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사랑, 진짜 사랑일까?
태식의 이혼소송으로 수정은 매일같이 말라갔다. 그녀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은 명훈밖에 없었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하룻밤 만리장성을 쌓은 인연이 있지 않은가. 남자는 하룻밤 정사로 끝낼지 몰라도 여자는 다르다. 남자의 한 시간은 여자의 3년이 될 수도 있다.
“안녕하세요. 저 수정이에요. 백수정.”
수정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네. 수정 씨. 잘 지내셨죠?”
명훈은 늘 유쾌하고 밝은 톤의 목소리로 말했다. 명훈이 반갑게 안부를 묻자 수정은 좋았다가 갑자기 설움이 복받쳐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네. 흑흑. 명훈 씨. 흑. 흑.”
“수정 씨.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울지 말고 말해봐요.”
명훈의 따뜻한 말에 수정은 더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수정 씨. 무슨 일 있는 거죠. 괜찮으니까 말해봐요. 천천히 심호흡을 먼저 하시고요.”
수정은 명훈이 시키는 대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겨우 진정이 되었다. 사춘기 소녀도 아니고 50대에 이렇게 아이처럼 서러워서 울다니. 마음을 안정시킨 수정은 명훈이 옆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말했다.
“명훈 씨. 남편이 이혼소송을 해 왔어요. 사람을 시켜서 동영상도 가지고 있더라고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죠? 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생각나는 사람이 명훈 씨 밖에는 없었어요. 죄송해요.”
수정의 이야기를 들은 명훈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내심 자기가 바라는 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동영상에 자신도 같이 나오기 때문에 그것만큼은 처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정 씨. 걱정 말아요. 일단 만나서 이야기해요. 저도 관련이 있으니까 도와드릴게요. 지금 어디예요. 제가 갈게요.”
“네. 고마워요. 바쁘실 텐데 제가 명훈 씨 계신 곳으로 갈게요.”
“네. 그럼 여의도로 오세요. 12시까지 오시면 같이 점심 먹으면서 이야기해요.”
“네. 12시까지 갈게요. 고마워요. 명훈 씨랑 통화하고 나니까 마음이 좀 안정이 되네요.”
“그래요. 이따가 뵐게요.”
명훈은 자신이 흥신소 탐정이라는 게 이럴 때 참 괜찮은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태식이 자기에게 아내의 불륜증거를 잡아달라며 의뢰했던 연락처와 주소, 직장 등 참고자료가 남아 있었다. 명훈은 부소장을 불렀다.
“부소장. 김태식 씨 자료 가지고 있지?”
“네. 아직 종결되지 않아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찾으십니까?”
“김태식에 대해 조사해 봐. 내연녀, 상간녀, 섹스파트너, 성병도 걸렸었다는 이야기도 있어. 거래처 대표와 관계도 있고. 특히, 세금 부분도 확인해 봐. 반드시 치명적인 약점을 잡아야 해.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
“소장님. 뭐 압수수색 영장이라도 발부하라는 건가요? 갑자기 의뢰인을 뒷조사하는 것도 직업윤리에 맞지 않고요. 원수지간도 아닐 텐데…….”
부소장은 평소와 다르게 냉철함을 잃은 명훈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해줄 테니까 일단 착수해. 최대한 약점이 뭔지를 찾아내서 딜을 해야 하거든.”
“일단 알겠습니다. 이번 건은 소장님이 직접 지시하시니까 하는 겁니다. 대신 보수는 일반 의뢰 건보다 더 주셔야 해요.”
“그래. 알았어. 두 배로 주지. 지금 당장 시작해.”
부소장이 나가자 명훈은 시계를 보았다. 12시 10분 전이었다. 서둘러 약속장소로 갔다. 수정이 먼저 도착해있었다. 멀리서 보면 참 잘 익은 복숭아처럼 탐스러운 여자였다. 푸른 색조 바탕에 흰 줄무늬 원피스가 수정의 여리여리한 몸매를 더 돋보이게 했다. 수정이 명훈을 보며 활짝 웃었다. 단발머리 찰랑대며 웃음 지을 때 생기는 초승달 눈은 10년은 젊게 보였다. 귀엽기도 했다. 30년 전 대학 시절 명훈이가 죽자 매달렸던 백수정의 모습 그대로였다.
“명훈 씨. 여기에요.”
“네. 먼저 오셨네요. 차는 안 막혔어요?”
“막힐 거 같아서 지하철 탔어요.”
“잘하셨어요. 땅 위로 다니면 시간 맞추기 힘들어요.”
수정은 명훈을 만나자 모든 게 해결된 것처럼 안도감이 들었다.
“이런 일로 만나게 되어 죄송해요. 이런 일 아니더라도 명훈 씨를 꼭 만나고 싶었거든요.”
“네. 괜찮습니다. 저도 제주도에서 올라온 후로 꼭 만나고 싶었거든요.”
수정은 법원에서 온 서류를 보여주려고 테이블 위로 가방을 올렸다. 그때 마침 웨이터가 다가와 주문을 하시겠냐고 물었다.
“수정 씨. 일 이야기는 천천히 해요. 일단 배고프실 텐데 맛있는 거 먹고 이야기해요. 이 집은 회덮밥이 맛있는데 초밥하고 같이 주문하면 둘 다 맛볼 수 있어요. 괜찮으시겠어요?”
“네. 저도 회덮밥 좋아해요. 초밥도 좋아하고요.”
주문을 마치고 웨이터가 가자 수정은 다시 가방을 올리려고 했다.
“수정 씨. 괜찮으니까 조금 천천히 해요. 우리가 다시 만난 게 일 때문만은 아니잖아요. 사실 저 수정 씨 너무 보고 싶었어요.”
수정은 깜빡이 없이 훅 들어오는 명훈에게 뻑이 갈 지경이었다. 조금 전까지 법원 서류를 보여주려고 했던 자신이 참 한심하게 느껴졌다.
“네. 저도 그랬어요. 서울 와서 명훈 씨를 다시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매일 잠들 때마다 명훈 씨 얼굴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계속 떠올리기도 했고요.”
수정은 그렇게 말해놓고도 너무 쉽게 자기감정을 드러낸 것 같아서 얼굴이 빨개졌다. 솔직히 자기감정을 알 수 없었다. 명훈이 리드하는 대로 자신의 감정이 따라가는 것 같았다. 목이 바짝 타들었다. 물컵을 잡은 손이 가볍게 떨렸다. 하마터면 손과 입이 엇박자를 낼 뻔했다.
‘이게 사랑일까? 아님 호기심일까?’
수정은 복잡한 감정을 정의하지 못하고 있었다. 명훈은 그런 수정의 모습을 보며 사랑이라는 감정에 확신을 박을 수 있는 말을 했다.
“제가 수정 씨보다는 조금 괜찮게 보냈네요. 저한테는 수정 씨 사진이 있어서 매일 볼 수 있었거든요. 웃을 때 생기는 초승달 눈, 단발머리가 바람에 휘날리면 드러나는 하얀 볼살. 제 작품 속에 늘 담아두고 봤었어요. 중년에 느끼는 이런 감정은 분명 우리가 아는 사랑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적어도 저한테는요.”
수정은 명훈의 고백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자신을 그토록 그리워했다는 것부터 태식에게는 느끼지 못한 감정이었다. 자신의 감정이 사랑일 거라는 말에는 황홀하기까지 했다.
이제 법원 서류고 뭐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명훈의 입술이 말하는 대로 생각했고 명훈이 행동하는 모습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와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박혔다.
제주도에서 보낸 그 날 밤의 기억이 수정의 모든 세포를 자극했다. 마치 그날 밤에 바로 이어서 지금 이 자리에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부소장이 태식을 미행하기 시작했다. 태식은 퇴근해서 오피스텔로 향했다. 그런데 오피스텔에 도착해서 자신의 801호로 들어가지 않고 901호로 갔다. 엘리베이터에서 같이 내리면서 태식은 부소장을 한 번 힐끗 쳐다봤다. 9층에서 못 보던 얼굴이라 느꼈다. 태식이 901호 앞에서 벨을 누르자 다섯 살 때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열린 문으로 “아빠.”하며 안겼다. 태식은 안으로 들어가면서 “어이구 내 아들. 엄마랑 잘 놀고 있었어?”라고 말했다.
부소장은 지나가는 척하며 현관문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엿들었다.
‘대박. 내연녀 사이에 아들까지 두고, 그것도 모자라서 8층에는 유부녀 김나리와 동거까지!’
부소장은 그날부터 잠복에 들어갔다. 태식의 삼중 생활을 모두 카메라에 담았다. 아이와 태식의 관계를 증명할 유전자 검사까지 머리카락을 채취해서 진행했다.
유전자 검사결과 ‘99.99% 부자 관계 성립’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아이 나이가 다섯 살이면 5년 전부터 아니 임신 기간까지 더하면 최소 6년 전부터 내연관계를 맺고 살았다는 게 증명된다.
부소장은 태식의 사업체 직원에게 접근해서 태식의 횡령, 배임까지 파악했다. 이제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부소장의 보고를 받은 명훈은 사진 자료와 횡령, 배임을 입증할 서류를 찬찬히 훑어봤다.
“부소장. 이제 부소장이 확실하게 정리를 해줄 차례가 왔어.”
“제가 만나볼까요?”
“그래. 나는 이미 백수정 씨 동영상 속 상간남으로 찍혀 있으니까 나를 알아볼 수도 있어. 그래서 부소장이 최종 정리를 해줘.”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그건 말이야. 일이 다 끝나고 나면 말해줄게. 나한테는 더 큰 복수가 있거든. 이제 시작이지.”
“복수요? 그럼 소장님 복수를 위해 지금 이런 일을 벌인다는 거예요?”
“나한테 말 못 할 사정이 있어서 그래. 나중에 이야기해줄게. 김태식 씨 만나면 백수정 씨가 더 많은 돈을 주고 자신을 고용했다고 해. 소송 취소하고 협의이혼, 집하고 부동산은 모두 백수정 씨 앞으로 명의 변경, 지금 운영하는 사업체하고 오피스텔만 김태식 씨 소유로 최종 정리하는 것으로 해.”
“그렇게 해줄까요? 사업체도 빚이 많던데 재산의 80%를 아내한테 주지 않을 거 같은데요.”
“아니야. 해줄 거야. 횡령에 배임, 사생아까지 노출되면 한 방에 가는 거니까.”
“네. 그렇게 해보죠.”
며칠 후.
태식이 수정에게 연락해왔다.
“당신 참 무서운 여자였어. 내가 그것도 모르고 지금껏 살았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당신을 죽일 수도 있어. 뭘 믿고 일을 벌이는 거야?”
태식의 말에 수정은 잠시 두려움이 들었지만 이내 명훈을 생각하며 대담하게 말했다.
“당신 지금 한 말 녹음돼 있어. ‘죽일 수도 있어’라는 말로 협박죄가 추가될 거야. 시궁창 말싸움하기 싫으니까 내 요구 조건 들어주지 않으면 일단 형사고발부터 하고 민사소송 진행할 거야. 오늘 중으로 답을 주지 않으면 내일 바로 경찰서로 갈 거니까 알아서 해.”
수정은 전화를 끊었다. 태식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지만 차단해 버렸다. 전화를 끊고 나자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명훈에게 전화했다.
“명훈 씨. 저 지금 너무 무서워요. 남편이 저를 죽일 수도 있데요.”
“수정 씨. 걱정 말아요. 제가 지금 그리로 갈게요. 문 잘 잠그고 아무도 열어주지 말아요.”
잠시 후 명훈이 수정의 집에 도착했다. 수정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명훈의 품에 안겼다.
“이제 걱정 말아요. 남편과 통화한 내용 녹음되어 있죠?”
“네. 여기.”
수정은 태식이 협박한 부분을 재생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당신을 죽일 수도 있어.’
“네. 이거면 접근금지 처분을 받을 수도 있겠어요. 일단 경찰서로 가서 접근금지처분부터 신청하죠.”
며칠 후 태식에게 접근금지 처분서가 송달되었다. 민사소송은 태식이 신청해 놓은 상태고, 형사고발은 수정의 히든카드로 아직 접수하지는 않았다. 태식은 민사소송에서도 혼외자식 문제로 불리하고, 형사고발까지 당하면 완전히 파산할 거라고 생각했다. 모든 게 불리했다. 수정이가 전화를 받지 않자 부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졌소. 요구하는 대로 모두 들어줄 테니까 형사고발은 하지 말라고 해주시오.”
수정은 드디어 길고 긴 터널을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승리의 기쁨을 명훈과 함께 제주도에서 만끽하고 싶었다.
“명훈 씨. 고마워요. 명훈 씨가 없었다면 전 아마 죽었을지도 몰라요.”
“아니에요. 제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상처 입는 것을 무엇 보다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수정은 명훈의 말 하나하나에서 자신을 생각해주는 마음이 느껴졌다. 태식과의 갈등 속에서 수없이 되풀이하며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을 생각했다.
‘너 지금 행복하니? 행복하게 사는 거 맞아?’
수정은 아이를 낳고 처음 안았던 그 기쁨만큼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명훈에 대해 느끼는 감정도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중년에 느끼는 진정한 사랑이라고. 명훈의 시커먼 속도 모르면서.
그런 기쁜 마음에도 명훈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 물었다.
“명훈 씨. 우리 사랑일까요?”
명훈은 대답 대신 가볍게 입맞춤으로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