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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Sep 11. 2023

흑사병과 세균, 그리고 바이러스

<성 세바스티아나누스>와 <흑사병>

<성 세바스티아나누스(1480)>와 <흑사병(1898)>

페스트와 관련된 두 작품 <성 세바스티아나누스>와 <흑사병>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가 그린 <성 세바스티아나누스>가 흑사병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낯설다. 세바스티아누스는 3세기 로마의 군인, 즉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경호원이었다. 그는 신분적 특권을 이용하여 옥에 갇힌 기독교 신자를 보살핀 혐의로 궁살형에 처했다. 그러나 아홉 발의 화살 모두 급소를 빗나갔고,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하지만 황제의 명에 의해 결국, 몽둥이에 맞아 숨졌다. 페스트에 걸리면, 심한 괴사로 발목 부위에 반점이 생긴다. 그런데 그 모양이 화살처럼 생겼다. 페스트가 신이 분노하여 쏜 화살 때문이라는 믿음이 싹텄을 때 자연스럽게 이로부터 죽음에서 벗어난 성 세바스티아누스로 연결되었다. 

19세기 스위스의 상징주의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Arnold Böcklin, 1827~1901)이 죽기 3년 전에 그린 <흑사병>은 그럴듯하다. 피부색까지 검은 악마가 날개 달린 짐승 등을 올라탄 채 하늘을 날고 있다. 페스트의 의인화다. 박쥐 날개와 함께 표현된 꼬리가 마치 1차 숙주인 쥐의 것을 닮았다. 아래 흰옷을 입은 신부와 그 위로 쓰러진 붉은색 옷을 입은 여인의 죽음이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놈은 남녀도, 노소도 가리지 않고 사납게 낫질을 해댄다. 중세 도시가 금세 잿빛 폐허로 변했다. 사람들이 죽어 나뒹굴고, 일부는 영문도 모른 채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려 한다. 그러나 힘에 부쳐 몸을 가누지 못하고 맥없이 쓰러진다. 질병으로 인한 참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뵈클린에게는 모두 14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8명이 어릴 때 사망했다. 흑사병, 콜레라, 티푸스 등 전염병으로 인한 불행이었다. 이런 개인사가 그에게 평생 ‘죽음’에 천착토록 했을지 모른다. 



1346년~1350년 페스트 발생 초기, 유럽의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인구의 25% 이상이 사라졌고, 감염자들의 평균 치사율이 60~70%가 됐다. 정치, 경제적으로 대변혁을 초래했다. 토마스 아퀴나스 시대의 특징이었던 합리주의적 신학에 대한 믿음이 처참히 무너졌다. 여기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비겁한 행동도 한몫했으며, 훗날 루터의 종교 개혁이 성공하는 원인 중 하나로 작동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개인적인 형태로 신과 교류하려는 신비주의가 유행했다. 

채찍질하는 고행파와 함께 성 세바스티아누스가 페스트의 수호성인이 된 것도 이때쯤이다. 그리고 부적처럼 그의 상징물은 판화, 그림, 조각 등으로 급격히 유포되었다. 흑사병은 쥐에 기생하는 벼룩에 의해 단세포 원생생물인 페스트균이 옮겨져 발생하는 급성 열성 감염병이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으려 했던 인간의 불신이 상황을 키웠다. 이후 광학기술이 발전하여 현미경을 통해 보여주자 비로소 그 실체를 인정했다. 


그러나 절대다수의 세균이 인간의 친절한 이웃이며 조력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1922년 어느 날 영국의 세균학자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 1881~1955)은 마이크로쿠스 리소데익티쿠스라는 세균이 그의 콧물에 의해 분해되는 것을 발견했다. 살균 효과가 있는 효소 리소자임 때문이다. 연구를 계속하던 그는 1928년 여름 실험실 배양접시에서 맹독성 화농균인 포도상구균이 파괴된 것을 발견했다. 잘 알려진 대로 푸른곰팡이 작용 때문이다. 따라서 곰팡이가 사용하는 무기로 페니실린을 만든 것이다. 페니실린은 인간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세균이 세포벽을 만들지 못하게 차단한다. 미생물 세계의 다양성이 만들어낸 기적이다. 이렇게 병을 약으로 다스리는 화학요법과 백신은 질병 치료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세균과 성격이 다른 바이러스를 살아 있는 생명체로 볼 것인지 여부는 모호하다. 세균은 동물 이전의 생물이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생물도, 무생물도 아닌 어떤 것이다. 바이러스는 정확히 언제,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불분명하다. 38억 년 전 지구 위 모든 생명체의 마지막 공통 조상이 살았을 때부터 이미 존재했으리라 추정한다*. 세균은 의식과 지각이 없다. 그러나 유전자를 가진 단세포 미생물로 발전하면서 스스로 발육·성장·번식했다. 반면 바이러스는 세균만 못하다. 아주 작은 단백질 덩어리로 자기 복제 기능을 갖추었지만, 스스로 번식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바이러스는 생존과 번식이란 측면에서 지구상에서 가장 성공한 존재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세균과 바이러스는 둘 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크기에 있어서 바이러스는 세균의 1/100 내지 1/1000 정도의 나노미터(nm. 100만 분의 1mm) 단위다. 세균과 달리 세포 침입이 가능하다. 그것도 매우 영악한 방법을 동원한다. 숙주세포에 거짓 유전자 정보를 제공하면, 숙주세포는 자기 유전자인 줄 알고 바이러스의 번식을 돕는다. 게다가 대사 작용을 하지 않아 노폐물을 통한 화학물질을 배출하지 않기에 우리 몸의 면역계가 감지하기 어렵다. 증식 속도 역시 폭발적이다. 단 1개의 바이러스가 하루 만에 1만 개가 되기도 한다. 그중 돌연변이의 종류 역시 다양하여 하나의 종이 생존할 확률이 매우 높다. 그래서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바이러스가 있다.


그중 200여 종의 병원성 바이러스의 대다수가 호흡기 점막을 통해 우리 몸으로 출입한다. 재채기할 때마다 수천~수백만 마리의 바이러스가 세균과 함께 몸 밖으로 튀어나오고, 그중 가벼운 것은 공중을 떠돌아다닌다. 그러다가 수동적이며 우연에 의해 감염시킬 대상을 만난다. 결과적으로 세균은 항생제로 치료가 가능하지만, 바이러스는 백신이 나오기 전까지 약이 없다. 온전히 자가 면역력으로만 이겨내야 한다. 1977년, 마지막 환자를 끝으로 천연두 백신이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천연두는 백신으로 정복한 유일한 질병일 뿐이다. 

다행히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믿음이 생겨나자, 속수무책이었던 질병에 대한 대처가 빠르게 발전했다. 먼저 청결과 공중위생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유념해야 할 점은 아직 작은 존재를 대하는 인간의 태도가 전근대적이라는 사실이다. 생물은 오직 식물과 동물 두 종류로 규정한다. 역설적으로 진화에서 진정한 다양성은 오히려 작은 규모에서 존재한다. 병원성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어떤 면에서는 오만한 인간에게 겸손을 가르쳐 주는지 모른다. 인간의 장 속에만 3kg 정도의 세균이 돌아다닌다. 뇌의 딱 두 배 무게다. 권하건대 외출했다 귀가하면 반드시 손을 씻고, 재채기나 기침이 나올 때 코와 입을 급히 소매에 갖다 대는 에티켓을 갖추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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