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문제는 나에게서 시작한다.
원치 않는 일이 연달아 계속 일어나는 것은 현상적 분석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즉 시시비비를 가리며 책임소재를 따져본다던지, 재발방지책을 세운다던지, 지식을 더 구한다던지 하는 방식으로는 나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똑같은 사건이 일종의 기출변형이 되어 또 찾아올 뿐이다. 그것은 이 세계의 사건이 나를 향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연극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복적인 사건에 대한 접근의 첫 시작은 이 한 마디다.
'모든 문제는 나에게서 시작한다.'
인생의 사건이란 그 생애의 필요에서 찾아오는 것이다. 그 일이 이 생애에서 반드시 경험하고 해소해야 할 일이라면, 이 세계가 어떤 억지를 써서라도 내 주변에 반복적으로 발생시킨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현상 그대로의 세계를 첫 번째 세계라고 하자. 그 세계를 인식하는 뇌와 정신은 그 인식으로 또 다른 두 번째 세계를 만들어낸다. 인생은 두 번째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사실은 첫 번째의 근원적 세계란 없다. 세계가 나에게 먼저 자신을 드러내었지만, 나는 이 세계를 변형시키고 가치를 투영하여 재구성했다. 그 새로운 세계를 첫 번째의 세계는 불만 없이 수용한다. 그러자 어느 세계가 먼저 시작된 세계인지 그 경계도 희미해진다. 그리고 변형된 세계는 하늘에 나의 얼굴을 담고 나에게 꼭 필요한 것, 나의 무의식이 향하는 것을 드러내어 준다.
위 '모든 문제는 나에게서 시작한다.'라는 말을 풀어보자면, 이 세계는 내 인식이 투영되어 만들어진 세계이고, 그 세계는 내 가치관과 의지가 단단히 지탱하고 있는 세계이다. 그러니 나와 이 세계는 깊이 연결되어 있고, 여기서 발생한 일은 내 안의 생각, 소망, 깨달음, 가치관 내에서 먼저 원인을 찾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꿈속의 세상과 비슷하지 않은가? 내가 무언가 나타날 것 같다고 하면 눈앞에 딱 그것이 나타나는 세계가 꿈 속이다. 그 꿈속의 세계가 내 마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실이라고 하는 이 세계도 꿈속 세계와 완전히 다른 세계가 아니다. 오늘 보고 만났던 모든 것들이 내 의식, 인식과 전혀 무관한 우연이 아니다.
우선적으로 나의 잠재된 소망을 자세히 펼쳐 분석해야 한다. 부끄러워도 가급적 적나라하게 써봐야 한다. 나는 위대한 존재가 되고 싶다. 나는 어떤 세파에도 초연한 존재가 되고 싶다.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욕구보다 어떤 경제 사정에서도 행복과 사랑을 지키는 초인이 되고 싶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세속적으로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여유로운 자금을 바탕으로 자기 주변을 넘어, 나라와 세계를 돕는 사람들이 부럽게 느껴졌다. 다만 나눠줄 수 있는 것이 돈만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지식과 지혜는 돈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것도 안다. 덧붙여 내가 진정으로 영적 성장을 한다면 단순히 세파에 초연한 수준이 아닌, 깨달음을 타인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음을 안다. 나는 모두에게 가치 있는 생각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이를 조합하면 나는 돈은 많되 돈에 초연하며, 그 돈을 꼭 필요한 곳에 분산해 주는 허브 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 셈이다. 지식과 지혜를 갖추고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흔들림 없이 밝힐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싶어 한다. 이 의지가 정확하다면, 그것이 반영된 두 번째 세계는 반드시 이 소망을 실현해 줄 것이다.
나약한 인간이 강인해지려면 적당한 시련의 무대는 필수적이다. 달아날 곳이 없는 자리에서 나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내가 감내해야 할 굴욕은 그런 이유일 것이다. 사랑의 깊이가 부족한 자에게 위태롭지만 반드시 지켜야 할 사랑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각성의 계기가 될 것이다.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감내해야 할 시간이 하루 이틀이 아닌 몇십 년쯤 된다면 마음은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그러니 나는 악역을 자처한 이들에게 오히려 감사함을 품어야 한다. 이 모든 연극과 꿈은 기저에 그 목적을 품고 있다. 무지하고 게으른 내가 지식과 지혜를 갖추려면 좋은 책, 좋은 스승이 아니라 나락에 떨어져서 스스로 바닥에서부터 기어올라오는 수고로 깨우쳐야 한다. 소위 말하는 'X 됐다.'는 아찔함과 절박함이 없이는 지혜의 정수에 굳이 도달할 필요도 갈망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지금 이런 인생이 바로 내가 바란 그대로의 인생이다.
두 번째 세계와 대화를 시도해 본다. 어차피 그가 바로 나이다. "너는 어째서 좀 좋아질 만하면 나를 괴롭히냐?"라고 물어본다. 내가 살아온 모습이 그리 못나지 않았을 텐데, 다들 나를 선하게 봐주는데, 좋은 일도 하려고 노력했는데, 오히려 복을 받아야 하지 않냐고 물어본다. 무의미한 질문이다. "원했던 복이 무엇인지 네가 알지 않느냐?"라고 두 번째 세계가, 아니 내가 반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