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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조바르 Sep 22. 2022

소설 있을법한 중년의 사랑(17)"끊임없는 나쁜 짓"

불륜이 불륜을 낳고 또다시 나쁜 짓을 하고

 뜨거운 여름이 가고 선선한 바람이 가을 단풍을 물들이고 있었다.

 수정은 태식과 이혼 후 한결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반면에 태식과 그의 불륜녀들은 새로운 막장 드라마를 찍고 있었다.      


 태식의 내연녀이자 수정의 친구 김나리의 집. 

 1년간의 해외 출장에서 돌아온 나리의 남편이 탁자 위에 놓여있는 한 장의 서류를 바라보고 있다. 떨리는 손으로 이혼 신청서를 집어 들었다. 도대체 왜?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혼서류 아래에 한 장의 편지도 있었다.     


 ‘지금까지 날 사랑해주고 아이들한테도 잘해준 당신에게 감사하게 생각해.

  그런데 지난 25년간의 결혼생활에서 난 하루도 행복한 날이 없었어. 

  늘 일에만 매달려 있는 당신, 아이들에게 빼앗긴 내 청춘이 너무 아까워.

  이제 내 인생을 찾고 싶어. 

  당신 잘못한 거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냥 날 보내줘.

  당신이 해외 있던 1년간 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 

  처음으로 느끼는 진실한 사랑에 당신과 아이들 모두 이해해 주리라고 생각해.

  그러니 괜한 설득이나 소송 없이 협의이혼해주길 바래. 재산 분할은 필요 없어. 

  나 혼자 옷만 챙겨서 나갈게. 나 찾지 마. 

  실종 신고한 후 6개월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으면 자동 이혼 될 수 있다고 하더라. 

  그걸로 해도 되고.’     


 황혼이혼이 이런 걸까? 나리 남편은 어이가 없었다. 아이들 둘이 대학 졸업하고 취직하자마자 이혼 통보라니. 그것도 딸랑 짧은 편지 한 장으로.


 ‘이 여자가 정말 미쳤군.’ 나리 남편은 주먹을 불끈 쥐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절대 이혼 못 해주지. 누구 좋아하라고.’


 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세 번째 걸었다. 받지 않았다. 차단한 모양이다. 문자를 보냈다.


 ‘당신 편지 잘 봤고, 내 결론은 이혼 못 해준다야. 소송을 하던 마음대로 해. 어디 유부녀 신분으로 맘껏 즐겨 보시지. 당신이 최고로 비참하게 되었을 때 그때 이혼할 거야. 남편과 자식을 버린 쓰레기 여자에게 행복한 이혼이 가당키나 해?’     


 나리가 남편의 문자를 읽었다. 곧 답변을 입력했다.


 ‘쪼잔한 거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심하네. 난 이미 당신 아내가 아니니까 그따위 법적인 서류 조각에 얽매이지 않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우린 더 이상 부부가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서류상 부부? 전혀 신경을 안 쓰고 살 거니까 이혼해주든 안 해주든 알아서 하셔. 끝.’     


 일방적인 전쟁 선포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아이들에게는 어떻게 말하지. 남자의 마음이 가늘어진 실오라기처럼 쪼그라들었다. 당당했던 가슴 아래 구멍이 뻥 뚫렸다. 그 구멍 사이로 싸늘한 냉기가 마구마구 들락거렸다.     


 태식의 오피스텔.

 나리는 남편에게 마지막 문자를 보내고 태식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이제 자신의 남편은 태식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렸다고 생각하니 태식이 절대적인 존재로 보였다.

 태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태식이 받지 않았다. 카톡을 보냈다.    

 

 ‘지금 오피스텔로 가고 있어요. 나 지금 너무 외로워요. 톡 보는 대로 전화 주세요.’     

  

 숫자 1이 없어지기를 기다리며 계속 쳐다봤다. 없어지지 않는다. ‘바쁜가? 오늘 휴일이라 오피스텔에 있을 거라고 했는데…….’ 나리는 순간 두려움이 엄습했다. 태식이 자신을 버리면 말 그대로 낙동강 오리 알이 되는 신세였다. 집착하는 마음이 더 세졌다.     


 ‘왜, 연락도 안 되고 카톡도 안 보는 거예요? 전화 받아요.’   

  

 태식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수신자의 전화가 꺼져 있습니다. 잠시 후에 다시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는 전화가 꺼져 있다는 멘트가 나왔다.

 이쯤 되면 둘 중에 하나다. 중요한 회의를 하고 있어서 전화를 못 받으니까 꺼버린 것, 나머지 하나는 의도적으로 피하려고 꺼버린 것.


 ‘그래. 중요한 회의를 하고 있을 거야. 이런 일이 처음이니까 무슨 일이 있겠지. 3일 전에도 뜨거운 밤을 보냈잖아.’ 


 나리는 3일 전 태식과 함께 보낸 밤을 떠올렸다. 황홀한 기억으로 두려움을 밀어내려고 애를 썼다.      

 태식의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습관적으로 8층을 눌렀다. 아무도 타지 않은 엘리베이터는 곧장 올라갔다. 멍하니 숫자를 바라보고 있다가 문이 열리자 내렸다. 그런데 9층이었다. 연락되지 않는 태식 때문에 잘못 누른 것이다. 9라는 숫자를 보고도 문이 열리자 터벅터벅 내린 자신의 모습에 ‘휴우. 정신 차리자. 김나리.’라고 말하며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문이 닫히고 내려가 버렸다.      

 나리는 9층에서 8층이니 계단으로 내려가려고 비상계단이 있는 곳으로 걸었다. 태식을 생각하며 힘없이 걷는데 어디선가 태식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이제 환청까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걷는데 이번에는 더 또렷하게 들렸다.


“아빠, 지금 가야 돼?”

“그래. 아빠가 급한 일 처리하고 바로 올게. 엄마랑 잘 놀고 있어.”


 어쩜 이렇게 목소리가 닮았을까. 나리는 신기하기만 했다. 907호. 태식 오피스텔 바로 위층이었다.

 나리가 복도 끝 계단으로 막 내려가려는데 907호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낯익은 구두와 손이 먼저 보였다. ‘설마?’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문을 열고 나오는 남자는 태식이었다.

순간 나리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간신히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고 계단 모퉁이로 몸을 숨긴 후 계속 쳐다봤다.

 삼십 대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세 살쯤 된 아이를 안고 문 앞에서 태식을 배웅했다. 


 “아빠 갔다 올게.”


 분명히 아빠라고 했다. 수정이와 자신도 모르는 혼외자식이 있었다. 

 태식은 삼대독자다. 아들을 낳지 못한 수정이는 그게 늘 죄인처럼 느껴진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럼 밖에서 아들을 낳았다? 감쪽같이 모두를 속였다 이거지!’      


 나리는 치를 떨었다. 남은 인생은 태식과 함께 행복하게 보낼 거라는 꿈이 산산이 조각나는 순간이었다. 더욱 기가 찬 것은 오피스텔 한 층을 사이에 두고 두 집 살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쁜 새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부숴버릴 거야.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나리의 머릿속에는 온통 분노와 충격뿐이었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자. 섣불리 아는체하고 따져봤자 나만 비참해질 거야.’ 나리는 남편의 저주가 생각났다. ‘네가 가장 비참해질 때 그때 이혼할 거야.’ 순간 소름이 돋았다. 결코, 남편의 저주대로 되지 않을 거라며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나리는 8층으로 내려가서 태식의 오피스텔 807호를 향해 복도를 걸어갔다. 

 조금 전까지는 807호가 자신과 태식의 신혼집처럼 생각되었었다. 9층에서의 광경을 본 이후 지금 보이는 807호는 달랐다. 두 집 살림하는 바람둥이가 가끔 들러서 나의 육체를 탐하는 홍등가처럼 보였다. 실제로 태식은 섹스할 때마다 붉은 조명등 하나만 켜놓았었다.      


 ‘어이가 없네. 나를 완전히 사창가 창녀처럼 생각한 거야? 위아래 번갈아 가며 그 짓을 즐긴 거다 이거지. 도저히 용서 못 해. 죽여버릴 거야.’     


 나리가 고개를 숙이고 울분에 차서 주먹을 쥐는 순간 거대한 벽이 앞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들었다. 태식이 서 있었다. ‘이 인간 언제 왔지? 설마 나를 본 건 아니겠지?’ 나리는 조금 전 상황을 모른척하며 말했다.     


 “왜……, 저, 전화도 안 받고…….”

 “응. 중요한 회의를 하고 있었어. 알잖아. 그럴 땐 핸드폰 꺼놓는 거.”    

 

 태식은 너무나도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나리는 태식의 말이 차라리 참말이라고 믿고 싶었다.     


 “응. 그래. 맞아. 그랬지. 그런데 오늘 쉬는 날이라 집에만 있을 거라고 했던 거 같은데?”

 “급한 일이 생겨서 잠깐 갔다 온 거야. 들어가자.”     


 태식은 도어록을 올리고 비밀번호를 눌렀다. 

 띠리리릭 철컥

 문이 열리자 태식은 문을 반쯤 열고 나리가 안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렸다. 

 나리는 지금까지 느꼈던 행복하고 즐겁고 설레는 발걸음이 아니었다. 무거운 발걸음을 한발 내디뎠다. 두 번째 발걸음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걸음이었다.


 태식은 나리가 문안으로 완전히 들어서자 평소와 다르게 현관에서부터 애정 공세를 퍼부었다.

 나리를 현관 벽에 밀쳐놓고 키스를 하려고 했다. 나리는 태식의 입술이 다가오자 907호 젊은 여자가 떠올랐다.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태식의 혀가 입술을 비집고 들어오려고 했지만 열어주지 않았다. 그런 나리를 보며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 그래? 전화 안 받았다고 이러는 거야? 미안해. 미안하다고. 중요한 일이 있었다고 했잖아.”     


 태식은 처음으로 공격에 실패한 장군처럼 일시 정지상태에서 변명을 늘어놓았다. 변명 뒤에 나리의 표정을 보고 재차 총공격을 퍼부을 태세였다.


 “지금 내 기분……아니에요. 씻고 나올게요.”     


 나리는 태식이 없는 자신을 상상하는 순간 너무나 비참함을 느꼈다. ‘그래. 절대 널 놓치지 않을 거야. 내 모든 걸 버리고 선택한 넌데 그럴 순 없지. 지금부터 정신 바짝 차려야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태식을 내 남자로 만들어야 해.’ 나리는 태식이 보는 앞에서 블라우스를 벗었다. 천천히……. 스커트를 내리면서 자신이 가꿔온 몸매를 보여줬다. 태식의 가운데가 묵직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 순간 강력한 키스와 동시에 오른손이 태식의 묵직한 부위를 움켜쥐었다가 쓰다듬었다가를 반복했다. 태식이 덤벼들 것처럼 자세를 돌리려고 할 때 나리가 빠르게 몸을 뒤로 빼면서 말했다.     


 “기다려. 조금만 참아. 얼른 씻고 나올게.”     


 나리는 처음 태식과 몸을 섞을 때도 이렇게 했었다. 태식이 충분히 흥분할 수 있도록 만든 다음 자신을 맞이하는 의식을 준비하게 했다.     


 잠시 후 807호는 뜨거운 공간으로 바뀌었다. 변강쇠와 옹녀가 와도 울고 갈 만큼…….

 나리는 평소와 달리 누워서 태식을 바라보는 대신 천장 위에 있는 907호의 젊은 여자와 아이를 생각했다. 

 ‘흑흑. 아악.’

 나리의 신음 소리가 가늘게 새어 나오다가 점점 거친 숨소리와 함께 켜졌다. 마치 위층에서 들으라고 맘먹고 지른 소리처럼. 

 ‘흑흑. 아악. 흑흑.’ 

 괴상한 소리였다. 절정에서 나는 소리에 절규하듯 원망하는 소리, 거기다가 분노와 복수를 다짐하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태식은 그것도 모르고 자기가 나리를 완전히 홍콩 보내버린 것처럼 자신감에 찬 기분으로 마지막 격정의 몸짓을 날리고는 스르르 멈췄다.      


 다음 날 나리는 한껏 치장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심호흡을 크게 한 다음 9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안은 전운이 감돌았고 곧 9층에서 핵전쟁이라도 일어날 것 같았다. 

 9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나리가 907호를 향해 걸어갔다.

 따각따각

 하이힐에서 나는 소리는 선전포고 같았다.

 딩동

 907호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세요?”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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