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박자만 늦춰서 상대를 보자.
(오랜만에 본 전지연폭포, 겨울인데도 수량이 꽤 있네요.)
다음 명절에도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뭐든 할 수 있을 때면 한다는 마음입니다.
이 번에 두 분을 모시고 제주도에서 명절을 보냈을 때도요.
어머니는 여행 가기 한 주 전에 장염에 걸리고, 이후 연달아 감기에도 걸려,
평상시 잘 맞지도 않던 수액을 두 차례나 맞으면서 겨우 기운 차려서 제주도로 오셨네요.
어머니에게도 나름 힘들었던 결단이었습니다.
명절 며칠 앞두고 기력이 너무 없다고 여행을 취소하자고 저에게 전화하셨는데,
수액이라도 맞고 약 더 먹으면 충분히 나을 수 있다고 격려하면서
어떻게든 오시라고 사실상 독촉을 했죠.
(부모님과 제 가족은 각자 다른 지역에서 비행기 타고 이동해야 합니다.)
어머니에게는 차례 없이, 손님 없이, 순전한 여행으로 맞이한 첫 명절.
그 시작은 기억에 남을 정도로 반드시 거창해야 한다는 것이 제 판단이었습니다.
형식적인 전통에서 실질적인 즐거움으로 향하는 의미 있는 날이 될 것이고
서로가 그 기쁨을 느끼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첫날 제가 제주 공항으로 날아가면서도,
행복한 부모님과 우리 가족들의 모습을 계속 이미지로 그렸죠.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는 전보다 기력 없고 허리도 약간 굽었지만,
저는 어머니가 더 기운을 차리고 더 웃게 될 거라 믿었습니다.
어머니는 손녀 때문에도 웃고, 재미있는 마상 공연 때문에도 웃고,
저녁에 어쩌다 먹었던 흑돼지 구이가 너무 맛있다며 또 웃었습니다.
그러면서 허리가 더 펴지네요.
사흘간의 여행 후에 어머니에게서 처음 들어보는 말씀이 나오네요.
"내일도 또 여행했으면 좋겠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고향행 비행기를 타셨죠.
물론 아버지에 대한 제 마음도 있습니다.
차례가 없는 명절이 아버지에겐 좀 불안한 변화였을 겁니다.
심지어 여행지에서라도 설날 떡국은 끓어야 하지 않냐고도 하셨죠.
그렇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아내가 웃는 모습에 함께 기뻐했고,
자식과 며느리가 상황에 맞춰 가이드해주는 여행 코스에 감탄하였고,
그때쯤 자식들의 전반적 판단을 믿고 존중한다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맛있는 흑돼지 구이에 다 같이 흥이 오르며,
서로가 덕담을 나누고, 고기 굽던 사장님까지 신날 정도로 칭찬해 드렸고,
소주 두 병에 막걸리 한 병도 추가로 마시면서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너무 맛있었던 금능고깃집, 주변 유명 맛집이 너무 복잡해 장소를 바꿨는데 정말 잘한 선택.)
사실 우리가 타인에게 하는 대다수 말들은
'적당히 괜찮은 말' 정도를 꺼내는 것이지만,
공감대가 통하면 비로소 '하고 싶은 말'이 나오게 됩니다.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생각을 많이 한다고 떠오르지 않습니다.
상대와 내가 그럴 수 있을만한 관계가 되었을 때 비로소 말로 드러나는 것이죠.
좀 더 마음이 붙어 있는 대화를 원한다면,
상대가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그와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버지도 자식과 마음을 나누는 대화의 시간이 많이 기뻤을 겁니다.
(둘째날 옹포횟집에서 먹은 고등어회, 딱새우회 등. 부모님이 고등어는 회로 먹는거 아니라며 안드시려 했지만 그날 처음으로 드시고서 그 고소함에 반함.)
여행 셋째날 아침에는 저만 좀 더 일찍 일어나서 생각해 봤습니다.
나는 내 자식과 얼마나 마음을 나누고 있는가?
물론 원하는 것은 그들과 마음으로 소통하는 것이죠.
그러나 너무 인위적인 의지로 마음을 다지는 것도 역효과만 난다고 보기에,
고심 끝에 적절한 선에서 가능한 대책을 찾아냈는데,
'반박자만 늦춰서 상대를 보자.'는 것입니다.
특히 느릿느릿한 둘째를 재촉하면서 요즘들어
"하려고 했는데 왜 또 말해!" 하는 원망을 들었던 기억이 나는데,
사실 저는 딸의 그 말을 그저 미숙하게 보고 마음속에서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이제 나보다 느린 것을 인정하고, 행동 전에 몸으로 표현하는 것을 제대로 관찰하면서,
반 박자만 느리게 내 말도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반 박자 동안에 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려고 해봐야죠.
갑자기 딸들과 더 친근한 아빠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우리 아버지도 아들과 그렇게 된 마음이었겠죠?
여행동안에 많은 좋은 운들이 따라주었습니다.
특히나 비행기 결항도 속출할 만큼 폭설, 강풍 속에 함께 했던 명절이라,
작은 차이로 겨우 차질 없고 알 찬 여행이 가능했네요.
그것은 좋은 운이지만 그렇다고 우연은 아닙니다.
저에게 당장 임박한 과제는 다른 것보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주는 것, 부모님과 마음을 나누는 것이었기에
그 외에 자잘한 것들은 무탈히 넘어가도록 운명이 도와준 것이겠죠.
인생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아마도 이번 여행에서 성취되었을 겁니다.
지금 저도 다 알 수는 없지만,
이로 인해 또 다른 중요한, 그리고 반드시 기쁨을 줄 일들이 이어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