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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Oct 29. 2021

독일 르네상스 회화의 완성자, 뒤러

<여우 코트를 입은 자화상(1500)>

독일 르네상스 회화의 완성자,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Düre, 1471년~1528년)의 <여우 코트를 입은 자화상(1500)>이다. 최초의 독자적인 자화상이라 하지만, 얀 반 에이크의 <붉은 터번을 두른 남자(1433)>와 다툼의 소지가 있다. 어쨌든 작품은 그가 현존할 때 제작한 세 번째이자 마지막 유화 자화상이다. 그간 중세의 예술가들은 무명의 장인으로 취급되었다. 피렌체의 화가 베노초 고촐리는 <동방박사의 행렬(1460)>에 자신의 모습을 서명처럼 끼워 넣었다. 그리고 40년이 지나 북유럽 미술계에서 홀대받고 있던 작가의 온전한 자화상이 음 등장하기 시작했다. 

스물여덟 살 뒤러는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며 보는 이에게 존재감을 강렬하게 과시한다. 자신을 가리키는 오른손은 그리스도가 엄숙하게 축복을 내리는 제스처와 닮았다. 왼편에 A와 D를 조합한 서명이 보인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약자이다. 또한 AD는 ‘Anno Domini’라는 라틴어로 '그리스도의 해' 서력기원을 의미한다. 그 위 ‘1500’과 합쳐져 서기 1500년을 뜻한다. 밀레니엄의 절반이 되는 해로, 당시 유럽에서 유행한 종말론을 염두에 두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동판화가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Marcantonio Raimonde, 1475~1534?)가 자신의 판화를 복제하면서 이 서명까지 사용함으로써 미술사 최초로 저작권 소송이 발생했다. 이런 점까지 고려하면, 뒤러는 화가로서 자부감이 누구보다도 각별했음을 알 수 있다. 

 

오른편 라틴어 네 문장이 중요하다. "그리하여 나 뉘른베르크의 알브레히트 뒤러는 28살 나이에 지워지지 않는 물감으로 내 모습을 원래 혈색 그대로 그렸다"라고 썼다. ‘내 모습 그대로’라 함은 거울을 보고 초상화를 그렸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1500년경 거울이란 크기도 작고 불룩한 형태밖에 없었다. 베네치아 앞바다에서 유리 공예로 유명한 무라노의 장인들도 1516년에야 첫 평판 유리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여우 모피와 긴 곱슬머리 하나하나를 세필 작업했다. 그곳에서 발달한 광학렌즈, 돋보기가 도와준 결과이나 당시 북유럽 화가들은 자연을 거울에 비춘 것처럼 충실히 재현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다. 또한 '원래 혈색 그대로'라는 말은 당시 열악한 물감 형편상 회화에서 색채를 제대로 구현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강조한다. 이마가 실제보다 넓고,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던 고수머리 타래를 화려하게 치장했다. 또한 정면 자세의 대칭성이 완벽하다. 이 완전성은 그가 화가로서의 지위에 대한 고민과 나르시시즘이 엿보인다. 예술가가 신의 영감을 옮겨왔다는 의미일 수 있다. 오만이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심오함이다. '화가란 교양 있는 신사이자 학자이어야 한다'고 강조한 그의 강렬한 자의식을 반영했다. 

 

그럼에도 뒤러는 자신의 그림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미켈란젤로와 동시대에 활동한 그는 사실적인 재현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뭔가 2% 부족했다. 1494년 뉘른베르크에 창궐한 페스트를 피할 겸 그해 가을부터 1495년 봄까지 10만 인구의 도시 베네치아에 머문다. 1500년경 뉘른베르크 주민 수가 대략 4만 5,000명 정도였으며,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이보다 더 큰 도시라고는 6만 명 정도의 퀼른뿐이었다. 16세기 중반 메트로 폴리스였던 베네치아 인구가 창녀와 코르티자나(고급 창녀) 1,000명을 포함하여 약 17만 5,000명쯤 되었으니 그 규모를 간접 비교할 수 있겠다. (노르베르트 볼프의 <알브레히트 뒤러>) 

<죽은 그리스도를 애도함(1500~1503)>

뒤러는 당시 64세쯤 되었을 조반니 벨리니와 친분을 맺었다. 베네치아 화풍을 세운 그의 제단화 색채에서 큰 영향을 받고 뉘른베르크로 돌아와 <죽은 그리스도를 애도함>을 그렸다. 1505년부터 1507년 2월까지 다시 베네치아에 머무르면서 연구를 계속했다. 데생 솜씨를 비롯해 절정의 역량을 갖추었음에도 그는 르네상스의 이상적이면서 자연스러운 미를 창조하고자 노력했다. 

뒤러는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와서도 조화와 비례를 연구했다. 그의 수학적 접근과 다양한 지적 호기심은 르네상스 인간형의 대표자인 다 빈치와 비교된다. '북유럽의 레오나르도'라 불렸다. 그는 베네치아 회화에서 받은 자극을 북유럽 사실주의에 접목했다. 작품 목록으로는 1,200점이 넘는 소묘, 34점의 수채화, 108점의 동판화와 에칭, 246점의 목판화, 188점의 회화가 포함된 방대한 규모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당시 지도에 없던, 즉 통일 이전 독일의 미술이 국제고딕 양식의 강력한 영향력을 극복하고 르네상스로 가는 동력을 제공했다. 독일인은 지금도 1500년 무렵을 '뒤러의 시대'라며 떠받든다.


뒤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파움가르트너 제대화(1502년경)>를 비롯해 <장미화관 축제(1506, 제목 그림 참조)>, <동방박사들의 경배(1504)>, <만인의 순교(1508)>를 그렸다. 종교 개혁이 시작되고 나서 뒤러의 종교적 입장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총대리이자 루터의 친구이며 조언자였던 요한 폰 슈타우피츠의 설교에 영향받은 바가 크다. 또한 뉘른베르크에서 진행되던 개신교 운동에 온건한 입장에서 공감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군중에게는 개개인이 어쩌지 못하는 군중의 심리가 따로 있다. 뒤러의 제자와 지인 다수가 1524년 급진적인 움직임에 휩쓸렸고, 이듬해 1월 그중 세 명이 처형당했다. 유명한 ‘신 없는 화가들’의 처형이다. 

황제에게만 복종하는 도시 뉘른베르크는 1525년 루터교로 공식 개종했다. 다행스럽게 시의회는 급진적인 신조나 우상숭배에 관한 과다한 반응을 자제했다. 루터는 성인과 성물에 대한 대중적 신앙을 비난하면서 종교 예술 작품을 의혹의 눈으로 보았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러나 그는 성상이나 종교화를 파괴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 심지어 일부 주제, 특히 은유적이거나 구약에 나오는 주제들을 교육적이고 모방할 가치가 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특히 학자이며 성서 번역자인 성 히에로니무스와 성모의 어머니인 성 안나의 숭배에 대해서는 너그러웠다. 광부의 아들인 루터였기에 광부의 수호성인 성 안나에 대한 호의였을 수 있다. (노르베르트 볼프, <알브레히트 뒤러>) 


<네 사도(1526)>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뒤러는 잠복성 말라리아에 걸린 몸으로 <네 사도>를 완성했다. 루터가 교황청을 향해 포문을 연 지 9년째이자, 인문사상과 가정적인 신앙이 강성한 지역 뉘른베르크가 루터교로 개종한 다음 해 제작된 작품이다. 왼쪽 패널에는 강렬한 붉은색 망토를 입은 젊은 요한이 손에 들고 있는 책을 펼쳐 놓고 머리 숙여 읽고 있다. 침울한 표정으로 열쇠를 쥔 베드로에게 성서를 내밀어 보여준다. 오른편 패널의 전경은 사도 바울의 차지다. 날 선 검과 함께 성경을 들고 있는 그의 눈에서 광채가 난다. 그 뒤 복음사가 마가가 두루마리를 손에 쥐었으며, 눈에 흰자위가 보인다. 어쩐지 불안정하다.

의미 있는 인물 배치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나름 그 의미를 해석하려 하였다. 그러나 얕은 지식으로는 몹시 위험한 일이다. 다만 루터의 선언을 상기시키고자 작품에 임한 점은 분명하다. 루터는 획기적인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서문에 <요한복음>, <사도행전>, ‘요한과 베드로의 서간’이 성서의 핵심’이라고 했다. 뒤러는 네덜란드 여행길인 1521년 3월 21일 루터가 죽었다는 오보를 접하고 감동적인 애도의 글을 썼다.


“지난 140년 동안 그 누구보다도 더 명료한 글을 썼으며, 주께서 그토록 복음적인 영혼을 주셨던 이 사람을 잃다니, 우리 기도합니다." (이렇게 시작한 글은 성령의 힘으로 기독교도의 통일과 모든 불신자의 귀의를 기도했다)


1547년 요한 노이되르퍼처럼 <네 사도>가 인간의 네 기질에 대한 묘사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요한은 온화한 다혈질, 베드로는 냉담한 점액질, 마가는 성마른 담즙질, 바올은 우울질을 각각 나타낸다는 것이다. 뒤러가 <멜랑콜리아>에서 보였던 관심을 고려할 때 그럴듯한 연결로 보이니 아무래도 앞서 작품과 관련 개인적 견해를 밝히지 않은 것은 올바른 선택인 듯하다.

1520년 7월 12일, 뒤러는 마지막 여행이 되는 플랑드르와 브라반트(벨기에 중북부에서 네덜란드 남부에 이르는 지역) 여행길에 오른다. 그리고 8월 2일, 국제교역의 중심지로 부각된 안트베르펜에 도착했다. 당시 리스본과 함께 신대륙으로 나가는 관문으로 발전한 이곳에서 그는 성대한 환대를 받았다. 그리고 1521년 9월 초순 브뤼셀 궁을 방문했다. 뒤러는 이곳에서 커다란 문화적 충격을 받는데, 스페인 에르낭 코르테스가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에게 바친 물건들을 본 후의 일이다. 멕시코 아스텍의 무기, 보석, 그리고 인디언 문화가 담긴 신기하고 너무나 이국적 물건들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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