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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Sep 15. 2023

실재와 허상; <이미지의 배반>과 볼츠만의 불행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1929)>

‘실재(實在)와 허상’은 철학적 주제다. 회화에서는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이 대표적이다. 작가는 사진을 보고 파이프를 그렸다. 어차피 이미지인데 굳이 실제 파이프를 보고 그릴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것도 모자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글을 써서 다시 한번 실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파이프의 본질은 담배를 피우는 데 있다. 그러니 이미지로서 파이프는 허상일 뿐이다. 

인간은 언어로 소통한다. 하지만 의미 전달에서 불완전하다.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자들을 향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외친 것이 이와 같은 맥락이다. 시각언어 미술은 언어의 한계를 보완해 준다. 그러나 이 역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긴 마찬가지다. 본질을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하며, 왜곡될 우려가 다분하다. 종교 전쟁 당시 성상 파괴 운동도 교회 내 그림과 조각이 우상 숭배를 조장한다고 생각했기에 저질러졌다. (제목 사진; 르네 마그리트의 <꿈의 열쇠(1927)>, 이 역시 언어와 관련된 그림이다)



과학자 중에 실재 문제로 가장 고통받았던 인물이 바로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n, 1844~1906)이다. 열역학은 18세기 산업 혁명 이후 증기기관의 효용성을 설명하기 위해 탄생했다. 열과 역학적 일의 관계를 에너지 흐름으로 밝혔다. 볼츠만은 온도라는 것이 단순히 뜨겁고 찬 것이 아니라, 계(系, system)에 속한 분자들의 운동 에너지 합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기체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분자를 구성하는 개별적 존재 ‘원자’를 실체화해야 했다. 원자의 근거가 모호한 존재였던 시기에 볼츠만이 원자론을 과감하게 받아들여 가설을 제기한 것이다. 이로써 과학자에게 상상력을 요구하면서 ‘가설은 과감하되, 검증은 엄격하라’는 교훈이 탄생했다. 이 자체만으로도 그는 이미 과학계에 크게 이바지했다. 흑체 공식을 찾아낼 때 빚을 졌다고 생각한 막스 플랑크 두 번(1905, 1906년)이나 볼츠만을 노벨상 후보로 추천했다. 

그러나 그의 추천은 너무 늦었다. 원자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으로 인해 볼츠만은 그만 가위눌렸다. ‘관측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실증주의 에른스트 마흐와 그의 추종자들의 비판은 모질었다. 천박한 인신공격은 물론, 학술지로부터 논문이 거절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한 그는 휴가 중인 1906년 9월 5일, 트리에스테 근처 두이노에서 아내와 딸들이 수영하는 동안 스스로 목을 맸다. 그의 내성적인 성격과 우울증도 한몫했으리라 추정한다. 안타까운 일은 1년 전 아인슈타인이 이미 원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논문을 발표했다는 사실이다. 


1827년 영국의 식물학자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 1773~1858)은 현미경을 통해 꽃가루에서 나온 작은 입자가 수면 위를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브라운은 처음에 화분(花粉, 꽃의 수술에서 형성되는 세포)이 생명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브라운 운동이 물분자와 단 한 번의 충돌이 아니라 많은 수의 충돌에 의해 꽃가루가 움직인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물 분자의 평균적인 움직임에는 불규칙한 통계적 요동이 있으리라 추정했다. 1905년 <열 분자운동 이론이 필요한, 정지 상태의 액체 속에 떠 있는 작은 부유입자들의 운동에 관하여>를 발표했다. 원자의 실재를 입증하는 결정적인 돌파구였다. 

같은 해 아인슈타인은 플랑크의 양자화 개념과 에너지 보전 법칙을 이용하여 광전효과를 발표했다. 빛을 받은 물체에서 방출되는 원자보다 더 작은 존재, 즉 전자(광전자)의 운동 에너지를 수학적으로 기술했다. 빛의 입자성을 증명하는 논리이며, 1921년 그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러니 볼츠만이 조금만 견뎠어도 극단적인 일은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는 원자의 실체가 어둠에 갇혀 있던 마지막 세대를 살다가 서둘러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실재를 바꾸어 말하면, 이데아로써 본질 혹은 변하지 않는 진리라 할 수 있겠다. 그럼, 자연철학에서 진화한 과학도 본질을 추구할까? 아니다. 진리에 가깝게 다가가려 하지만, 언제든 틀릴 가능성을 열어놓았기에 감히 그리 말하진 못한다. 하지만 과학자 공히 진리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이론으로 ‘엔트로피 제2 법칙’이라고 입을 모은다. 앞서 찰스 퍼시 스노가 강연에서 참석자에게 “설명할 수 있느냐?”고 물었던 그 이론으로, 볼츠만이 수학적 확률로 설파했다. 

열역학 제1 법칙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다. 그러나 열이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로만 흐른다는 사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이론이 제2 법칙이며, ‘엔트로피(entropy, 무질서도)의 총량은 항상 증가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독일 이론물리학자 클라우지우스(Rudolf Julius Emanuel Clausius, 1822~1888)가 불완전하지만, 최초로 개념을 정립했다. 예를 들어 카드 게임을 할 때 처음엔 카드가 일정 순서대로 배열되었다. 하지만 게임이 시작되어 카드가 섞이면, 최초의 질서 상태로 돌아갈 확률은 지극히 낮다. 순서가 섞이는 경우는 엄청나게 많지만, 순서가 모두 맞는 경우는 단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전물리학에서는 이론상 깨진 유리잔도 되돌릴 수 있다. 그러나 고물상에 토네이도가 몰아쳐 비행기가 만들어지고, 뾰족한 바늘 위에 천사가 앉을 확률이다. 시간 여행도 마찬가지다. 시위를 떠난 시간 화살은 주어진 질서라는 확률 낮은 상태에서 질서 해체라는 확률 높은 상태로 진행한다. 되돌릴 수 없다는 뜻이며, 우주에 존재하는 에너지와 물질이 이 법칙을 따른다. 바닷가에 쌓은 모래성도, 인간도, 그리고 우주도 언젠가는 같은 결말을 맞이한다. 


한편 확률은 경우의 수가 많아지면서 도입되었다. 고전 역학에서는 ‘초기 조건을 알면,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결정론이 핵심이다. 동전의 앞·뒷면, 윷놀이에서 ‘모’가 나올 확률 계산은 얼핏 간단해 보인다. 하지만 던지는 사람과 상황 등 초기 조건에 따라 변수가 복잡해진다. 분석 도구로써 확률과 통계가 등장했으며, 도박과 연금보험 등에 적용했다. 

그러나 통계 열역학에서 확률은 표본이 많아도 너무 많다. 기체를 생각해 보자. 1㎤ 공간에 2,500경 개의 공기 분자가 있고, 그것들이 그 안에서 초당 수백 미터의 속도로 충돌한다. 언제 어떻게 분자의 개별 움직임을 추적하여 미래를 예측하겠는가? 분자보다는 구름, 물과 얼음 등 전체의 움직임으로 관심을 전환했다. 일기예보를 예로 들 수 있다. 따라서 축구공처럼 닫힌계라면 금상첨화다. 맥스웰이 통계적 방법을 생각해 냈고, 볼츠만이 역학 체계를 완성했다. 이렇게 물리학과 수학을 결합했다. 하지만 근저에는 고전물리학의 논리가 여전히 존재했다. 

그러나 이후 미세한 양자의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확률은 결이 다르다. 경우의 수 증가 때문이 아니라 양자가 지닌 불확정성 때문에 생겼다. 결과적으로 과학사에서는 고전 물리학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양자 물리학의 시대로 접어드는 계기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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