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안 가본 사람에게 명칭만 얘기하면 필리핀인지도 모르는 관광지, 그래도 갔다 와본 사람은 다 아름다웠다는 보라카이. 나의 시각에서도 짙푸른 바다가 어느 관광지보다 압도적으로 선명하게 부각되었다. 가까이서 보니 예상치 못했던 혼탁한 녹조 때문에 당혹스러웠고 아이들도 기겁을 했지만, 바다에 몸을 담그지만 않으면 문제 될 것은 아니었다. 모래 질감이 너무 부드럽고 좋아서, 기존 여행 중 모래 놀이에 흥미를 잃었던 아이들도 바다 수영 대신 틈만 나면 깊은 구덩이를 파며 놀았다. 지나가던 경찰이 구덩이를 꼭 원상복구 해놓으라며 경고했다. 그래도 고운 모래 덕택에 비치바 앞 쪽에 아이들을 풀어놓고서, 나 역시 한 잔 하며 각종 생각에 잠겨볼 수 있었다.
5박을 하면서 낮밤으로 해변을 바라보았는데, 언제 봐도 예쁜 것은 사실이었지만 예상과는 달리 큰 감흥이 없었다. 아침에 부드러운 햇살로 태닝 할 때도, 뜨거운 정오에 아이스크림 핥으면서 그늘에서 쉴 때도, 밤에 익숙한 별자리를 찾으면서 파도와 음악 소리에 젖어들 때도, 어느 시간이든 바다와 해변은 분명히 예쁘게 보였다. 하지만 나의 관심은 아름다움 그 자체는 아니었다. 어떤 환희나 감탄 혹은 원초적 몰입에 빠질 정도의 느낌은 아니었고, 억지로 그런 척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저 궁금했을 뿐이다. 자연의 이 아름다움은 나에게 전해진 것일까? 나의 세계에만 특별한 것일까? 아니면 순전히 가치중립적인 것일까? 나는 비 오는 밤 해변에서 이 의문을 품었다.
세상의 사물과 사건은 나의 내면으로 닿았을 때 가치가 생겨난다. 여행 전까지 아직 만나지 못한 보라카이의 경치가 나에게 가치 있었을 리 없다. 그리고 여행 와서 다른 걱정이나 관심에만 빠져있다고 해도 경관 따위는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어쨌든 자연이 애를 썼어도 내가 그것을 느끼고 받아줘야 그만큼의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나는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믿는다. 그러니 이 세계가 어떻게든 나에게 주려고 하는 이 모든 풍경은 어떻게든 내 안에 들어오고자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자연은 자신의 전체를 전달하기 위해 색과 모양과 질감과 냄새와 소리를 내 옆에 모두 펼쳐놓았다. 아름답든 추하든 그것은 특별한 존재에 걸맞은 특별한 선물로서 짝은 맞춘 것이다.
세계와 마음은 서로의 거울상이다. 이 모든 선물은 내면의 추상적인 것들에 대응하는 상징이 된다. 쨍한 바다의 빛깔은 마음속에서 푸른빛을 띤 평화와 공명한다.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는 허무하게 부서지지만 끊임없이 순환하는 무채색의 하얀 일상을 상징한다. 아니 반대로 무한한 풍요와 짝이 지어지기도 한다. 해변의 녹조조차 부글거리는 생명력이며 그것은 꼭 깔끔하고 예쁜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 자꾸 귀찮게 말을 거는 삐끼들이 그 상징을 대신할 수도 있다. 자신이 모든 사건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경험했다고 말하는 모든 일들은 외적인 사건이 내면의 존재와 짝지어지면서 안으로 불러들인 것들이다.
나에게는 이 바다가 또 다른 여러 경험들의 대표적 상징이 되었다. 나는 보라카이의 바다를 사진으로 보면서, 또 마음으로 그려보면서, 아래와 같은 경험들을 함께 떠올릴 것이다. 마닐라에서 출발해 까띠클란 공항에 막 도착하면서 비행기가 강풍 속에 착륙할 때 다른 승객들과 함께 손뼉 치면서 느낀 그 안도감과 기쁨의 경험. 녹조를 헤치고 처음으로 스쿠버 장비를 걸치고 내려가 해저를 관찰하며 경이로움과 신비함을 느낀 경험. 강풍 아래에서 윈드서핑은 초보자가 배우기 적합하지 않았지만 악조건 속에서도 드디어 일어나 왕복을 성공했을 때 큰 성취감을 가진 경험. 보라카이의 해변은 이런 경험과 감정으로 이어지는 상징이 되었다.
새해의 결심대로, 나는 기쁨이 있는 일을 선택할 것이다. 기쁨을 줄 만큼 대단한 일을 선택하는 방법도 있지만, 반대로 이미 제시된 모든 선물을 내면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조급하게 거짓으로 받아들이지 말자. 내면을 면밀히 관찰해 보라. 타인이 제시하고 설정한 프로세스를 쫓아가 봐야 휘둘리기만 할 뿐 진정한 기쁨에 도달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책자와 유튜브 등을 통해 보라카이 바다를 본 작가들이 감탄하는 모습과 표현을 내가 따라 한다고 진정한 기쁨이 생기지는 않는다. 세계가 나에게 다가오는 것은 그 형상을 필요로 하는 마음과 감정의 덩어리들이 있기 때문이다. 둘의 짝지어짐이 적절할 때 내면의 기쁨이 솟는다.
마침 보라카이의 마지막 밤은 비가 내렸다. 해변이 더 어둡고 혼란스럽고 덜 예뻐졌다. 물론 객관적 시각으로만 그렇단 얘기다. 좀 뒤늦었지만 그동안 본 아름다운 풍경들을 내 마음에 들여놓기에 오히려 좋은 시간이다. 그리고 지금은 집에서 책상에 앉아 발바닥에 전해진 고운 모래의 촉감을 내 안에 들여놓고 비 오는 밤 해변을 다시 걷고 있다. 그것도 기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