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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일만 Sep 21. 2022

망각의 강 레테 7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     


마조의 제자가 석두화상을 찾았다. 석두는 장작개비를 가리키며 “마조와 저 장작을 비교하면 어떤가?”라고 물었다. 제자는 대체 무슨 영문인지 몰라 아무 말도 못했다. 제자는 마조에게 돌아 와 밖에서 겪은 일을 설명했다.

“그 장작 크기가 얼마만하더냐?”

“엄청 컸습니다.”

제자는 두 팔로 커다랗게 그림을 그리며 말했다.

“자네는 천하장사로군.”

“예? 무슨 말씀이신지.” 

“석두 있는 곳에서 여기까지 그 큰 장작을 짊어지고 왔으니 천하장사 아니겠는가.”

쓸데없는 일에 집착하는 제자를 꼬집은 말이었다. 마조에게서 뛰어난 제자들이 여럿 나왔다. 마조가 그들 가운데 셋을 데리고 달마중을 나갔다. 

마조가 제자 셋에게 물었다.

“지금은 어떤 때인가?”

서당(西堂)이 “공양하기 좋은 때입니다”고 말했다. 

백장(百丈)은 “수행하기 좋은 때입니다”고 답했다. 

남전(南泉)은 말없이 옷깃을 떨치며 가버렸다. 

그러자 마조는 “경(經)은 서당의 것이고, 선(禪)은 백장의 것이로되 오로지 남전만 물외에 초연하구나”고 세 사람을 평했다. 

한국 불교는 그들 가운데 서당(西堂)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신라의 승려 도의, 홍척, 혜척 등이 그에게 배운 후 돌아와 구산선문 가운데 세 곳을 세웠다. 서당의 문하에서 선의 또 다른 개척자 조주가 나왔다. 백장은 ‘일하지 않는 날에는 먹지도 않는다’는 선원(禪院)의 규율을 정했다. 남전은 소 먹이며 밭을 일구었고 30년 동안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마조는 육신의 옷을 벗는 날을 스스로 알았다고 한다. 다음 달에 죽는다고 미리 제자들에게 예고를 했다. 

제자가 몸져누운 스승에게 “어떠십니까?”라며 경계를 확인했다. 화두가 여전히 성성하냐는 물음이었다. 

마조는 담담히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이라고 말했다. 며칠 후 목욕을 마치고 가부좌를 한 채 떠나갔다. 일면불의 수명은 천 팔백세이고, 월면불의 수명은 하루 밤과 하루 낮 즉 24시간이다. 하루를 살아도 천년 같고, 천년을 살아도 대우주 속에선 하루에 불과하다.       

마조-서당-조주-임제로 이어진 중국의 선맥(禪脈)은 고려로 전해졌다. 고려시대는 선종과 교종의 대립이 극심했다. 고려는 불교국가였다. 사찰이 이권 다툼의 중심에 서서 지탄을 받았다. 그런 가운데 지눌이 나와 고려 불교를 개혁했다. 조계종의 원조가 바로 지눌이다. 

지눌은 어린 시절 몸이 허약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을 살려주면 부처에게 바치겠다”고 서원했다. 결국 그 약속을 지켰다. 20대 초반에 승과에 급제한 지눌은 흔들리는 고려 불교를 바로 잡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런 지눌에게는 세 번의 깨달음이 찾아왔다고 전해진다.

첫 번째는 혜능이 지은 ‘육조단경’을 읽다가 ‘참다운 자기는 늘 자유롭고 자재하다’는 구절에서 탁하고 무릎을 쳤다. 이를 통해 지눌은 평생 혜능을 마음의 스승으로 여겼다. 그가 순천 송광사의 산 이름을 조계산이라고 명명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 이름에서 조계종이 나왔다. 

두 번째 인연은 화엄경을 통해 찾아 왔다. ‘몸은 지혜의 그림자’라는 대목에서 마음의 불꽃이 일렁거렸다. 더불어 선(禪)과 교(敎)가 따로따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임을 알게 됐다. 

지눌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며 결사운동을 벌였다. 선 수행을 의미하는 정(定)과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는 혜(慧)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융합함으로서 선교(禪敎)의 갈등을 뛰어넘으려 애썼다. 

지눌은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이를 보완하고 가다듬어야 된다며 돈오점수를 주장했다. 8백년 후 성철은 세 번의 깨달음이란 있을 수 없다며 돈오돈수로 맞섰다. 당대가 아닌 8백년의 시차를 두고 두 선사가 이른바 ‘돈점논쟁’을 벌인 것이다. 

지눌은 고려 불교의 난맥과 선과 교의 극심한 대립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고려 불교의 참담한 현실은 오히려 지눌 사상의 밑거름이 됐다. 국가나 사회의 불행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시인이나 사상가에겐 성숙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원효는 통일신라 초기 삼국이 합해져 혼란한 상황을 보고 ‘화쟁(和諍)’을 주장했다. 나라를 송두리째 잃은 구한말의 아픔을 겪은 경허는 승(僧)과 속(俗)을 몸소 뛰어넘는 경계를 보였다. 

청나라 시인 조익은 ‘국가불행(國家不幸) 시인행(詩人幸)’이라며 한탄했다. 불행한 시대는 행복한 시인을 낳는 법이다. 입이 풍요로워지면 머리는 도리어 한가해진다. 유가나 불가 모두 ‘기한발도심(飢寒發道心 춥고 배고파야 도심이 생겨난다)’이라 주장하는 이유다. 

지눌의 마지막 깨달음 인연은 지리산에서다. 지눌은 복잡한 현실을 떠나 다시 산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는 깨달음을 향한 배고픔이 남아 있었다. 마침내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송나라 선사 대혜(大慧)의 어록을 읽다가 세 번째 깨달음과 만나게 된다. 

‘생각과 분별심을 끊어내야 한다. 마음의 눈이 열리기만 하면 선(禪)은 너와 함께 있다.’ 이 구절이 마음에 확 다가와 박혔다. 

지눌은 송광사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다 주장자를 잡은 채 입적했다. 그의 시호는 불일(佛日) 즉 부처님의 빛이다. 훗날 법정이 머물며 수행한 곳으로 널리 알려진 송광사 불일암은 그의 시호를 따른 것이다. 

자신의 상주로 인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자 법정은 강원도 깊은 산속으로 피신했다. 입적 후에 법정이 영원히 머물게 된 곳 역시 불일암이었다. 법정은 평소 좋아하던 작은 나무 아래 무소유 상태로 자연에 귀의했다. 


한국 불교의 중심은 송나라 대혜에 의해 창시된 간화선(看話禪)다. 화두를 붙들고 수행하는 참선방법이다. 지눌과 혜심으로 이어진 간화선은 한국 불교의 정체성이나 다름없다. 

화두는 곧 의심덩어리를 말한다. 의심이 깨질 때까지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마침내 의심에 사무쳐 의심하는 자신마저 잊게 될 때 화두를 깨트리게 된다. 공안이라고도 불리는 불교의 화두는 1700 여개나 된다. 대표적인 화두로는 ‘무(無)’자가 있다. 그 연원은 이렇다. 

한 승려가 조주선사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그는 궁금했다. 일체 중생에게는 모두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개에게도 불성이 있을까.

조주의 대답은 “없다(無)”였다. 모든 개체에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개에게는 왜 없을까. 앞과 뒤는 서로 충돌한다. 의심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의심의 덩어리를 쉽게 풀지 않고 동정일여(動靜一如:움직일 때나 고요할 때나 한결 같음) - 오매일여(寤寐一如: 잠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한결 같음)를 거쳐 꿈속에서도 화두를 들고 참구(몽중일여 夢中一如)하다 보면 드디어 화두를 타파하는 법열의 순간이 찾아온다. 

현대의 고승 일타 선사는 “화두를 드는 방법은 간절히 참구하는 방법 외에는 별다른 요령이 없다. 간절한 마음으로 크게 의심하는 가운데 문득 깨닫게 된다”고 했다. 

조선시대 서산대사는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 온 마음을 다하는 것처럼 오래 굶주린 자가 밥 생각하듯 목마를 때 물을 찾듯 혹은 어린아이가 엄마를 생각하듯 진심에서 우러나야 한다. 간절한 마음 없이 깨달음은 결코 오지 않는다”고 화두를 드는 자세를 일렀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한국 선불교의 대표적 화두는 무(無)자다. 없을 무, 지극히 간명하고 지극히 어렵다. 무자 화두는 조주의 선문답에서 나왔다. 이를 간화의 방편으로 제시한 선사는 대혜다. 무자 화두는 한국 불교 2천 여 선사들이 가장 널리 들고 있는 화두다. 조주는 무(無)자 외에도 여러 화두를 남겼다. 

한 승려가 조주에게 “부처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조주는 “차나 마시고 가게(喫茶去)”라고 말할 뿐이었다. 조주가 어느 승려에게 “이곳에 온 적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있다고 하자 “차나 마시고 가게(喫茶去)”라고 했다. 같은 질문을 또 다른 승려에게도 했다. 그는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역시 “차나 마시고 가게(喫茶去)” 똑같은 말을 남겼다. 

그의 제자가 왜 자꾸 “차나 마시고 가게(喫茶去)”라고만 하십니까? 라고 묻자 역시나 “차나 마시고 가게(喫茶去)”라고 했다. 조주는 왜 다양하게 답할 수 있는 질문에 같은 말만 되풀이했을까. 의심이 들면 참구해볼 수밖에 없다. 의심에 또 다른 의심을 켜켜이 덧씌워야 한다. ‘차나 마시고 가게’는 선가의 대표적 화두로 남았다.

조사(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을 묻는 질문(祖師西來意)은 선불교에서 널리 사용된다. 이를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으로 바꾼 영화(배용균 감독)가 나오기도 했다. 서쪽에서 온 것이나 동쪽으로 간 것이나 매한가지다. 

한 승려가 조주에게 그 질문을 던졌다. 달마조사는 왜 서쪽에서 이곳으로 왔을까. 조주는 법당 마당 앞에 있는 잣나무를 가리키며 한마디 던졌다. 

“뜰 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

깊고 아득한 문제일수록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질문이나 문제에 빠지면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한다. 마치 달을 가리키고자 하는데 그 앞을 가로막는 손가락만 보려는 것처럼. 

한 승려가 조주에게 “스님은 남전스님에게서 배웠다 들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라고 물었다. 조주의 대답은 엉뚱했다.

“진주(鎭州)에서는 꽤 커다란 무가 나온다지요.”

진주가 무의 명산지라는 것은 중국에선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마치 나주 배가 유명한 것처럼. 이 역시 선방(禪房)의 화두 가운데 하나가 됐다.      

남전의 제자 가운데 조주와 함께 황벽이 있다남전에게서 수행한 황벽은 삿갓을 쓴 채 스승에게 하직 인사를 올렸다그러자 남전이 몸집은 커다라면서 겨우 야자만한 삿갓을 썼구나라고 말했다황벽은 큰 체격의 승려였다

황벽은 지지 않고 삼천사천세계가 모두 이 삿갓 안에 있습니다고 맞섰다그러자 남전이 왕노사(王老師)!”라며 감탄했다황벽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스승의 곁을 떠나갔다

황벽은 산은 산이요(山是山), 물은 물이로다(水是水)’라는 법어로 유명하다이 말은 1981년 성철이 조계종 종정에 추대되면서 내린 법어이기도 하다한국 불교에 큰 영향을 미친 임제가 바로 그 황벽에게서 나왔다

임제의 상좌가 스승에게 물었다

불법의 궁극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러자 임제는 느닷없이 상좌의 뺨을 때렸다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곁에 있던 다른 제자가 어서 스님께 절을 하지 않고 무얼 하나!”고 소리쳤다상좌는 얼떨결에 절을 올리다 문득 깨달았다이미 뺨을 맞은 아픔은 잊은 후였다

임제는 스스로 황벽에게서 똑같은 일을 겪었다스승에게 불법의 큰 뜻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그러자 황벽이 갑자기 들고 있는 막대기로 임제를 때렸다임제가 물러서지 않고 두 번이나 더 같은 질문을 했으나 그 때마다 얻어맞았다

임제는 대우선사를 찾아가 세 번이나 맞은 얘기를 털어놓고서 왜 때리는 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투덜거렸다그러자 대우선사는 황벽이 그토록 간절한 마음으로 그대를 위해주었건만 도통 까닭을 모른단 말인가라며 혀를 찼다그 제서야 임제의 눈앞이 환하게 밝아졌다. ‘임제가 크게 깨쳤다(臨濟大悟)’라는 화두의 연원이다

다시 조주에게로 돌아간다한 승려가 조주에게 분별심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분별심이란 곧 깨달음의 적이다분별심에 사로잡히면 대사를 그르친다그러기에 대주선사는 옳고 그름조차 분별하지 말라고 강조했다대체 분별심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경계를 하는 걸까승려는 조주의 답을 기다렸다

천상천하유아독존!”

기껏 주조의 입에서 나온 대답이었다승려는 발끈하였다간절한 마음으로 물었는데 엉뚱한 소리만 하지 않나승려는 다시 따지고 물었다분별심이 무어냐고어서 대답해 주세요!

그러자 조주는 이 촌놈아(田庫奴!)”라고 꾸짖었다비로소 승려는 아무 말 못하였다여기서 나온 공안(화두)이 조주전고(趙州田庫)

조주 역시 깨닫기 전에는 안개 속을 헤매고 있었다스승 남전에게 어떤 것이 도입니까?”라고 물었다스승의 대답은 간단했다.

평상심(平常心)”

그것이 도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도는 아는 것에도모르는 것에도 속하지 않는다안다든가 모른다든가 하는 분별심을 없애면 저절로 도가 드러난다.”

스승의 말에 그제야 조주의 안목이 밝아졌다조주가 도를 물었다는 조주문도(趙州問道)라는 화두가 생겨난 유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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