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와는 달리 현대 조각의 문을 연 것은 단 한 사람,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이다. 조각에서 인상주의자란 평가를 받는 그는 ‘현대의 미켈란젤로’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독보적이다. 그러나 에콜 드 보자르('순수예술학교'라는 뜻)에서는 그를 세 번이나 거절했다. 그는 루브르 미술관에 소장된 고대 미술품을 통해 조각의 생명력을 찾았다. 극적인 동작과 빛의 반사를 이용한 새로운 조형 방식을 창출했다. 로댕은 "조각은 볼록한 부분과 오목한 부분으로 구성되며, 빛과 그림자의 유희 속에서 형태를 표현하는 미술"이라는 말로 이를 표현했다.
그의 대표작품 <발자크 상(像)>이다. 1891년 프랑스 문인협회 창시자인 에밀 졸라로부터 문학계의 거목인 오노르 드 발자크 상을 의뢰받았다. ‘3m 높이로 18개월 안에 제작한다’는 조건으로 3만 프랑에 계약했다. 하지만, 작품은 무려 7년이 소요됐다. 그는 발자크의 작품과 편지를 낱낱이 살폈다. 생전의 초상화를 수집했고, 투르에 있는 발자크 기념관을 방문했다. 그 지방 사람들의 신체적 특징, 골격, 체형을 조사했고, 단골 양복점을 찾아가 그의 정확한 몸 치수까지 파악했다.
그러나 완성된 조각품을 본 사람들은 크게 실망했다. 기품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만들다 만 것처럼 형상이 과감하게 생략되었다. 머리가 헝클어진 발자크는 목을 약간 뒤로 젖힌 채 무엇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한 방향에 시선을 두고 있다. 수도사의 옷으로 감싼 몸체는 마치 펭귄 같았다. 기존의 기념 조각상에 관한 관례를 무참하게 깨뜨렸다. ‘완성조차 안 된 작품’이라며 프랑스 문학가협회가 인수를 거부했다.
마침내 작품을 인정받았을 때는 로댕이 죽은 지 20년이 되는 1939년이 되어서였다. 라스파이 대로에서 아리스티드 마이욜(Aristide Maillol, 1861~1944)이 제막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콘스탄틴 브랑쿠시는 1952년 <로댕에 대한 경의>에서 '현대 조각의 출발점'이라고 평가했다. 이후 조각의 시대 구분은 발자크 상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
<신의 손>은 인간을 진흙에서 빚어낸 신의 손을 형상화하면서 로댕, 자기 손을 드러냈다. ‘신의 손’이 돌 속을 뚫고 솟아오른 양, 혹은 돌 속에서 끌어낸 양 생생하다. 살아있다고 해야 할까? 로댕이 돌을 완벽하게 다듬지 않고 일부러 그대로 남겨 놓은 효과이다. 돌과 조각, 자연과 인공의 일체화를 나타낸다. 그리고 양괴감(懹槐感, ‘양괴’는 <NAVER 사전>에 없는 용어로, 여기서는 ‘거친 돌덩어리’ 정도로 이해하면 무난하다)을 느낄 수 있다. <다나이드(1889?)>를 비롯해 그의 작품에서 이런 형태가 제법 많이 발견된다.
미켈란젤로가 <다비드>를 일러 대리석 덩어리에서 그냥 떼어냈을 뿐이라고 했다. 로댕은 이 작품을 통해 조각가로서 자신의 창조성을 신의 경지, 혹은 미켈란젤로와 대등해졌다고 선언한 것으로 보아야겠다. 그리고 이런 미학적 모호성과 혁신성은 동시대의 아방가르드 회화, 즉 인상주의와 맥을 같이 한다. 조각가 미켈란젤로와 마찬가지로 로댕도 인체에 관해 깊은 탐구가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평범한 사람, 여성의 관능미까지 다루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인체의 근육과 피부에 감정이 있다고 보았다. 형수 프란체스카와 시동생 파올로의 금지된 사랑을 표현한 <키스>와 아버지의 명령으로 남편을 죽인 <다나이드>의 절망적인 모습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들을 보고 로댕과 연결하여 연상되는 여인이 있다. 카미유 클로델이다. 마흔셋 로댕과 열아홉 그녀는 스승과 제자로 만났다. <칼레의 시민> 제작에 부분적으로 참여했던 그녀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로댕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기도 했다. 두 사람은 24년 차이의 나이를 극복하고 15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작품을 제작하면서 사랑을 나누었다. 작품 구석구석엔 그녀와 나누었던 격정적인 사랑의 흔적이 묻어난다.
하지만 로댕에게는 스물네 살에 만나 아들 오귀스트까지 둔 동거녀 로즈 뵈레가 있었다. 그는 여성 편력이 여전했으며, ‘들판에 핀 작은 꽃’ 클로델에게 무심했다. 그러나 클로델은 로댕이 로즈와 헤어지고 자신과 결혼하겠다는 약속을 철석같이 믿었다. ‘여성의 적(敵)은 여성’, 그녀는 로즈가 계속 로댕의 발목을 잡고 늘어져 둘 사이를 훼방한다고 여겼다. 이런 심리가 잘 반영된 작품이 바로 <성숙의 시대>이다.
악마의 모습을 한 늙은 여인이 나이 든 남자를 끌고 가고 있다. 뒤에 젊은 여성은 사내가 외면하며 잡은 두 손을 뿌리치자 무릎을 꿇고 애처로운 시선을 보낸다. 자신과 로댕 그리고 그의 동거녀 로즈의 삼각관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1892년 클로델은 낙태 수술을 했고, 1898년 로댕과 결별했다. 이 청동 조각상은 이듬해 완성한 작품으로, 로댕의 입장에선 발표를 가로막으려 한 것이 당연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이때부터 로댕이 자기 작품을 빼앗으러 올 것 같다는 망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사실 둘 사이가 사제 간이라고는 하지만, 로댕이 일방적으로 그녀를 가르쳤다고 주장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녀는 해부학에 정통했기에 로댕의 작품 활동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다. 로댕은 실제 대리석 조각에 직접 손을 대는 일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반면 클로델은 주조보다 직접 조각하는 작업 스타일을 선호했다. 따라서 로댕의 대리석 작품에서 지극히 여성적인 매력이 발견되는 이유를 클로델에게서 찾기도 한다.
로댕과 헤어진 이후 클로델은 작곡가 크로드 아실 드뷔시와 사귀었다. 그리고 <사쿤탈라>가 극찬을 받으며 1888년 ‘예술인 살롱’ 최고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때부터 작업과 관련하여 로댕과 사이에서 논쟁이 발생하고 틈이 완전히 벌어졌다. 클로델은 로댕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틀리에를 옮기고 독자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세상은 여성 조각가를 가벼이 여겼다. 자기 작품이 로댕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는 구설수, 즉 ‘로댕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작가’라는 비난이 그녀를 괴롭혔다. 1905년 첫 개인전에서 충격적인 실패를 경험하자 곧바로 좌절했다. 알코올 중독과 정신질환으로 인해 1914년 남프랑스 몽드베르그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30년간 작품 활동도 못 하고 유폐에 가까운 생활을 하다가 1943년, 79세의 나이로 비극적인 삶을 마감했다.
창작의 세계 역시 당시에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희생을 강요받던 시대였다. 한편 1917년 2월 자신의 외도를 참고 헌신해 준 로즈 뵈레가 세상을 떠나자 폭군적 예술가 로댕도 삶의 의욕을 잃었다. 병들도 지친 몸으로 37년간 작업해 오던 <지옥의 문>을 결국, 완성하지 못하고 그해 11월 아내를 따라 세상을 등졌다. 크로델의 남동생 폴의 손녀인 전기작가 레느 마리 파리스가 1984년 <카미유 클로델 1864~1943>을 출간했다. 비극적인 그녀의 삶이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면서 그녀의 작품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졌다.
로댕은 1916년 아틀리에가 국립미술관으로 바뀔 때 별도의 방 하나에 클로델의 작품을 전시하려 했다. 하지만 정부 사정으로 여의치 못했다. 그러나 지금 그 박물관에는 클로델의 작품 일부가 전시됨으로써 오히려 인파가 몰리고 생동감을 되찾았다.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그녀는 로댕의 영원한 뮤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로댕은 클로델에 대해 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제목 조각은 카미유 클로델의 작품 <오귀스트 로댕(1892)이다)
“나는 황금을 찾으려다가 그녀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녀가 바로 그 황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