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비치는 세계
아내랑 같이 귀멸의 칼날 극장판 (무한성편) 봤습니다. 특별한 날이기도 해서 같이 무슨 영화 볼까 하다가, 흥행 중인 좀비딸은 너무 가벼울 것 같고, 미션임파서블 같은 초대박 영화도 없고, 그래도 애니계에서는 고공 행진 중인 귀멸의 칼날을 보기로 했어요. 그 시리즈 전혀 본 적이 없는 아내에게 제가 잠깐만 설명해 주겠다며, 인간을 먹는 혈귀들의 속성과 그들의 왕인 무잔, 혈귀에게 당했지만 인간성을 지키는 네즈코와 여동생을 인간으로 되돌리려는 탄지로의 의지, 그리고 각종 호흡의 속성, 태양을 극복해야 하는 무잔의 숙명 등을 얘기해 줬습니다. 낮에 요아정에서 다 같이 새콤한 요거트 퍼먹으며 아빠의 이야기를 건너 듣던 딸애들은 신기한 듯 귀를 기울이는데, 아내는 인터넷 커뮤에서나 사는 줄 알았던 오타쿠가 자기 눈앞에 있었구나 하는 수치심에 점점 경멸의 눈빛으로... 그래도 꿋꿋하게 설명하주니 살짝 흥미는 느꼈는지 영화 예약은 해줬어요.
애들은 집에 데려다주고 숙제하고 있으라 하고 둘이서 자전거 타고 극장으로 출발... 결과적으로 아내는 과도하게 몰아붙이는 전투, 지루할 정도로 과도한 회상씬에 좀 질린 것 같았네요. 특히 칼을 쓰기 전에 꼭 "무슨 호흡 제 몇 형 춤추는 잠자리!" 이렇게 기술을 말하는 부분은 막상 옆에 누가 실소를 터뜨리니 저도 오글거리긴 하더군요. 다만 전체 내용을 아는 저로서는 앞 내용을 모르는 누구나 이 영화만 봐도 이해할 수 있도록 편집을 잘했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몇몇 인상적인 장면들도 마음에 남아서 좋은 평가를 줬네요.
유명하다는 만화들은 작화의 화려함과 스토리의 정교함 때문만으로 유명해진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화려한 것은 자본의 힘이지만, 그것보단 더 깊은 감동의 지점, 기억에 계속 남아서 현실에 상상을 대입하게 만드는 연상의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만화는 인간의 무의식을 펼쳐주고 이면의 진실을 보게 하는 핵심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 이미지 때문에 대중들도 그 작화와 스토리에 더 끌리는 것입니다. 유명한 작품을 예로 들자면, [원피스]는 각종 괴상한 능력자들을 보여주다 결국은 패왕색, 견문색이라고 하는 순수한 힘과 예지력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이미지로 정리됩니다. [블리치] 역시 저승세계(=소울소사이어티)에서 권력 다툼이 주 내용이지만, 다양하게 늘어놓는 여러 기술들보다 자신과 검이 (저승보다 더 이면에 있는) 정신의 세계 속에서 하나 되는 경지를 통해 더욱 궁극적 힘에 도달하는 이미지를 제시하죠. [강철의 연금술사]는 각종 연금술로 화려한 전투를 벌이는 것과는 별개로, '진리의 문'이라는 모든 의식과 생명이 탄생하고 회수되는 곳을 강렬한 이미지로 그려내고, 이 세계에 도달하는 자만이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암시합니다. 조금 정리하자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세계는 작가 역량에 따른 가상의 창조물이지만, 주인공이 핵심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경지는 현실 세계 속에서도 누구나 상상하며 도달할 수 있는 무의식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귀멸의 칼날에서 보이는 장면에도 그런 느낌의 이미지들이 있죠. 물의 호흡, 태양의 호흡, 바람의 호흡이라며 사물의 속성과 호흡을 결합하는 자체가 머릿속 심상을 세계에 투영하여 주관적으로 시각화한 것입니다. 즉 세계의 형태는 우리의 인지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우리는 이미 그렇게 살아가고 있기에 그 이미지에 끌립니다. 그 과정이 여타 한 초능력이 아닌 '호흡'이라는 동양적 사고에 기반한 것이 신선하죠. 이번 극장판에서도 역시 위 다른 만화에서 처럼 궁극의 경지를 다뤘는데, '내비치는 세계'는 사물의 모든 움직임, 의도, 미래가 한꺼번에 보이는 영역입니다. 이 영역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모든 분노, 두려움, 그리고 의지조차 지워야 합니다. 상대는 나를 알 수가 없고, 나는 상대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전까지 몰아치던 전투가 이 깨달음에 도달하고서 평화롭고 느릿한 느낌으로 연출되는 것이 좋았습니다. 결국 궁극의 경지는 현실 세계 인간의 내면에도 잠재되어 있습니다. 모든 명작이라는 만화들이 대부분 그 세계를 이미지화시킵니다.
작품을 좀 확대해서 얘기하자면 귀멸의 칼날 스토리나 작화는 좋은데, 너무 인물들의 의지력만 강조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나약한 주인공이 동료나 가족들이 당하는 것을 보며 절박감이나 분노를 통해 각성하면서 갑자기 능력이 생기고 힘이 세지는 연출이 좀 뻔해 보이는 느낌이었습니다. 가장 자주 들리는 단어가 '절대로! (젯타이니!)' 였죠. 기합만 외친다고 사람이 강해지나요? 이번 작품만은 오히려 힘을 빼고 감정을 빼면서 주인공이 더욱 강해지는 이미지를 그려내서 기존과의 균형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미지가 제 내면에도 좀 크게 다가왔습니다.
'힘을 빼자, 두려움을 빼자, 욕망을 빼자. 그것이 내가 이 세계를 이길 방향이다.'
'내비치는 세계'라는 이미지를 통해 이런 느낌, 깨달음 하나는 챙겼으니 저는 만족합니다. 아, 이것을 자세히 아내에게 얘기해주고 싶었지만, 5덕을 넘어 10덕으로 볼 것 같아서 그냥 "나는 나름 재밌었어."라는 말로 마무리했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