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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조바르 Aug 10. 2023

다시 사랑한다면

1

지하철 9호선. 빈자리가 있는데 서 있는 한 여자. 급행열차는 종합운동장역을 떠나 암막의 터널을 달렸다. 수정은 창문에 비친 자기 모습에 좌절해서 몇 번이고 인상을 찌푸렸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자가 누구니? 백수정이라고 말해줘.’ 수정은 자신의 질문에 창문에 비친 그녀가 너라고 바로 답을 주는 것 같았다. ‘저주받을 인간, 그런 남자를 선택하고 25년을 참았어. 이젠 결론을 내야 해.’ 역을 통과할 때마다 악몽 같은 추억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때마다 그녀는 입을 꽉 다물고 입술에 힘을 주었다. 지금 하려는 결심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주문을 걸었다. 급행열차는 김포공항까지 쏜살같이 달렸다.     


백수정, 49세의 중년. 두 딸의 엄마이자 김태식의 아내. 대학 4학년 2학기에 임신해서 졸업식을 1주일 앞두고 결혼했다. 직장은 가져본 적 없고 전업주부로, 아이 양육과 남편 내조에만 전념하며 나름 행복한 가정을 잘 꾸려왔다고 자부했다. 그런 그녀를 폭발하게 한 사건이 일어난 건 6개월 전이었다.


수정은 최근 며칠간 몸이 이상함을 느꼈다. 팬티에 진물이 묻어나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발진과 가려움, 두통까지 참을 수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두려움을 안고 산부인과를 찾았다. 병원에 들어서자 대기실 긴 소파에 임산부들이 앉아 있었다. 접수창구로 다가가자 간호사가 물었다.

“처음 오시는 건가요?”

“네.”

“그럼, 여기 접수증에 기록해주세요.”

기계적인 간호사의 말에 그녀도 기계적으로 접수증에 질문사항을 기록했다.

“어디가 불편하세요?”

옆에 있던 고참으로 보이는 간호사가 차분한 말투로 물었다. 수정은 조금 머뭇거렸지만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물이 나오고 가렵고 통증도 있어요.”

“네. 앉아서 기다리시면 저기 스크린에서 진료순서를 알려드립니다.”

수정은 긴 소파의 끝에 앉아서 자신의 직감이 틀리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확신만 더해가는 것 같아서 한숨만 나왔다. ‘그날이 분명해. 그 인간이 강제로 한 그날 뭔가 있었어. 아, 제발 아니기를, 그것만은 아니기를.’ 강하게 부정하면 할수록 불안감은 더해졌다.

“백수정 씨. 1번 진료실로 들어가세요.”

“네.”

노크를 하고 진료실로 들어섰다. 비슷한 연령대로 보이는 여의사가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수정이 책상 앞 의자에 앉자 의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자, 편하게 말씀하세요. 증상이 어떤지, 언제부터 그랬는지 말씀해주세요.”

수정은 대기실에서 줄곧 들었던 생각을 정리해서 하나씩 말했다.

“4주 전부터 질 주위에 발갛게 염증이 생겨서 바셀린을 발랐는데 좋아지더라고요. 그런데 2일 전부터 다시 진물이 나오고 가렵고 그랬어요. 오늘은 통증이 있어서 걷기도 힘들더라고요. 손바닥하고 발바닥에도 붉은 발진이 생겼고요. 열도 나고 목도 많이 부어 있어요. 선생님. 성병은 아니겠지요?”

의사는 수정이 하는 말을 모니터에 입력한 후 다시 수정을 돌아보며 말했다.

“네. 검사를 해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겠지만 일단 지금 말씀하신 증상만으로도 매독일 가능성이 있네요. 상태를 먼저 살펴보고, 혈액검사도 해볼게요. 저기 침대로 누워보세요.”

수정은 갑자기 창피한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옷을 벗고 진료대 위로 올라가서 기구에 두 발을 올려 다리를 벌렸다. 천장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은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알 수 없는 일그러진 표정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이구 이런, 매독이 의심되는데요, 일단 궤양 부위에 검체를 할게요. 오늘 혈청검사도 받으셔야 합니다. 결과는 기다리셨다가 확인하시고요. 양성이면 바로 치료 들어갈게요.”

수정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기를 바랐지만 수치스러움에 다시금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3시간 후 간호사가 대기실에 있는 수정에게 1번 진료실로 들어오라고 했다.

“백수정 씨, 2기 매독으로 나왔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요. 페니실린 주사로 치료를 꾸준히 받으시면 완치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남편분에게도 알리시고요. 내일이라도 시간 되시면 남편분도 데리고 오세요. 성병은 부부가 같이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빨리 회복될 수 있어요. 지금은 발병 원인 확인보다 치료가 우선입니다. 꼭 같이 오세요.”

‘아, 이 인간을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나한테 성병을 옮길 수가 있어? 평생 듣도 보도 못한 매독이라니. 죽여버릴 거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허탈하다 못해 분노마저 깃털처럼 가벼웠다. 수정은 태식에게 전화하려다가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할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통화 대신 문자를 남겼다. ‘오늘 마치면 바로 집으로 와요. 당신한테 중요한 이야기를 할 게 있어요. 죽을 수도 있는 문제니까 딴 데로 새지 말고 곧장 와요. 삼겹살에 소맥도 준비해 놓을 테니까.’ 어쩐 일인지 그날은 답장이 바로 왔다. ‘무슨 일 있어? 죽을 수도 있다니? 뭐야?’ 수정은 떨리는 손으로 ‘야 인간아 어떻게 성병을 옮길 수 있어?’라고 썼지만, 다시 지워버렸다. 성병도 문제지만 딴 여자와 잤다는 게 더 용서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껍데기만 남았고 젊고 싱싱한 여자에 밀려나는 것 같은 질투심이 생긴다는 것도 분했다. ‘일단 집으로 와서 이야기해.’ 적어도 내 영역 내에서 너의 죄를 심문하리라. 그것도 거짓 없이, 하나도 빠트림 없이, 낱낱이, 용서하는 자와 용서받는 자의 질서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리라.     

퇴근 시간에 맞춰 수정은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악마의 심정으로,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심정으로 밑반찬에 채소도 푸짐하게 씻어서 식탁에 놓았다. 삼겹살은 에어프라이기에서 기름을 쫙 뺀 다음 프라이팬에 노릇노릇하게 구울 수 있도록 준비했다. 소주와 맥주는 냉동실에서 슬러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띠리리릭, 철컥’ 현관문이 열리며 태식이 들어왔다. “무슨 일인데 바쁜 사람 일도 못 하게 집으로 오라는 거야? 전화도 안 받고. 뭐야, 뭔데?” 태식은 수정이 전화를 받지 않은 것을 나무라며 다그치듯 물었다. “술 한잔하면서 말할게요.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말 못 하겠어요.” 수정은 태식을 쳐다보지도 않고 부르스타에 불을 켠 후 프라이팬을 올려놓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냉동실에 소주하고 맥주 꺼내와요. 시원할 거예요.” 태식은 평소와 다른 아내의 기에 눌려서인지 시키는 대로 했다. 삼겹살이 노릇노릇하게 익어갈 때쯤 수정은 잘 마시지도 못하는 소맥 한 컵을 한꺼번에 들이켰다. 그리고 식탁 모서리에 엎어놓았던 진단서를 태식의 얼굴 앞에 들이밀면서 말했다. “이거, 어떻게 설명 할 거야. 바람을 피워도 내가 모르게 하라고 했지? 바람도 모자라서 이제 성병도 옮기냐? 내가 이 나이에 매독에 걸려서 병원 다녀야겠어? 인간아, 양심이 있으면 변명이라도 해봐.” 태식은 진단서를 낚아채듯이 가져가서 식탁 위에 놓고 자세히 보았다. ‘2기 매독’이라는 글자가 뚜렷이 보였다. 눈은 진단서에 가 있지만 뇌는 뒤통수에서 관계한 여자들을 떠올렸다. 두 달 전부터 접대한다고 룸살롱에 갔었다. 평소 아내가 자신을 받아주지 않아서 불만이었는데 젊고 예쁜 여자를 보니 품고 싶었다. 수정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허락했다. 그것도 피곤하다며 거부했을 때는 두 달에 한 번, 어쩌다가 건너뛰면 석 달에 한 번 관계하는 때도 있었다. 폐경이 오고 나서 태식과의 잠자리가 즐겁지 않았다. 오르가슴은 옛말이 되었고 고통만 느껴지는 섹스가 싫었다. 태식은 일단 잡아떼기로 했다. “아니, 당신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거야? 난 그런 일 없어. 내가 술 먹고 다음 날 사우나 많이 가잖아, 면도기를 안 챙겨가서 샤워기에 있는 면도기를 몇 번 쓴 적이 있는데 그걸로 감염됐을 수도 있어. 아무래도 그런 거 같아. 날 믿어. 왜 남편 말을 못 믿어서 이 난리야?” 수정은 어이가 없었다. 이미 인터넷으로 모든 성병에 대해 논문을 쓸 만큼 찾아봤기 때문이다. “당신, 어설픈 변명으로 그냥 넘어가려고 하지 마. 매독균은 체외 생존율이 제로야. 매독에 걸린 사람이 면도하다가 피가 나서 면도기에 묻어야 하고 그걸 바로 균이 죽기 전에 당신이 받아서 다시 면도하다가 피가 나서 균이 혈액을 타고 들어가야 감염이 되는 거야. 그럴 가능성이 몇 퍼센트나 될 거 같아? 솔직하게 말해. 그래야 이혼을 하더라도 미련이 없지. 이제 그런 거짓말도 나를 무시하는 거로밖에 들리지 않아. 똑바로 말해.” 태식은 수정의 말에 더는 반박할 수 없었다. “그래 솔직하게 말할게. 당신 나하고 안 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 알기나 해? 매번 하자고 하면 거부하고, 날 무슨 발정 난 개처럼 봤잖아? 그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치욕스러웠는지 알아?” 수정은 어차피 쏟아져 나온 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속에 있던 말을 내뱉었다. “당신은 나를 한 번이라도 느끼게 해준 적 있어? 급하게 삽입하고 2분도 안 돼 끝내버리면서 내가 당신이랑 그 짓을 하고 싶겠냐?” 태식은 수정의 이런 모습이 처음이었다. 놀라움도 놀라움이지만 작정을 하고 덤비는 것 같아서 말문이 막혔다. 특히,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을 건드렸다는 것에 자존심이 바닥을 쳤다. 이제 막장으로 가는 분위기였다. “그래, 딱 한 번 술집 여자랑 잤다. 술이 너무 취해서, 끓어오르는 욕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그랬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딱 한 번. 재수 없게 그때 옮은 것 같네.” 태식은 한 번이라고 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룸살롱 아가씨와 네 번. 그것도 같은 아가씨와 일주일에 한 번씩 관계했다. 네 번이나 잠자리를 가지게 되자 아가씨는 오피스텔을 사달라고 졸랐다. 태식은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오피스텔을 알아보던 중에 자신의 비서였던 영선이 아이를 안고 찾아와서 자신의 아이라고 하는 바람에 오피스텔을 얻어주고 매일같이 들락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걸 드러낼 수 없었다. 이혼하기라도 하면 회사 지분을 아내에게 위자료로 넘겨야 하고 그러면 경영권 방어도 쉽지 않아질 것이다. 지금 가장 현명한 판단은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고 달래는 것뿐이었다. “미안해 여보. 내가 잘못했어. 나도 남자다 보니 욕구 해소는 해야 하고….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거 잘 알아. 하지만 바람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야.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당신뿐이야. 알잖아? 나 당신 없이는 못사는 거 알잖아.” 태식은 무릎을 꿇고 빌었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라고 하며 같이 병원 가서 치료받자고 했다. 수정은 지금껏 자기 앞에서 무릎을 꿇은 적이 없는 태식의 모습에 마음이 흔들렸다. 굳은 결심은 바위도 뚫지만 어설픈 결심은 계란도 깨트리지 못한다. “용서할지 말지는 치료가 끝나는 대로 내가 결정할 거야. 결코, 용서한 게 아니란 것만 알아둬.” 태식은 연신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수정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공들인 세 치 혀로 분노를 가라앉힐 수는 있어도 깨어진 신뢰를 다시 붙일 수는 없었다.                 

6개월 후, 의사는 더 치료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잠복 균이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약물치료 없이 한 달간 아무 증상이 없으면 완치되었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 태식이 능글맞게 물었다. “선생님. 그럼 이제 관계해도 됩니까?” 순간 수정은 다시 분노가 치밀었다. ‘이런 개자식.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너라는 인간은 정말 어쩔 수가 없구나.’ “당신 지금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해요. 그런 농담이 나와요?” 그러자 의사가 웃으며 말했다. “부부싸움은 집에 가서 하시죠.” 수정은 의사의 웃음에 비웃음이 섞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일어나요. 선생님 수고 많으셨어요. 가볼게요.” 그런데 태식의 질문은 마치 은밀한 선포와도 같았다. 6개월간 치료하면서 한 번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소중이에게 다시 무장하고 출전 준비를 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날 밤 태식은 수정에게 완치 기념으로 사랑을 나누자고 했다. 수정은 여전히 내키지 않았지만, 자신이 계속 거부했기 때문에 바람을 피웠다는 핑곗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오르가슴을 다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마저 들었다. ‘그래 나도 여자야, 나도 느끼고 싶은 욕망이 있다고.’ 수정은 태식에게 세 가지 요구사항을 말했다. 천천히 부드럽게 애무를 해줄 것. 내가 신호를 주면 그때 삽입할 것. 먼저 끝내고 그냥 나가서 담배 피우지 말고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안아줄 것. 만약 이것을 지켰는데도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한다면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태식은 알겠다고 했다. 그 정도야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다고 했지만 믿음이 가지 않았다. 태식이 간만에 호텔을 가자고 했지만, 수정은 집이 편하다고 했다. 두 딸이 모두 집을 떠나 기숙사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안방에서 느끼고 싶었다. 비싼 호텔비도 아끼고 싶었다. 태식은 호텔을 거부하는 아내에게 불만이 있었지만, 더 조르지 않았다.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수정은 샤워하면서 자신의 몸매를 거울 속에 비춰봤다. 잘록한 허리, 풍만한 가슴, 매끈한 다리, 가냘픈 팔, 목주름을 빼면 아직 매력 있는 몸이라고 생각했다.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가 온몸을 적시자 오래간만에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오늘 한번 올라가 보는 거야.’ 보디샴푸의 매끄러운 거품을 걷어내고 촉촉한 기분을 침대로 이어갔다. 태식은 나체로 먼저 누워 있었다. 가늘어진 다리, 볼록한 배, 옆구리가 삐져나온 흔적,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대로 가장 정직하게 보여주는 것이 몸이다. 수정이 불을 껐다. 태식은 불을 다시 켜라고 했다. 그러자 수정은 불을 끄고 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서로 원하는 출발선부터 달랐다. 태식은 수정의 몸을 감상하며 하고 싶었고, 수정은 서로 보기 싫은 살을 구태여 보면서 하기 싫었다. 수정이 태식의 옆으로 누우며 말했다. “당신 내가 말한 세 가지 잘 기억하고 있지?”, “그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리와.” 태식은 그녀의 위로 올라가서 키스하려고 했다. 수정은 본능적으로 태식의 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싫어, 키스하는 거. 그냥 해.” 태식은 떫은 표정을 지으며 바로 목덜미를 공략했다. 귓불과 목덜미를 혀로 부드럽게 핥아내렸다. 수정은 뭔가 느낌이 올 것 같기도 하고 그냥 간지럽기만 한 것 같기도 한 경계를 왔다 갔다 했다. 태식이 가슴으로 내려가 왼손은 그녀의 오른쪽 유두를 만지고 혀로는 왼쪽 가슴을 빨았다.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를 붙여서 질 속으로 넣었다. 그 순간 수정은 아프다는 느낌이 들었다. 흥분보다 그냥 아팠다. “그만, 그만. 손가락 빼.” 태식은 얼른 손가락을 빼고 소중이를 밀어 넣었다. “아직 신호 안 보냈잖아. 아직 아니라고.” 태식은 숨을 헐떡이며 “내가 급해. 쌀 것 같다고.” 태식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또다시 급하게 피스톤 운동을 강하게 하면서 수정의 상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수정이 두 팔로 태식의 가슴을 밀어내려고 하자 태식은 그녀의 두 팔을 위로 젖히고 더 힘껏 소중이를 박아넣었다. 수정은 고통 속에 그만하라고 외쳤지만 태식은 멈추지 않았다. 수정은 질 안쪽에 생채기가 심하게 난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또 되풀이되는 일방적인 태식의 행위에 질려버렸다. ‘네가 이렇게 하니까 내가 하기 싫은 거야. 내가 느끼지 못하는 건 너 때문이라고. 저런 인간에게 기대한 내가 미친년이지.’ 딱 2분, 그날도 딱 2분 만에 강렬한 상처만 남긴 채 끝나버렸다. 태식은 사정한 후 바로 일어나서 늘 하던 대로 옷을 입고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아직 따가운 상처가 남아있는 수정은 누워서 천장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다시는 안 한다. 너라는 인간하고는.’     


[다음 역은 이 열차의 마지막 역인 김포공항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지하철 안내방송에 수정은 정신을 차리고 내리는 문 앞에 섰다. 무언가에 이끌려 무작정 제주행 비행기 표를 예약했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 처음이라 두려웠지만, 태식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승주, 희주 엄마로, 회사 사장인 태식의 아내이자 사모님으로 살아왔다. 결혼식 청첩장에 백수정이라고 쓴 이후로 자기 이름은 사라졌다. 제주행 비행기를 예약하며 백수정이라는 세 글자가 낯설게 느껴졌다. ‘지금이라도 잃어버린 나를 찾아야겠어.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내가 백수정이기 때문이지 얘들 엄마도 아니고 그 인간 아내도 아니야. 나는 그냥 나일 뿐이야.’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공항 로비는 사람들로 붐볐다. 눈에 띄는 남녀 한쌍이 보였다. 청바지에 흰 티셔츠 차림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서로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수정은 25년 전 신혼여행 가던 날이 떠올랐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곧장 시무룩해졌다. ‘무엇부터 잘못되었을까? 지금 행복하지 않은 원인이 뭘까? 아이들이 떠나고 빈둥지증후군이 온다던데 그런건가? 아니야 좀 더 솔직하게 생각해보자. 넌 남편한테 소중하게 다루어지지 않아서 그래. 섹스에 불만도 있고. 아니지 아주 많이 있지. 왔노라, 보았노라, 쌌노라, 그리고 가짜 신음을 냈노라. 만약 내가 성생활에 만족한다면 다른 것들은 불만족스러워도 그냥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아니면 다른 게 만족스러우니 성생활 정도는 포기하고 살아도 될까?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다시 사랑한다면 상처없이 행복할 수 있을까?’ 수정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탑승대기실에서 활주로 위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모처럼 맑은 하늘이 내 마음 같다는 생각에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 내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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