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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Aug 28. 2023

에곤 실레와 제멜바이스의 불행

에곤 실레의 <가족>

에곤 실레의 <가족(1918)>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는 성도착적인 누드화로 유명하다. 하지만 딱딱한 선과 제한된 색으로 메마르게 표현함으로써 은밀한 부분이 노출되었음에도 관능적인 역겨움을 상쇄한다. 하지만 이 작품 <가족>은 의외로 온건하다. 이제 곧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며 그렸기에 선(線)이 부드럽고, 표정엔 행복이 충만하다. 이즈음 실레는 1918년 클림트가 세상을 떠난 이후 예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했다. 명실공히 오스트리아를 이끄는 예술가로 우뚝 선 것이다. (제목 그림; 실레의 <자라 바드 숄더가 있는 자화상(1912)>)

하지만 행복은 잠깐이었다. 그해 10월, 그의 버팀목이었던 아내 에디스 하름스는 클림트가 걸렸던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다. 배 속의 6개월 된 아기도 함께 잃었다. 그러니 작품 속 맑고 천진난만한 아이의 얼굴은 작가의 상상 속 모습이다. 불행은 묘하게 겹쳐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실레 역시 독감에 걸려 사흘 후 그녀를 뒤따랐다. 모두 그의 나이 28세 때 벌어진 일이다.

스페인 독감은 제1차 세계대전 전선에서 창궐했다. 그러나 참전국들이 사실을 숨겼고, 중립국이었던 스페인에서만 감염 상황을 보도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전 세계적으로 무려 5,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파리 파스퇴르 연구소는 적어도 2,100만 명 정도라고 집계했다) 4년간 전쟁보다 많은 숫자로, 수많은 가족이 해체되었다. 그리고 세계 기대수명을 33세에서 23세로 줄였다고 한다.



태국 왕의 총애를 받던 네덜란드 탐험가가 있었다. 그는 왕에게 유럽의 풍물과 자연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전해주었다. 하루는 “네덜란드에서 겨울이 되면, 물이 딱딱해져 그 위를 걸어 다니고, 스케이트를 타며, 심지어 마차를 탄다”고 말했다. 그러자 왕은 해도 너무 한다는 듯 그를 “사기꾼 같은 놈”이라며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 빈 종합병원에서 산부인과 의사로 일하던 헝가리 출신 이그나츠 제멜바이스(Ignaz Semmelweis, 1818~1865)가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 

그는 병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산욕열(産褥熱)과 관련된 문제로 고심했다. 산욕열은 산후 10일 이내에 38도 이상 고열을 동반하는 병이다. 지금은 발견하기 어려운 감염병으로, 19세기 초 유럽에서는 병원에서 출산한 산모 중 25~30%가 이 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빈 종합병원에는 산부인과 병동이 2개 있었다. 의사와 의대생이 아기를 받는 제1분만 병동에서는 산욕열로 인해 평균 10%대의 높은 사망률이 나타났다. 그러나 산파들이 아기를 받는 제2분만 병동에서는 4% 미만으로, 병동 간 큰 차이를 보였다. 이 사실은 대외적으로도 알려져 산모들은 제2 병동으로 가기를 간청했다.

산욕열과 성홍열을 일으키는 박테리아의 현미경 사진(위키백과)

1847년, 제멜바이스는 단서 하나를 더 발견했다. 절친한 동료 의사 야코프 콜레츠카가 검시하다가 실수로 인해 메스에 손가락을 찔렸는데, 산모와 똑같은 산욕열로 사망한 것이다. 제멜바이스는 생각했다. 


“산파는 시체를 만지지 않지만, 의사는 만진다. 그럼, 시체에 포함된 ‘어떤 물질’이 원인일 수 있다. 그것이 체내에 들어가자, 산욕열을 일으켰다.” 


세균을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없었던 시대에 매우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그는 자신의 가설을 확인해야 했다. 제1분만 병동 의사들에게 아이를 받을 때 염화칼슘액으로 손을 씻도록 지시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1847년 4월 18.3%에 달하던 사망률이 4개월 만에 1.9%로 떨어졌다.

하지만 의사에게 책임을 묻는 매우 위험한 주장이었다. 빈에 있는 주류의 다른 의사들로부터 심한 조롱과 저항을 받았고, 제멜바이스는 해고되었다. 고향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이주해야 했던 그는 분노 속에서 자신을 내몬 그들을 ‘무책임한 살인자’라고 비난했다. 자기 아내에게조차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은 그는 1865년 정신병원으로 보내져 수용된 지 14일 만에 구타로 숨졌다. 그의 나이 마흔일곱 살밖에 안 되었는데··· 당시에는 발효와 우유나 고기가 상하는 현상을 미생물과 연관 짓지 못했다. 전염병의 원인도 마찬가지다. 말라리아는 늪지대에서 방출되는 어떤 ‘독기’에 의해 감염된다고 믿었다. 흑사병은 불길한 별자리, 혜성, 신의 분노, 혹은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풀어서 발생한 것이라고 여겼다.

 

현미경이 사물을 크게 보이게 한다는 점에서 망원경과 기능이 동일하다. 다만 망원경과 달리 아주 가까이 있는 물체를 확대시키도록 렌즈가 배열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일안(single-lens) 확대경은 진작부터 존재했다. 그러다가 1590년에 암스테르담의 렌즈 연마공 자카리아스 얀센(Jacharias Janssen)이 복합 현미경을 개발했다. 17세기 네덜란드 아마추어 과학자 안토니 반 레벤후크(Antoni van Leeuwenhoek, 1632~1723)가 배율이 높은 렌즈를 개발했고, 이를 이용하여 고여 있는 물에서 원생동물을 최초로 발견했다. 그러나 그는 이 극미 동물과 말라리아와 연관 관계를 몰랐으며, 부패한 고기나 야채에서 저절로 생긴다고 생각했다.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제멜바이스의 경우는 50년 전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 1749~1823)의 상황과 비교할 때 지나치게 불운했다. 1796년 제너가 감염된 소의 고름을 이용해 천연두 백신을 개발했지만, 질병을 일으키는 물질이 무엇인지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도 찬반 논란이 심했다. 하지 영국에서는 우두 접종이 이루어졌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의회에서 상금 3만 파운드를 받았다. 제멜바이스가 죽은 지 1년 후 파스퇴르가 세균의 존재를 증명했다. 그리고 '세균학의 아버지' 로베르트 코흐(Robert Koch, 1843~1910)가 1882년 결핵균을 발견함으로써 그의 가설은 인정받았다. 그러나 비참하게 무너진 그의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는 없었다. 오늘날에 와서야 제멜바이스는 현대 소독법의 선구자로 인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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