크기도 크니까, 수술은 하는 게 좋겠습니다."
수술 전 설명을 해주던 레지던트 선생님은 "사망, 하반신 마비" 같은 무서운 단어들을 조심스럽게 읊었다. 엄마는 겁먹은 표정으로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때 나는 오히려 담담했다. "어차피 해야 하는 거잖아. 설명은 원래 이렇게 무섭게 해."
수술 후 나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2, 3일 정도 머물렀던 것 같다. 옆 침대 환자가 심폐소생술을 받는 소리도 기억이 난다. 당시엔 몰랐지만 환자가 갑자기 넘어갔는지 선생님들이 아주 분주하게 움직였다.
환자의 상태에 따라 감정에 치우치지 않은 채 남은 일을 묵묵히 이어가던 선생님들의 모습은 어린 나에게 충격이면서도 우상처럼 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때의 기억으로 간호사가 되었다.)
그 이후에는 소아암 병동으로 옮겨져 남은 입원생활을 보냈다.
그때 한 엔터테인먼트에서 방문해 작은 음악회를 열어주던 일, 병동에서 사진을 찍어주던 사람들, 1층 카페의 커피번이 참 맛있었던 것까지. 어느 것 하나 또렷하다.
다행히 암은 아니었다. 오래도록 내 몸에 존재했던 종양은 커다란 상처와 그보다 더 큰 기억을 남기고 사라졌다.
우리 가족은 농담처럼 말했다.
“자퇴하길 잘했다. 아니었으면 이거 어떻게 발견했겠어?”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프니까 쉬어야지’,
‘일찍 발견해서 다행이네’라는 말들로 변해갔다.
하지만 그 말들이
어렸던 나에게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상한 기분만 남았다.
마치, 내가 아파야만 괜찮은 선택이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늘 같은 생각을 했다.
‘할아버지가 나를 지켜준 걸까.’
그 생각은 그 시절의 나를
조용히 버티게 해주는 작은 믿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