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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Nov 05. 2021

헨리 8세의 결혼과 홀바인의 초상화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앤 블린(엘리자베스 1세의 모친)을 처형하고 열흘 후 세 번째 왕비가 되는 제인 시모어(홀바인 작, 제목 초상화, 1536)와 결혼했다. 궁녀 출신이며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녀는 매사에 신중했다. 검소하고 침착하게, 그리고 조용히 왕을 도왔다. 맏딸 메리와 헨리의 화해를 도모하기도 했다. 1537년 10월 12일 드디어 그녀가 튜더 왕조를 이을 적자(훗날 에드워드 6세)를 낳았다. 그러나 산욕열에서 회복되지 못한 채 아이를 낳고 12일 후 사망했다. 그러자 재상 토머스 크롬웰은 즉각 유럽 각국에 파견된 공사들에게 홀로 된 왕의 배필을 은밀히 물색해 보라는 훈령을 내렸다. 

<덴마크의 크리스티나(1538)>

네덜란드 브뤼셀의 영국 공사 존 허튼은 후보 네 명을 찾아내 크롬웰에게 보고하면서, 밀라노의 공작부인 크리스티나를 추천했다. 크리스티나는 일단 가문이 막강하다.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에서 왕이었다가 물러난 크리스티앙 2세가 아버지고, 고모 마리가 부르고뉴와 네덜란드 섭정이다. 결정적으로 마리의 오빠, 즉 크리스티나의 삼촌이 바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다. 

그녀는 11살에 밀라노 공작인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에게 시집왔다. 스포르차는 유명한 루도비코의 아들로 당시 신성로마제국에 망명 중이었는데, 카를 5세가 밀라노를 프랑스로부터 탈환하여 돌려주었다. 그러나 2년 후인 1535년 스포르차가 후계자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 영국 입장에서는 크리스티나와 결혼이 성사되면, 적대적인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의 동맹을 흔들어 놓을 좋을 기회였다. 존 허튼은 여기에 크리스티나의 미모가 뛰어나며, 특히 보조개가 아름답다고 덧붙였다. 헨리는 1538년 3월 초 외교관 필립 호비와 함께 한스 홀바인을 네덜란드 궁정으로 보냈다.

 

당시 왕들은 배우자를 고를 때 전적으로 초상화에 의존했다. 홀바인에게 주어진 시간은 3시간, 그러나 검은 상복(喪服) 차림에서 드러낸 얼굴과 손만으로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확인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살짝 몸을 돌렸지만, 꼭 다문 입술과 정면을 응시한 그녀에게서 당당함이 풍긴다. 얼굴과 장갑을 쥔 두 손은 꾸밈이 없다. 장식물은 왼손 약지에 낀 루비 반지가 유일하다. 46세의 헨리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러나 1538년 교황의 중재로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사이에 10년 휴전 협약이 추진되고, 가톨릭 동맹이 맺어질 조짐을 보였다. 이 말은 크리스티나와의 결혼이 물 건너갔다는 의미이다. 물론 결혼이 성사되지 않은 데는 헨리 8세의 여성 편력과 첫 번째 아내 캐서린과 이혼한 문제가 걸림돌로 작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세계사적으로 유명한 사건으로, 헨리 8세는 교황과 가톨릭 국가 에스파냐(아라곤)와 척을 지면서까지 앤 블린과 결혼을 강행했었다. 

<클레베스의 안네(1539)>

영국은 방어를 강화하면서 헨리 8세의 새로운 왕비 감을 물색했다. 클레베스 공국의 안네가 떠올랐다. 존 허튼이 1537년 첫 추천 시 “몸매나 미모에 대해 칭송을 들은 바 없습니다”라고 썼던 후보였다. 신교를 믿는 클레베스 공국은 라인란트 하류에 있는 작은 독일 공국이다.  아버지 요한 공작이 죽은 후 아들 빌헬름이 뒤를 이어 즉위했는데, 누이 안네와 아멜리아가 있었다. 누구든 결혼이 성사되면, 영국은 가톨릭 세력인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에 맞서 독일 공국과 동맹을 추구해볼 만했다. 왕은 또다시 홀바인을 출장 보냈다. 헨리는 생기가 넘치고 금빛 자수 드레스를 입은 스물두 살의 안네 클레베스를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러나 앞서 눈여겨보았던 크리스티나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안네는 눈길을 아래로 주면서, 손을 다소곳이 모은 조신한 모습이다. 하지만, 화려하다. 황금색과 붉은색이 어우러진 옷차림과 반지와 목걸이로 한껏 치장했다. 옆에서 크롬웰이 피부가 맑은 안네를 가리켜 왕에게 귀띔했다. ‘황금빛 태양이 은빛 달의 아름다움을 넘어서듯’ 크리스티나의 아름다움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보고받았다고. 당연히 결혼은 성공적으로 타결되었다. 1539년 12월 안네는 결혼을 위해 런던으로 향했다. 성마른 헨리는 가만히 기다리질 못했다. 신분을 숨기고 그녀가 쉬고 있는 로체스터 수도원을 찾아갔다.

<헨리 8세의 초상(1535)>

하지만 안네의 모습을 직접 확인한 헨리 8세는 크게 실망했다. 런던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홀바인의 그림 속 여인은 간데없고, 긴 코와 천연두 자국으로 얽힌 안네의 얼굴을 확인했다. 왕은 '플랑드르의 암말'이라고 부르며 혐오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되돌릴 수 없는 결혼이었다. 1540년 1월 6일 결혼식에서 왕은 애써 점잖게 처신했다. 그리고 초야도 치르지 않은 왕은 6개월을 참다가 결국, 7월 9일 혼인을 무효로 했다. 이혼 결정의 배경에는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와 프랑스 프랑수아 1세간 대립이 다시 격화됨으로써 외부 위협이 사라진 것도 한몫했다. 

같은 달, 재상 토머스 크롬웰이 체포되어 런던탑에 투옥되었다. 그리고 반발할 틈도 없이 7월 28일 참형에 처했다. 죄목은 ‘반역 혐의’였다. 궁정화가 한스 홀바인은 천만다행으로 헨리의 칼날을 비껴갔다. 그의 정직함을 알고 있던 헨리가 결혼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홀바인은 더 이상 왕실의 작품 의뢰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급료(1536년에는 연봉 30파운드였다)는 죽을 때까지 받았다. 연약한 예술가에게는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헨리 8세는 욕심이 많았다. 그의 초상화에서 경계를 늦추지 않는 독특한 눈이 이를 잘 표현한다. 그는 결혼을 정략적 수단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예쁜 여성과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었다. 이후 두 번 더, 모두 여섯 차례 결혼했다. 상대방 왕비의 입장에서 보면, 목숨을 건 결혼이었으리라. 한편,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첫 번째 후보자 밀라노 공작부인 크리스티나는 1541년 로렌과 바(Bar)의 공작과 재혼하지만, 4년 만에 또 사별했다. 그러나 당시 살벌한 정략결혼으로부터 자유로워졌기 때문일까? 그녀는 68세까지 장수했다고 한다. 

헨리의 결혼 과정 전반을 들여다보면, 그 배경이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 그의 맹목적인 사랑 혹은 여성 편력 그리고 후사를 보려는 욕심, 어느 한 가지 측면으로 섣불리 결론 짓기가 어렵다. 복잡한 정치, 경제적 계산이 깔려 있음이 분명하다. 크롬웰을 죽인 것은 차치하고 앤 블린과 결혼을 위해 종교를 바꾸었다는 지적은 매우 단선적이다. 그녀의 딸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잉들랜드를 세계 1등 강국으로 우뚝 서게 한 기반에는 교회 재산을 국유화한 아버지 헨리 8세의 선택도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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