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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버른의 긴 여정 2. 필립 아일랜드 (+동물원)

호주 멜버른 여행

by 송고

2. 필립 아일랜드 (+동물원)


이 여행은 그레이트오션로드에서 하드 코스를 먼저 경험하고서 이틀 뒤 떠난 것이라

상대적으로 쉽게 느껴진 여정이었다.

아이들도 다시 버스 탄다는 얘기에 처음에는 기겁을 했다가

머지않아 도착한 농장과 동물원에서 어느 정도 마음이 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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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들린 젖소 농장에서는 우선 잘 생긴 소를 볼 수 있었고, 직접 생산한 우유를 살 수도 있었다.

우유는 용량이 너무 커서 대안으로 염소 우유를 한 번 사 봤다.

염소유를 입에 대는 순간을 괜찮은 맛이었는데, 넘긴 직후 뒷 맛이 너무 비렸다.

둘째는 '염소 똥 맛!'이라며 고개를 저었고, 엄마는 그 말을 듣고 아예 입을 대지 않았고,

우유 마니아인 첫째와 가장의 책임감으로 버텨본 나(아빠)만이 종일 염소 우유를 들고 다니면서 겨우 한 통을 비웠다.

내가 처음부터 밀크 아이스크림이나 먹자고 했건만...


그 이후 간 곳은 마루동물원 이란 곳이었다.

가이드가 자기가 본 동물원 중 최고라고 극찬하면서 동물원에 함께 입장해 동물 생태를 설명해 주었다.

물론 입장료는 추가 결재였지만, 돈이 아까운 정도는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좋게 본 점은, 가이드가 상품을 권하는 태도의 일관성과 진지함이었다.

'당신이 갈 곳은 정말 멋지고 대단한 곳이다.'는 느낌을 주입하는 살짝 과장이 담긴 화법은

나 같은 자영업자들이 본받을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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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딸들은 특히 웜뱃을 매우 귀여워했다.

우유를 많이 마시고 점점 통통해져 가는 첫째를 둘째가 '돼지'라고 부르면

엄마가 언니에게 상처 주지 말라며 입단속을 시켰는데, 오히려 첫째는 한 술 더 떠서

자기는 돼지라 불러주니 좋은데 멧돼지라 해주면 더 적당한 것 같다고 한다.

어느 순간 나도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첫째를 멧돼지라 부르기도 했는데,

웜뱃을 보고서 우리 좀 더 귀엽고 건전한 호칭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이제 나에게 첫째는 우리 집 웜뱃이다. 저 웜뱃도 첫째도 둘 다 아주 귀엽게 엉덩이를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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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알라는 언제 봐도 귀엽긴 하다.

가족 단위로 있었기에 아주아주 작은 새끼도 있었다.

느릿느릿 유칼립투스 잎을 따 먹는 모습이 평화로웠다.

이 여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보이는 것일까? 혹은 이 나라에 이 동물원이기 때문인 걸까?

우리 인간들은 각자 나라 복, 부모 복을 타고서 태어나지만,

코알라들도 동물의 생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호주라는 나라에 태어난 아주 복 받은 것들이라고 느꼈다.



동물원에서 좀 더 달려간 필립 아일랜드,

바로 전에 본 그레이트오션로드에 비하자면 강렬한 느낌이 덜했지만,

탁 트인 시야에 한편으로 포근한 느낌이 있었다.

펭귄들이 시각적인 것에 얼마나 민감한지 모르겠지만,

내가 펭귄이라 해도 이런 좀 편평한 느낌의 섬에 터전을 잡고 싶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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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펭귄이 700 마리 정도 해변에 왔었다니까 과연 얼마나 멋지게 해변에 나타나려나 조금 기대가 되었다.

7시 반쯤에 해는 바다 아래로 점점 가라앉고 해변은 어두워지고,

사람들은 기대감에 숨죽이면서 파도의 속에서 무엇이 나오나 집중해서 지켜보았다.

다들 배경일뿐인 갈매기 무리와 주인공 펭귄이 헷갈리지 않도록 눈을 부릅뜨고 살펴봤다.

위 시야에서 오른쪽 바위 쪽으로 펭귄이 몇 마리씩 모이기 시작했다.

파도가 한번 쓱 흩고 지나가면 그 자리에 펭귄 몇 마리가 떨구어져 있었다.

한꺼번에 몰려온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조금씩 모이면 대여섯 마리가 짝을 이루어 섬 안쪽으로 열심히 이동했다.

굉장한 장관이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조금씩 모여 떠나가는 모습도 재미있었다.

일부 펭귄은 대열에서 낙오해 관객석 쪽으로 와서 모두를 당황하게 했다.


찔끔찔끔 모이더라도 그게 계속 반복되었으니 아마 전날만큼은 찾아와서 출발한 것 같았다.

규모에서 조금은 실망스러웠지만, 오히려 아내는 많이 봤다고 생각하는 걸 보니 내가 욕심이 컸던 듯하다.

아이들은 실물로 본 펭귄보다 기념품 센터에서 산 펭귄 인형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이이들이라면 당장 펭귄의 이름을 붙여주며 친구가 될 수 있다.

내 손안에 있는 한 마리가 밖에 있는 700 마리보다 친근하고 귀할 테니.

인형 안 사주려다 사줬는데 아이들에게 그거라도 남아서 다행인 여행이라 생각한다.


5c9b0f0565c8650970c767fd8bb96568_1760286715_6732.jpg (대체 사진 이긴 한데 진짜 저런 식으로 모임.)


워낙 사람이 많아 버스까지 좀 힘들게 끼여서 돌아오는 길에

밤하늘의 별만큼은 무척이나 많이 반짝였다. 살짝 은하수도 보였다.

기대가 컷을 뿐, 자연이 좋았고 동물이 좋았고 밤하늘도 좋았고,

멀리서 작게 본 펭귄도 아이들은 좋았다고 하니, 나도 보람은 있었다.


어릴 때 별난 상황이 아닌데도 이상하게 오래동안 기억에 남아 있는 순간이 있다.

8살쯤에 아버지를 따라 계곡 캠핑을 갈 때 늦밤에 느꼈던 그 분위기, 불빛, 냄새가 아직도 기억난다.

그 의미는 모르지만 상관 없다. 기억이 남아있는 그 자체로 감사하다.

한 없이 펭귄 무리를 기다리면서 바다만 보던 마음, 초조함, 감탄, 밤하늘...

왜 내가 이 자리까지 왔어야 하는가? 그건 모르겠지만,

그 와중의 감각과 느낌만은 오래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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