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멜버른 여행
멜버른의 긴 여정 3. 경유로 가는 길
드디어 명절에 해외에 나갈 수 있는 큰 기회가 왔지만, 기존 명절에 운전만 하며 고향을 오가다 보니, 이 시기 항공권 비용이 폭증한다는 것을 잘 몰랐다. 지난 설날에 이번 추석철을 살펴봤으니 8개월 전에 예약해보려 한 것인데, 기회가 있을 때 한 번 멀리까지 가보자면서 직항 편들을 살펴봤지만, 일반적인 여름휴가철 이상으로 비용이 뛰니까 좀 주저하게 되었다. 나는 여행 시간이 아까워서 학창 시절에나 한 번 경유로 다녔을 뿐, 가족이 생기고서는 항상 직항으로만 이동했다. 그런데 이리 저기 아무렇게나 검색하다 보니 의외로 멜버른이 합리적인 수준에서 이동 가능했다. 명절시기에도 한국인 기준 비인기에 해당한 경유지를 이용하면 그게 가능한 듯하다. 멜버른에 가는 길에는 마닐라에서 8시간, 돌아오는 길에는 자카르타 4시간만 레이오버하면, 그 시기 동남아에 갈 비용으로 멜버른까지 갈 수 있었다. 여러 가지 걱정이 있었지만, 어쨌든 예약부터 해 놓고서 명절을 기다릴 동안 자잘한 것들은 해결하기로 했다. 멜버른은 아내에게 학창 시절 추억이 깊은 곳이기에 더 과감하게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명절 연휴보다 하루 일찍 휴가를 내었다. 게다가 마지막 업무를 마치고 그날 밤 마닐라행 비행기를 탔으니 사실상 이틀을 보태주는 효과가 발생했다. 이틀 일찍 출발이기에 공항은 그리 북적거리지 않았다. 기분 좋게 마닐라행 비행기를 타긴 했는데, 세부퍼시픽 좁은 의자에서 만석에, 하필 끝자리 승객이 절박뇨증이 있는지 계속 화장실을 들락거려 비켜주니 새벽 시간 잠깐 눈 붙인 게 고작이었다. 아이들 역시 여행 분위기에 취해서 잠도 안 자고 둘이서 복닥거리며 놀다 보니 4시간 반은 금방 지나갔다. 그래도 마닐라의 공중 야경은 아름다워 보였다. 무척 피곤했지만 도시의 빛이 우리를 반겨주는 듯했다. 필리핀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이 어떤지는 잘 알고 있지만, 나에겐 신혼 때 작은 추억이 있는 곳이라서 마닐라를 좋아한다. 옛날 부산항에 해외 선박들이 야간 입항할 때 산의 불빛이 너무 아름다웠다고들 한다. 실상 그 불빛은 가난에 찌든 산동네에서 새어 나온 것이었지만, 어디서든 밤은 낮보다 너그러이 많은 것을 미화시켜 준다.
수화물 서비스(유료) 신청을 안 했기 때문에 모든 짐을 우리가 챙겨서 옮겨야 했고, 그래서 최소한의 기내식 캐리어로 떠났다. 옷도 사 입자면서 조금만 챙겼고, 혹시나 기내에 올릴 자리가 없을까 봐 제일 앞에 줄을 섰는데 다들 수화물로 붙였는지 공간은 넉넉했다. 마닐라 공항을 따라 좀 걷다 보니 경유표 체크 하는 데스크가 있었고, 여기서 도장 찍고 별도의 통로를 통해 또 다른 출국장으로 이동했다. 이제부터 우리의 계획은 이러했다. '일단 사람이 적은 새벽시간에 대기 의자에서 두 시간 잔다. 그리고 라운지로 가서 3시간 동안 좀 먹고 쉰다. 그리고 탑승 게이트로 간다.' 어쨌든 다른 자는 사람들에 섞여 우리도 자연스럽게 각자의 짐들을 배고 모로 누워 짧은 수면을 취했다. 불평 없이 축 늘어져 거지꼴로 자는 아이들을 보니 조금 미안하면서도 대견했다. 일부러 새 카드까지 발급해서 라운지 혜택을 받았는데, 호텔 대신으로 꽤 괜찮았다. 마닐라 라운지가 최악이라는 평도 있었지만, 쉴 의자 있고, 맥주/위스키/라면 무제한이니 졸음이 가시면서 살짝 들떴다. 사실 우리 가족 모두에게 인생 첫 라운지 놀이였다. 아이들은 라면을 3개씩이나 챙겨 먹었지만 불쌍해서 제지할 수가 없었다. 부모도 2개씩 먹었다. 맥주도 두어 캔 씩 마시고 알뜰히 챙겨 먹고 나가서 뿌듯했다. (참고로 세부퍼시픽은 식사 제공 안되고 신청도 안 했었다.)
다시 멜버른행 비행기를 타고나니 피곤이 몰려왔다. 8시간을 또 좁은 비행기에서 졸면서 꾸역꾸역 이동했지만 마닐라로 가던 새벽 시간 때보다는 수월했다. 계획은 ebook으로 자기 계발 관련 책 한 권을 다 읽는 것이었는데 멀미가 날 듯하여 반 밖에 못 읽었다. 그럼에도 여행의 분위기 때문에 책에 대해 깊이 몰입해서 여러 생각을 할 수 있었다. 큰 욕심 내지 말고 먼저 작은 것들을 자꾸 이루어 성공의 경험을 계속 쌓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필요한 것 같다. 일단 경유로 도착한다는 이 계획이 실현된 것만으로도 뿌듯해지니. 아이들은 노느라 별로 자지 않은 것 같았다. 좋기도 하고 힘들기도 한 비행시간을 마치고 늦은 밤, 거의 24시간을 들여 멜버른 공항에 도착했다. 숙소까지는 그랩 택시를 타고 이동했는데, 혹시나 GRAB X (기본 사양)에서 캐리어 3개가 트렁크에 안 들어가나 걱정했는데 잘만 들어갔다. 술술 풀린 것이 기분도 좋고 그랩 기사가 친절해서 이례적으로 팁까지 조금 입력해 주었다. 중심가의 살짝 외곽인 숙소는 당연하지만 다행히 문이 열려 있었다. 푹신한 침대에서 방방거리며 우리만의 짧은 축하파티 후 후딱 잠이 들었다.
★경유의 check point★
1. 비인기 관광 국가를 경유지로 활용하자.
2. 경유 공항의 라운지를 적극 이용하자.
3. 자고 싶으면 그냥 대기 의자에서 최적의 자세를 찾아 눈 붙이자.
4. 4인가족에 기내용 캐리어 3개+백팩 정도로 짐을 줄이면 기내 수납 + 그랩 탑승 모두 문제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