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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고 May 29. 2023

유한과 무한

풍요로운 인생

우리의 사고 체계는 유한함을 먼저 인지한다. 우리의 하루는 즐거움을 지속하기엔 너무 짧다. 시간은 유한한 자원이다. 하고 싶은 것에 비해 돈은 늘 부족하고, 많은 노력을 투여해야 그 돈으로 교환할 수 있다. 돈도 유한한 자원이다. 돈을 버는 노력을 위해 굳건한 의지를 가져야 한다. 그런데 의지력조차 기대했던 것보다 빠르게 고갈된다. 생물학적으로 의지는 에너지를 소모하는 행위이기에 결국 유한성의 벽에 갇혀 버린다. 의지를 다시 회복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한정된 시간이 더 줄어든다...


사고를 외적으로 확장하여 지구를 살펴보자. 지구는 한정된 영역이다. 그러니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있으며, 누군가는 더 많은 자원을 갖고 누군가는 빈약한 채로 시작하는 불평등이 발생한다. 인류가 존경하는 많은 영적 지도자들은 이 자원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들이 제시한 해결책의 대부분은 절제, 분배, 봉사, 희생 같은 것들이었다. 물레를 돌리면서 소유와 그에 얽힌 예속에 저항했던 간디, 무소유를 거짓 없이 실천했던 스님들, 미개발된 국가에 선진의 지식과 자원을 전달하기 위해 인생을 바친 선교사들, 그 외 정부도 하지 못한 기반 사업을 먼저 나서서 추진한 기업가 등이 그 훌륭한 예시가 될 것이다. 그들의 마음가짐은 고귀하다. 그 비워내는 삶은 유한성에 대한 깊은 고뇌를 거쳐 도출한 결심이다.


그러나 어떤 탐구자들은 이런 유한성에 대한 인식과는 정반대로 향했다. 그들은 표면적으로 탐욕스러워 보였지만, 그렇다고 남의 것을 착취하는 것에 중점을 두지는 않는다. 그들의 정신은 지구가 아닌 우주를  보고 있다. 유한한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무한한 우주를 바라보면서 기존에 발견되지 않았던 영역에서 원하는 것을 캐낸다. 그들의 사고 속에서는, 원하는 것들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뿐 언젠가는 캐낼 수 있는 곳에 묻혀 있다고 기대한다. 창의적인 생각과 원하는 것에 대한 집중이 그 모든 것을 갖게 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지금껏 이 세계의 변혁을 가져온 것들은 어떻게 나타났던가? 모든 현상적 시스템은 유한하게 통제된다. 그 통제를 뛰어넘을 때 변혁이 탄생한다. 스마트폰이라는 전혀 새로운 정보의 매개체가 기존 모든 매체의 경쟁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거의 무한의 에너지인 원자력이 유한한 석유의 고갈만 걱정하던 세계를 다른 차원의 논의로 전환시켰고, 플랫폼 시스템이 개별적인 상점끼리의 경쟁을 전 세계 간의 경쟁으로 확장시켰고, 가상화폐가 금과 돈만이 지배하던 부의 세계를 계산할 수 없는 영역으로 키워버렸듯이, 이 세상의 변혁은 무한함을 전제로 한 아이디어와 함께 시작하는 것이다. 물질적인 것만 그런 것은 아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현실적 세계에 가장 적합한 도덕이자 법률이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예수는 무한한 도덕성인 '사랑'으로 맞섰다. 다만 이러한 정신적 변혁은 수 천년에 걸쳐 여전히 충돌하고 있는 상태이다. 


의업에 종사하는 개인으로서, 지금까지 내가 어릴 때부터 받았던 교육은 유한한 세계에서의 경쟁이 다였다. 지식이란 그 자체의 속성은 무한하긴 하지만 내가 목표로 삼아야 할 지식은 유한한 범주 내의 것이었다. 한정된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고, 최대한 집중하면서, 가장 단순한 알고리즘으로 그 지식을 습득해야만 이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그 승리의 정도는 결국 석차로 결정된다. 일정 등수 내에 들고, 일정 과목을 마스터하고, 일정 분야의 업무를 수준에 맞게 수행하고서 마침내 나는 좁은 진료실에 앉아서 환자를 진찰하고 있는 것이다. 성실했던 인생으로 모든 상황을 긍정하기엔 뭔가 폐쇄적이었고 처량한 결과로 느껴진다. 그러나 현실이 어떻게 되었든, 처음 어떤 꿈을 가졌던 것,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때 바라보았던 것, 그런 마음은 분명 무한한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유한해 보이는 이 세상에도 무한성을 전제한 말들은 흔하게 들린다. "잘되어라, 합격해라, 인정받아라, 많이 벌어라, 행복해라, 번창해라, 잘 자라라..." 등등 우리의 수많은 다짐과 소망, 기도들은 이렇게나 무한성에 의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왜 우리의 일상은 이렇게 유한함에 갇혀 있는 것일까? 우리의 몸은 유한한 세계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잠재의식 속 의지는 분명 무한한 세계를 보고 있다. 어쩌면 이 세계의 실상은 언제나 무한했는데 인간만이 유한하다고 단정 짓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유한한 세계 속의 경쟁자들은 순위와 관계없이 그 속성 내에 안주하고 있다. 무한한 세계를 열었던 창조자들은 그런 방식으로 안주하지 않는다. 그들처럼 우리의 인지를 넓혀본다면, 여전히 도약해 볼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찾을 수도 있겠다. 돌아보면 의사가 되어가던 메마른 과정 속에서도, 자신의 성장과 즐거움에 몰입하며 무한성을 발휘했던 동료들도 있었다. 그들조차 현재는 유한성의 세계에 잠식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무한성에 접근했던 가능성을 나에게로 끌어올 수도 있다.


좀 더 실질적인 얘기를 해보겠다. 나는 "더 많은 돈을 벌고 싶다." 며 매일 이 세계에 요구를 한다. 처음에는 조건을 붙였다. 그 돈을 통해 이 세계를 더 풍요롭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사치하지도 자만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이 돈을 갖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는 곳에 쓰겠다고 조건을 걸었다. 왜냐하면 유한성의 세계에서 그 유한한 돈을 내가 점유한 만큼 '올바른 사용'이란 대가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 조건을 걸고 싶지 않다. '돈을 벌고 싶다.'는 소망의 본 뜻은 '부(富)를 통한 여유와 권력을 얻고 싶다.'로 풀어줘야 한다. 돈 그 자체는 유한한 것이 사실이지만, 궁극적 목적인 '부'가 유한성에 갇혀 있지는 않을 것 같다. 무한할 수도 있는 '부'를 두고 조건을 걸면, 뭔가 어색한 거래가 되어 버린다. 내 일방적인 방식의 소망을 이 세계가 수락한다면, 내가 이 세계의 한정된 돈을 잠시 독점하면서 불평등이 생길 수는 있겠다. 하지만 이후 나에게 주어질 부와 여유와 권력에 걸맞은 덕성, 도리를 갖추면 충분할 일이다. 무한한 것을 두고 구차한 조건은 필요하지 않다. '원한다.'는 의지, 그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유한함의 세계에서 의지만은 무한함의 세계를 넘나들 수 있다. 


다시 얘기하지만, 나는 이 세계에 당당히 많은 것을 요구한다. 이 세계는 엄청나게 부유하며,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다만 어떤 이유에서든 이 사실을 숨기고 있다. 그러니 오늘 요구한 것이 오늘 이루어질 리는 없다. 하지만 경험으로 알듯이, 모든 소망은 그 진실한 바람대로 결국 이루어진다. 내가 원하는 것을 세계가 바로 주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대부분은 실제로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어떤 것은 나의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며, 어떤 경우는 내가 감사할 수 없는 결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저 어렴풋한 짐작이다. 그래서 일단 요구를 먼저 하고 결과를 상상하며 그저 감사히 기다려본다. 원하는 것에 대하여 조금 더 여유롭게 기대해 봐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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