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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마음의 고향, 그리고 멜버른

태어난 자리

by 송고

뜬금없는 말이지만, 나는 예전부터 사병으로 복무한 군부대 주변 지역을 좋아했다. 서울 사는 형님이 찾아와서 외박했을 때도 부대 뒷산을 같이 등반하고서 꼭대기에서 즐겨 읽던 시를 낭독하곤 했다. 제대하고 나서도 첫겨울에 마음이 힘들 때, 훈련했던 지역들을 밤새 도보로 주파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곤 했었다. 왜냐하면 기나긴 고립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거듭났던 곳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새롭게 태어났기에, 그곳은 내 정신의 고향이다. 결혼하고서 단 두 번밖에 못 가본 것이 아쉽긴 하지만, 지금도 그곳을 떠올리기만 했는데 기분이 좋아진다. 마음의 고향이란 그런 곳이다.


아내는 늘 멜버른이 마음의 고향이라고 했다. 중학생 때 큰 꿈을 안고 한국을 떠나 도달한 곳. 한국에서 영어 잘한다는 칭찬만 믿고 현지에서 친구 좀 만들어보려다 좌절했지만, 한국인 자식답게 열심히 공부해서 개중에서 제일 명문대로 잘 간 한 때의 모범생. 한국 대학생들처럼 MT의 추억이 없어 아쉽다고 하면서도, 해리포터에 나오는 그런 멋진 학교 다녔다면서 아직도 자랑할 수 있는 다른 추억이 있는 인생. 아마 아내의 정신도 거기서 새로 태어났던 것이겠지. 역지사지로 나도 그 마음 이해한다.


이번 명절은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우리 가족은 우리 가족대로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작년 추석에 마지막으로 차례를 올릴 때부터 멜버른 여행을 준비했었다. 재무 사정은 늘 빈약하지만 어차피 경유로 해야 하니 저가항공으로 부담을 줄였다. 아무튼 모든 것이 아슬아슬하게 착착 맞아떨어졌고, 아내의 고향으로 간다는 큰 줄기 아래서 무수한 계획의 이파리들이 열렸다. 이제, 바로, 오늘 밤이다.


가장으로서 여행이 중간에 틀어지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 계획과 준비 + 언어적인 보완에만 초점을 맞추어 많은 공을 들였다. 이제 임박한 이 시간을 두고서 현실적인 준비는 이 정도로 만족하고, 잠시만 여행의 이면적 의미에 좀 더 초점을 맞춰봐도 되지 않을까. 나는 이 여행을 통해 무엇을 만나고 싶은 것일까? 어떤 예감을 가지고 있나?


나의 의도는 그저 아내가 옛 추억에 잠겨 기분전환 하게 맞춰주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이 태어난 곳을 기억해야만 한다. 지금껏 어디로 가서 어디쯤에 서있는 것인지 비로소 알기 위해서다. 우리는 어머니의 품속을 기억하기에 따뜻한 마음을 가진 어른으로 자랄 수 있다. 우리는 극한까지 노력했던 그 자리를 기억하기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다. 아내가 다시 태어났던 그곳에서 이후 지금까지의 인생 여정을 다시 돌아보기를 바란다. 꿈 많은 중학생에서 두 딸의 엄마로 이어져 살아가는 지금 그 자리가 적당한 것인지 생각해 보길 바란다. 현재의 아내가 자신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 지금 보여줄 수 있는 자신의 생각보다 더 깊고 광대한 곳에 도착 지점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 여행을 통해서 오래된 무의식을 헤집어 다시 태어날 때 향했던 곳이 어디일지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람은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날 수 있지만, 계기와 동기가 필요하다. 나와 내 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멜버른이 우리에게 기존 추억이 있는 장소는 아니지만, 가족 간의 기억은 어느 정도 서로에게 전해지게 마련이다. 그걸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추억을 명분으로 삼은 여행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낯선 세상에 떨어졌을 때 세상의 신비함을 더 깊게 보며, 사람의 숨겨진 면도 자세히 알게 된다. 고립, 좌절, 고난만이 사람을 새로 태어나게 하는 계기는 아니다. 마음이 무르익었을 때 낯선 곳으로의 여행도 사람을 거듭나게 해 줄 것이다. 지금이 적절한 때라면 이 여행이 나에게도 딸들에게도 거듭남의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우리에게 멋진 인생을 살고픈 동기는 충만하니, 그저 계기만 있으면 된다. 이 여행으로 멜버른이 우리 가족 모두에게 또 다른 고향이 되어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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