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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Dec 15. 2022

초현실 같은 현실, 프리다 칼로

1938년 초현실주의의 거장 앙드레 브르통이 러시아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를 만나러 멕시코에 왔다. 이때의 만남을 계기로 <독립적인 혁명 예술을 향하여>란 선언문과 함께 새로운 독립적 예술가들의 국제 연합인 ‘FIARI(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l’Artistes Révolutionnaires Indépendents)이 탄생했다. 트로츠키는 안전을 위해 서명하지 않는 신중함을 보였으나 1940년 암살되었다. 

위프레도 람의 <정글(1943)>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그룹 내 위프레도 람(Wilfrado Lam, 1902~1982)을 통해 남아메리카의 미술에 강한 자극을 받고 있었다. 중국인 아버지와 콩고 출신 쿠바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람은 마드리드에서 파리로 도착할 때 이미 공화주의자들을 위해 싸웠던 경력의 인물이었다. 그의 정체성을 반영한 대표적인 작품이 <정글>이다. 하지만 쿠바에는 정글이 없다. 쿠바의 사탕수수밭에 아프리카 조각과 원시미술에서 영감을 받은 창조물들을 배치하여 이곳에 팔려 온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의 넋을 위로코자 함이다. 

그러나 초현실주의가 신세계 남아메리카로 전파될 수 있었던 시발점은 멕시코였다. 그곳엔 벽화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가 있었다. 그는 멕시코와 미국에서 영향력이 대단했으며, 브르통과 함께 스탈린주의와의 관계에서 교묘한 노선을 취했다. 그리고 브르통이 멕시코에 머물 때 만났던 의미 있던 화가가 바로 리베라의 아내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다. 1939년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회화의 가장 최근 경향에 관하여(<미노토르> 1939년 21월호)’란 글과 파리에서 열린 멕시코 전시회에 그녀를 포함했다. (매슈 게일, <다다와 초현실주의>) 그는 프리다를 ‘뛰어난 초현실주의 화가’라며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평가를 일축했다.


“나는 꿈을 그린 적이 없어요. 나는 나 자신의 현실을 그렸을 뿐입니다.”


프리다 칼로의 <부러진 척추(1954)>

실제 그녀의 고통은 비현실적일 만큼 잔인했다. 대표작 <부러진 척추>를 통해 그녀의 첫 번째 대형 사고를 확인해 준. 황량한 벌판에 프리다가 서 있다. 금이 간 이오니아식 기둥(척추)은 금세 무너질 것 같다. 온몸에 박힌 못은 그녀의 고통이다. 소아마비로 다리를 절던 열여덟 살 그녀가 탄 버스가 건널목에서 열차와 충돌했다. 1925년 일이다. 버스의 쇠 난간이 그녀의 하복부와 척추뼈를 관통했다. 척추 세 군데, 대퇴골과 갈비뼈, 그리고 골반이 부러졌다. 왼쪽 다리엔 열한 군데가 골절상을 입었고, 오른쪽 다리는 짓이겨졌다. 왼쪽 어깨가 빠지고 신장과 자궁은 만신창이 되었다. 심한 출혈과 하반신 마비가 뒤따랐다. 이를 시작으로 그녀의 인생에서 모두 32번의 수술을 했다. 1950년 한 해에는 무려 7번을 수술했다. 그리고 1953년, 마지막 개인전을 개최한 후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기에 이른다. 이 교통사고로 의사의 꿈 꺾였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림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초현실과 같은 자화상이 평생의 모티브가 된다. 총 140점 중 55점이 자화상이다.

 

그녀는 멕시코 공산당에 입당했고, 그곳에서 디에고 리베라를 만났다. 디에고는 화가가 되겠다는 그녀의 결심을 굳혀주었다. 그리고 스물두 살이 되던 해에 두 번째 대형 사고를 다. 스물한 살 차이 디에고와 결혼이 그것이다. 디에고로서는 세 번째 결혼으로, 그녀의 아버지는 결혼식 날 둘의 모습을 보고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혼 같다’고 했다. 디에고는 멕시코 혁명 이후 문화운동을 주도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계기로 민중혁명에 대한 뚜렷한 신념을 지녔으며 그 표현에 거리낌이 없었다. 이러한 그의 정신세계는 프리다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멕시코 4대 거장으로 손꼽히며 지금도 멕시코시티 곳곳에서 그의 대형 작품을 볼 수 있다. (제목 그림 ; 프리다 칼로, <내 마음속의 디에고(1943)>)

<몇 개의 작은 상처들(1935)>

대중의 예상과는 달리 그녀의 애정은 디에고의 그것에 비해 강렬했다. 결혼 후 인디오인 남편을 위해 헌신했다. 원주민 의상을 입고, 멕시코의 토속 생활을 실천했다. 그러나 디에고는 그림이 늘 우선이었다. 그는 방종했으며 결혼생활에 무책임했다. 그의 여성 편력은 평생 프리다를 괴롭혔다. 결국, 그는 아내의 동생 크리스티나와 불륜을 저질렀다. 그 충격과 세 번째 유산으로 인해 그녀는 1년여 아무런 작품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그녀의 그림은 위대해진다. 외면했던 자신의 상처, 디에고를 바라보는 애증에 솔직함이 나타난다. <몇 개의 작은 상처들>이 대표적이다. 신문기사에서 살인을 저지른 범인이 판사에게 말했다. “그냥 몇 번 칼로 찔렀을 뿐입니다.” 여성 편력에서 디에고가 보여준 태도가 그랬다. 그는 그냥 몇 번 여성들과 관계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액자에 낭자한 피로 덧칠한 후 자의 지문을 남겼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에게 필연적인 존재였지만, 더 이상 함께 살아갈 수는 없는 관계가 되었다. 

<두 명의 프라다(1939)>

유명한 <두 명의 프라다>가 갈라섰을 때의 심정을 잘 나타냈다. 심장이 혈관으로 연결된 두 명의 프리다가 앉아 있다. 멕시코 전통의상을 입은 우측 프리다는 손에 디에고의 사진이 담긴 메달을 쥐고 있다. 그러나 유럽풍 드레스를 차려입은 좌측 프라다가 가위로 심장으로 이어지는 혈관을 잘라낸다. 단절이다. 그해 파리의 피에르 콜르 화랑에서 전시회를 가졌고, 피카소, 칸딘스키 등 당대의 저명한 화가들로부터 극찬을 받다. 살바도르 달리는 그녀를 ‘가장 중요한 여성화가’라고 평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은 20세기 멕시코 화가 중 최초로 그녀의 그림 <자화상-액자>를 샀다. 독자적으로 일어선 것이다.

그리고 그녀도 다른 남성과 자유롭게 연애했다.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트로츠키와의 사랑이 특히 유명하다. 하지만 그녀의 허전한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때그때의 감정에 충실하던 중 이혼 1년 만인 1940년, 디에고의 54세 생일을 맞아 재결합했다. 이 점이 1970년대 불기 시작한 페미니스트 운동에서 부정적인 평가로 작용했다. 그러나 어쩌랴. 이게 프라다의 사랑인걸. 그녀는 말했다. 


“그것이 그가 사는 방식이고, 이것이 내가 그를 사랑하는 방식이다. 나는 지금의 그가 아닌 그를 사랑할 수 없다.”


그녀는 1943년 초 페기 구겐하임이 뉴욕에 새로 문을 연 금세기 미술 화랑 개관 전시회인 ‘여성작가 31인 전’에 초대되었다. 기획자 뒤샹의 추천도 있었지만, 전시회의 취지가 여성 예술가들의 독립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는 강렬한 자전적 작품을 그리는 페미니스트 화가로 인정받았다. 리베라의 벽화의 시대는 지고, 프리다의 캔버스의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하던 그녀는 폐렴이 겹쳤다. 1954년 7월 12일 일기에서 “나는 더는 고통스러운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라고 고백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녀 죽었다. 혹자는 자살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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