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카사트와 마리 브라크몽

by 노인영
<진주 목걸이를 한 여성(1879)>

모리조와 함께 인상주의 여성 화가로는 미국 출신 메리 카사트(Mary Cassatt, 1844~1926)가 유명하다. 피츠버그 은행가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15살부터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남녀 차별 문제로 자퇴한 후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1868년부터 프랑스를 비롯하여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 등 유럽 전역을 여행하면서 과거의 거장들을 공부하다가 1874년에 파리에 정착했다. 그러나 인종 차별보다 더 깊고 지난한 역사를 지니고 있던 여성 차별은 이곳 역시 여전했다.

살롱전에서 환영받지 못한 그녀는 에드가 드가의 초청으로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하였다. 평소 “여자들은 스타일에 대한 감각이 없어서 진정한 화가가 될 능력이 없다”고 단정한 드가라는 점이 뜻밖이다. 1879년 제4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폴 고갱과 함께 처음으로 참여했다. 그룹에서 처음으로 내부 동요가 일어난 때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세잔이 탈퇴했고, 모네, 르누아르, 시슬레가 살롱과 양다리를 걸쳤다. 유일한 여성 화가였던 모리조가 임신 중이어서 불참한 관계로, 카사트의 참여는 모임에 큰 힘이 되었다. 이때 언니 리디아를 모델로 그린 <진주 목걸이를 한 여성>을 출품했다. 살롱전을 기웃거리던 이전의 태도를 버리고 인상주의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낸 작품이다.


그녀는 드가의 작품을 보면서 예술가로서 결정적인 전기를 맞았다고 고백했다. 인상파 내 거취와 관련해서도 두 사람은 행동을 공유했다. 1882년 제7회 전시회에는 다른 회원과 갈등을 일으킨 드가와 함께 불참했고, 1886년 제8회 전시회에 역시 함께 복귀했다. 회화에서도 드가로부터 받은 영향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진주 목걸이를 한 여성>은 중상류층 여성이 파리의 고급문화를 향유하는 모습이다. 기품 있는 여성이란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오페라하우스 발코니에 앉아 실내 샹들리에 조명 아래 인체의 색조 변화이다. 여성의 금발과 얼굴에 일어나는 붉은 홍조의 음영과 어깨와 가슴선 굴곡이 드러나는 가운데 진주 목걸이에 시선이 집중되는 빛 처리가 현란하다. 배경의 인물을 작게, 그리고 대충 붓질함으로써 장식적이라는 사실을 주지 시키면서 주인공 여성을 크게 확대하는 과감한 구도를 선택했다.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시선은 드가의 ‘발레 그림’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그녀가 발코니 빨간 의자에 상체를 기울여 손을 기대어 앉음으로써 발생하는 사선, 전면 대형 거울에 비친 뒷모습 절반을 자른 우연, 파격적인 구도를 채택했다. 사진처럼 표현한 이 기법도 드가에게서 발견되는 특징이다. 그리고 금발의 곡선, 복숭아색 드레스와 하얀 장갑에서 나타나는 풍부한 색조, 머리에 꽂은 붉은 꽃과 손에 든 부채의 부피감 등은 그녀가 이제 인상파에서 다시 살롱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현실을 일깨워 준다. (제목 그림은 카사트의 <오페라(1877~1878)>이다)

카사트의 <아이 씻기기(1893)>

그러나 메리가 드가와 개인적으로 엮여 있다는 흔적은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독신이었음에도 처신이 딱 부러졌다는 방증이다. 그녀는 말년에 네 차례나 수술받았지만, 1914년 백내장으로 실명한다. 그리고 1917년 역시 실명했던 드가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드가와 인연은 누가 뭐라고 해도 그녀의 인생에서 소중한 추억이었기에 그러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녀는 여성의 일상, 그중에서도 아이와 함께 있는 어머니 모습이 작품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많다. 그러나 평생 독신으로 지냈음인지 모성애 혹은 인체 표현에서 부자연스럽다는 평가를 받는다. 변론해 주자면, 본질적으로 그녀의 잘못이 아니다. 당시 여성 화가에게는 누드 데생이 허용되지 않아 인체 표현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는 여성에게 일방적인 정숙과 순결의 덕목을 요구했던 차제, 누드는 물론 남성도 제대로 그릴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술집, 카페, 매춘가의 접근이 차단되었고, 몇몇 야외 지역에 한해 남성이 동반한다는 조건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롤프 스테이더르 외, <그림 속의 여인100>) 먹고살려면, 작품이 팔려야 했다. 미국에 있는 아버지가 생활비는 보내주었으나 미술 활동과 관련한 재정 지원을 끊었기 때문이다. 모녀를 모티브로 한 작품은 그녀에게 최선이자 궁여지책이었다.


그녀는 미국 내 인상주의 미술을 전파한 장본인이다. 1884년 파산 위기에 빠진 인상주의 작품 전문 화상 뒤랑 뤼엘을 돕는 한편, 피츠버그의 은행 고위직으로 근무했던 오빠를 비롯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가난한 동료의 작품을 권했다. 1886년 4월, 뒤랑 뤼엘이 뉴욕에서 처음으로 개최한 <인상파 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바로크와 신고전주의에 편향되었던 소위 ‘식견 있는 전문가’들과는 달리 일반 관람객들은 그림을 낯설어하지 않아다. 카사트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불어 미국 화가들은 인상주의 작품으로부터 많은 기법과 영감을 얻었다. 바르비종파와 인상주의 재고 작품을 처분하여 파산 위기에서 벗어난 뒤랑 뤼엘은 이에 힘입어 아예 미국에 지점을 냈다. 오늘날 미국 내 인상주의 작품이 풍성해진 까닭이다.


메리 카사트 홍차 1879 1880.png
마리 브라크몽 오후의 홍차 1880.png
왼편 카사트의 <홍차(1879~1880)>와 마리 브라크몽의 <오후의 홍차(1880)>

참! 여성 인상주의 화가로는 대중들에게서 잊힌 마리 브라크몽(Marie Bracquemond, 1840~1916)이 존재한다. 재주는 탁월했으나 판화가인 남편 펠릭스 브라크몽의 반대로 화가의 길을 접어야 했던 불운한 여인이다. 그녀의 이름이라도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가던 발걸음을 잠시 멈춘다. 홍차를 모티브로 그린 카사트의 <홍차>와 마리의 <오후의 홍차>이다. 카사트의 작품이 좀 더 부드럽지만, 브라크몽의 붓질은 빽빽하며 야외 작품이라 그런지 인상주의 특징이 두드러진다.

강한 햇빛과 그림자의 대비, 하얀 모자에 가린 루이즈의 얼굴 윗부분과 은쟁반 위 포도와 찻잔 그림자에서 나타난 빨강, 파랑, 초록의 색채 변화가 다양하다. 그녀의 작품은 대상의 윤곽이 뚜렷하다. 신고전주의 화가 앵그르에게서 사사했기에 그를 존경했던 드가처럼 기법의 공유가 이루어졌을 수 있다. 남편 친구인 비평가 필리프 뷔르티는 그녀를 가리켜 ‘앵그르의 가장 똑똑한 제자 중 한 명’이라고 평했다. 이 작품에서도 앵그르가 전수한 소묘의 전통을 성공적으로 결합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마리 브라크몽, <세브르의 테라스에서(1880)>

그녀는 여성 인상주의 화가 카사트와 모리조와 달리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하지 못했다. 그러나 16세인 1857년 살롱전에 받아들여질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반면 화가로서의 환경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앵그르의 공방에서는 꽃과 과일 정물과 초상화만 그리게 했다. 여성 차별이었으며, 화방을 나와야 했다. 게다가 남편은 드가와 가까웠음에도 근대성, 즉 인상주의의 세계로 기울어지는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겨 자주 다퉜다. 결국, 가정의 화합을 위해 화가의 길을 포기했다. 당시 여성에게 강요했던 사회적 덕목에 순종하고 만 것이다. 안쓰러운 마음에 그녀의 대표작 <세브르의 테라스에서>를 소개한다. 인상주의 전시회 출품작으로, 인물에게 근접하여 그렸다. 색채 변화가 놀랍다. 인상주의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솜씨다. 왼편 접힌 검은 우산에 두 손을 의지한 여성이 바로 브라크몽이다. 이번 기회에 여성 인상주의 화가 중 그녀의 존재가 더 분명히 각인되리라 믿는다.


keyword
이전 10화최초의 여성 인상파 모리조와 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