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과 물건의 자리, 그 경계에서
조주청 사랑방 이야기(145) 「방물장수」
— 사람과 물건의 자리, 그 경계에서
처서를 넘기며 바람이 달라졌다. 눅하던 기운이 걷히고 길이 단단해질 즈음, 방물장수 홍 서방이 다시 길을 나선다. 해마다 같은 때, 같은 길이다. 집들은 낯익고 문턱은 낮다. 한 번 드나든 자리는 두 번 드나들기 쉽고, 두 번을 넘기면 이미 길이 된다.
그는 물건을 판다. 비녀와 분, 거울 같은 자잘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의 장사는 물건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먼저 말을 건네고, 웃음을 붙이고, 외상을 놓는다. 값은 뒤로 미루고 사람을 앞에 둔다. 외상은 돈을 늦추는 일이 아니라, 발걸음을 묶는 일이다. 한 번 남겨 둔 값은 다음 걸음을 부르고, 다음 걸음은 다시 그다음을 부른다. 그렇게 드나듦이 쌓인다.
드나듦이 쌓이자 낯섦은 사라지고 익숙함이 자리를 잡는다. 익숙함은 경계를 낮춘다. 문턱은 더 쉬워지고, 말은 더 짧아진다. 물건은 핑계가 되고, 사람 사이가 먼저 놓인다. 그 사이에서 홍 서방의 장사는 조금씩 자리를 바꾼다. 물건을 파는 일이 관계를 타고 흐르기 시작한다.
그가 길을 한 바퀴 돌고 돌아올 때면, 손에는 치부책이 들려 있다. 장부는 두터워지고 글씨는 촘촘해진다. 누구 집에 무엇을 주었는지, 얼마가 남았는지, 언제 들를지, 빠짐없이 적혀 있다. 적힌 것은 값이지만, 쌓인 것은 이름이다. 이름이 쌓일수록 관계가 두터워진 듯 보인다. 그러나 그 두터움은 기억이 아니라 기록으로 쌓인다. 이때부터 방향이 바뀌기 시작한다.
다시 길을 돌고, 다시 문턱을 넘는다. 말은 더 익숙해지고, 손은 더 가벼워진다. 오가는 사이에 경계는 점점 흐려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무렇지 않게 한마디가 흘러나온다.
“방물 값이 종류마다 다르듯이 여자 값도 다른 법이오.”
그 말은 새로 나온 것이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쌓여 온 것이, 그 순간에야 드러난 것이다. 외상이 쌓이던 시간, 드나듦이 이어지던 시간, 장부가 두터워지던 시간 속에서 사람의 자리는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다. 값이 붙는 것은 물건이었으나, 어느새 사람에게 값이 매겨질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 말은 시작이 아니라 드러남이다.
그 뒤로도 길은 이어지고 만남은 계속된다. 장부는 더 채워지고 외상은 더 얹힌다. 끊어지지 않는 관계처럼 보이고, 오래 이어지는 인연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느 날 돌아보면 남아 있는 것은 숫자와 기록뿐이다. 이름은 빼곡히 남아 있으되, 사람은 남아 있지 않다. 쌓였다고 여긴 시간은 버티고 있었을 뿐, 남기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사람은 그 한마디에서 무너진 것이 아니라, 그 한마디에 이르기까지 이미 오래전부터 자리를 내어주고 있었다는 것을. 붙잡고 있다고 믿는 사이에 마음은 먼저 빠져나갔고, 이어지고 있다고 믿는 동안 관계는 이미 계산으로 바뀌어 있었다는 것을.
사람은 한순간에 사라지지 않는다. 드나들며, 쌓이며, 익숙해지는 시간 속에서 조금씩 비워진다. 그래서 끝내 남는 것은 붙잡은 관계가 아니라, 남기지 못한 마음의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