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아침, 어떤 선택을 두고 잠시 고민에 잠겼다. “가족과 함께 시애틀의 랜드마크 ‘스페이스 니들(Space Needle)’로 갈 것이냐?” “혼자 아트 뮤지엄(SAM)을 찾을 것이냐?” 취향 대립 문제로, 의리는 필요 없었다. 결국, 나는 미술관을 선택했다.
스페이스 니들 관광과 맞바꾼 시애틀 미술관은 세 곳으로 분리하여 운영된다. 다운 타운의 높은 건물 사이에 잠겨 있는 아트 뮤지엄과 별관인 아시안 아트 뮤지엄, 그리고 올림픽 조각 공원이다. 이중 아트 뮤지엄 건물 외벽에는 ‘Seattle Art Museum’이란 이름이 거대한 명조체 글씨로 음각되었다. 어 건물이 영원히 미술관으로 쓰일 것이라는 약속과 다름 아니다.
미술관의 규모는 지상 4층으로 작은 편이다. 하지만 관람하기도 하기 전에 나의 호감을 샀다. 원래 이곳은 입장료를 기부금 형식으로 받아왔다. 그랬던 것이 성인 1인당 33달러 정액제로 바뀌었다. 카드를 냈다. 그런데 현찰만 받는다고 한다. 적이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주변에 현금인출기가 있는 곳을 물었다. 이때 여직원 둘이 서로 수군수군하더니 표를 주며 그냥 들어가라 한다. 무료입장이다. 멀리 동양에서 온 나이 많은 사람의 진정성이 가상했던 모양이다. 미술관이 기업과 개인으로 기부로 지어졌고, 1991년 이곳으로 옮겨와서도 기부금으로 운영하면서 생긴 융통성으로 보였다.
입구에 설치된 커다란 공공조형물인 미국 작가 조나단 브롭스키(Jonathan Borofsky, 1942~)의 <해머링 맨(Hammering Man)>이 인상적이다. 튀니지의 구두수선공이 망치질하는 사진과 아버지가 들려준 거인 이야기를 결합했다. 키가 20m가 넘는 거인이 힘든 줄 모르고 망치질을 계속한다. 같은 작품이 전 세계 11곳에 있으며, 대한민국 광화문에서도 높이 22m, 무게 5t짜리 작품을 발견할 수 있다.
교육시설과 입장권 판매가 이루어지는 2층에도 존 그레이드(John Grade, 1970~)의 대형 작품 〈미들 포크(Middle Fork, 2014~2017)가 천장 아래 설치되었다. 전시관은 3층과 4층에 밀집했다. 3층은 현대 미술, 미국 미술, 중국 미술, 한국·일본 미술, 호주 미술, 미국 원주민 미술 전시실로, 4층은 유럽 미술, 고대 지중해·이슬람 미술, 아프리카 미술 상설전시실과 특별전시실로 구성되었다.
미술사적으로 시대를 가름하는 대작은 없다. 하지만 시대별·지역별로 구색을 고루 갖췄다. 부족한 부분은 특별 전시회를 기획해서 메꾼다. 그리고 만나기 어려운 작가의 작품이 있어서 매력적이었다. 르네상스 화가로는 원근법에 천착했던 피렌체의 파올로 우첼로, 베네치아에서 자유를 만끽했던 파올로 베로네세, 마르틴 루터와 친구로 비텐베르크에서 활동했던 대(大) 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들이다. 아! 한 사람 더 있다. 라틴 대륙에서 떨어진 스페인 화가 무리요다.
바로크 회화의 거장 루벤스의 <최후의 만찬(1620~21)>, 플랑드르 화가 안토니 반 다이크의 <퐁퐁 드 벨리에브르 초상(1638~39), 마티스의 풍경화 <센 강둑의 겨울 풍경(1904~05)>, 명암법에 일가견을 갖췄던 라 투르의 <성 아이린을 돌보는 성 세바스찬(1638~39)>, 사람 없는 집안 내부 자체가 모티브가 될 수 있음을 알려준 빌헬름 함메르쇠이의 <거울이 있는 실내(1907)> 역시 반가웠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작품도 많았다. 독일 화가 작품 중에 안젤름 키퍼나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아니라 여성 작가 카타리나 프리치(Katharina Fritsch, 1956~)의 조각 작품 <남자와 쥐(1991~1992)>가 흥미로웠다. 사내가 잠을 자는데, 몸 위를 검고 큰 쥐가 밟고 있다. ‘검은 낭만주의’ 전시회에서 선보였던 헨리 푸젤리의 <악몽(1781)>이 연상된다.
여성 최초의 인상주의 화가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의 작품 역시 반가웠다. 그녀는 여장부였다. 가깝게 지냈던 마네와는 달리 인상주의 전시회 참여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내부 갈등이 심했던 제4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불참함으로써 그룹 내 타격이 컸다.
임신 중인 그녀를 대신해서 출품한 여성 화가가 바로 미국의 메리 카사트다. 드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녀는 미국에 인상주의 전파를 위해 많은 애를 썼다. 도산 직전의 뒤랑 뤼엘 화랑을 도와 1886년 뉴욕에서 처음으로 <인상파 전>을 개최,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가난한 동료들의 작품을 소장토록 주위에 권유했다. 그래서 미국 내 미술관에서 인상주의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여인 군상 Ⅱ(1956)>을 뒤로 하고 마크 로스크의 <무제(1945)>에 집중하고 있는 여성 관람객에게 눈이 갔다. 1969년 4월, 제인 딜렌버거라는 여인이 로스코의 지나치게 밝은 빨강과 노랑으로 칠한 화려한 그림을 보고 몸을 벌벌 떨면서 말했다.
“누군가가 그를 잡아줘야만 해요.”
색을 통해 로스코의 자살을 예견한 것이다. 더욱이 그녀는 1967년 11월 올드 파이어 하우스 스튜디오에서 로스코의 그림을 보고 작가 앞에서 눈물을 흘렸던 경험을 지녔다. 4.5m 크기의 캔버스에 거의 검정 표면으로만 그려진 그림이었다. 지금 이 여성이 한참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는 작품 역시 글씨가 희미하게 박힌 검은색 그림이다.
미술관은 “살리시(Salish) 해안에 자리 잡았던 선주민의 땅에 세워졌다.” 워싱턴주가 인디언 땅이었다. 1851년부터 백인이 이주하기 시작했는데, ‘시애틀’이라는 지명이 1854년 인디언 대추장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사라졌던 인디언 문화에 관해 관심을 보인다. 살리시 족(族) 인디언은 북아메리카 북서부 해안 캐나다령을 포함한 지역에 거주하면서 목조 예술, 바구니 세공, 기하학적 무늬의 직물 예술에 뛰어났다.
이야기가 길어져 독자의 집중력이 흩어질 듯하다. 하고픈 이야기가 남아 있지만, ‘포슬린(PORCELAINE, 자기) 룸’과 벽면 한쪽을 가득 채운 데이브 뮬러의 <공간의 (파편), (2000~2001)> 등은 사진만으로 대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