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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Oct 27. 2021

농민화가 대(大) 피테르 브뤼헬

왼편부터 <베들레헴의 인구조사(1566)>, <네덜란드 속담(1559)>

플랑드르 미술은 북부 네덜란드와는 달리 성상 파괴 운동에서 비껴갔다. 가톨릭을 신봉한 탓도 있겠으나 일찌감치 작가들이 종교화에서 벗어나 풍속화를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그림이 둥지를 틀었기 때문이다. 대(大) 피테르 브뤼헬(Pieter Bruegel the Elder, 1525?~1569)은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개시되기 직전 주로 안트베르펜에서 활동했다. 오늘날 벨기에 땅에 속하지만, 당시에는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국제 무역 도시였다. 그러나 펠리페 2세의 개종 압력과 수탈이 심했고, 특히 농민의 삶은 피폐했다. 

<영아 살해(1565~66)>

그의 작품은 60여 점이 남아 있는데, 그중 지배층의 폭정과 폭압뿐만 아니라 대중의 우매한 삶을 풍자하는 작품이 상당수이다. 세금 징수를 위한 <베들레헴의 인구조사>, 폭정의 <영아 살해>, <네덜란드 속담> 등이 그것이다. 앞의 두 작품은 성경의 무대를 추운 플랑드르 지역으로 옮겨 재해석한 것이 독특하다. 그중 <영아 살해>는 신약 성서 마태복음 (2:16-18)의 내용을 소재로 플랑드르 사람들의 수난을 그렸다. 성경 속 영아 학살은 발견할 수 없으며, 80년 독립전쟁의 단초를 제공했던 에스파냐 병사와 독일 용병이 저지른 종교 탄압의 현장을 직접적으로 묘사했다. 


브뤼헬이 그려 16세기 네덜란드 농촌 풍경을 알 수 있는 연작 세 작품이 존재한다. 1563년 마이켄 쿠케와 결혼한 직후 브뤼셀로 이사 와서 완성한 작품들이다. <혼인 잔치>, <농부의 춤>, <결혼식 무도회>인데, 그중 <결혼식 무도회>만이 1930년 오스트리아 빈을 떠나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미술관으로 이민 가 있다. 작품은 시공간만 달랐지 1960~70년대 우리네 농촌하고 분위기가 크게 다르지 않다. 통상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브뤼헬의 시선이 농민과 높이를 같이 했다. 따라서 작품 속 세계도 덩달아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는 가난한 농민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느껴보려 애썼다. 초대받지 않은 결혼식 피로연에는 선물을 준비하여 친구 프랑게르트와 함께 참석했다. 그리곤 농부들이 먹고, 마시고, 춤추고, 뛰어 돌아다니고, 사랑하는 장면을 꼼꼼히 살폈다.

 

<혼인 잔치(1568)>

<혼인 잔치>에서 술(맥주)과 음식을 푸짐하게 먹고 나면, 사회적 결속력과 함께 엔도르핀이 활성화된다. 이때 음악과 춤이 곁들여진다. 모든 인원이 같은 리듬에 맞추는 동시성과 무리 짓는 연대성을 형성하면서 엔도르핀은 두 배 가까이 증가한다. 인류가 포식자로부터 살아남으려는 집단 본능에서 탄생한 문화다. 그 장면을 담은 작품이 <결혼식 무도회>와 <농부의 춤>이다.

 

<농부의 춤(1568)>

이 작품 <농부의 춤>에서 악사 한 명이 스코틀랜드 백파이프를 연주한다. 볼이 부풀고 얼굴이 빨개진 것이 빠른 템포로 접어든 듯하다. 왼편에는 하얀 두건을 쓴 소녀와 동생으로 여겨지는 여자애가 있다. 언니가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춤을 가르친다. 문제는 술이다. 뒤에 두 사람이 술에 취해 서로 삿대질을 한다. 취하면, 상대방이 듣거나 말거나 자기 이야기만 하는 법이다. 이곳에서도 연인끼리 입맞춤하고, 싫다는 여성을 억지로 잡아끌며 춤추자 하는 인간 군상(群像)이 발견된다. 그중 제일 가관은 악사 옆 만취한 사내다. 술병을 든 채 했던 했던 얘기를 계속 반복한다. 코까지 빨개진 것을 보니 술중독자가 분명하다. 잔칫집에 가면 이런 사람 꼭 있다. 참고로 사내의 모자에 달린 공작새 깃털은 자부심과 함께 허영심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럼 사내는 지금 자신이 잘 나가던 왕년의 이야기를 하는가 보다. 

중앙 춤판은 젊은이들 차지다. 젊었을 때는 술보다 이성이 더 좋다. 허리를, 때론 엉덩이를 당기며 뱅글뱅글 활발하게 돌아간다. 발을 번쩍 들자 치마 속이 얼핏 보인다. 이내 심장이 뛰고 몸이 후끈 달아오른다. 전경에 손을 잡고 뛰어가는 한 쌍도 아마 춤판에 합류하려고 서두르는 중일 것이다. <혼인 잔치>에서도 보았던 숟가락이 사내의 검은 모자 위에도 꽂혀 있어 웃음 짓게 한다.

 

작품의 또 다른 제목은 <키르메스 (Kirmess) 축제>이며, 교회 봉헌을 축하하는 춤판이라는 견해가 있다. (노성두, <춤추는 세상을 껴안은 화가 브뢰겔>) 독일에서 시작된 교회 헌당제로 지역에 따라 키르타크(Kirtag), 키르흐바히(Kirchweih) 등으로 불렸다. 이때 포크 댄스를 추었다고 한다. 한편 나무에 걸려 있는 성모상 그림, 달려가는 사내의 발 밑 밀짚 십자가, 특히 교회를 등지고 춤을 추는 모습을 통해 브뤼헬이 영적 문제보다 쾌락에 몰두함을 경고했다고 평가한다. 

브뤼헐은 교회 장로였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네덜란드는 엄격한 칼뱅주의 신교를 신앙하여 춤은 방종하게 비쳐 당국과 교회에서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따라서 연작 모두 단순히 농민의 삶을 묘사했다고만 볼 수 없다. 과식, 욕정, 분노 등 모르고 짓게 되는 죄를 조심하라는 종교적 경구라는 분석에 수긍이 간다. 그런데 작품 속 주인공이 가난한 농민들이다. 교훈이 필요했다면 배부르고 등 따뜻한 귀족들이 먼저이지 않았을까? 

교훈 어쩌고 하는 것보다 그냥 브뤼헐의 해학(諧謔)으로 이해하고 싶다. 종교적 교훈이라면, 브뢰헬이 죽기 직전에 굳이 아내에게 자신의 그림 다수를 불태워버리라고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정치적이라는 지적을 받고 가족에게 화를 입힐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그의 종교가 북유럽에서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했던 재세례파(추정)라는 주장도 이를 뒷받침한다. 


네덜란드 북부 7개 주는 능통한 외국어를 바탕으로 금융과 무역업이 발달하여 세계 최강의 부국(富國)으로 성장했다. 독립전쟁이 주로 이곳에서 벌어졌기에 희생이 컸지만, 생존 본능이 발달한 결과로 보인다. 반면 훗날 벨기에로 독립하는 남부 10개 주의 주민들은 비교적 현실에 순응하는 편이었다. 전쟁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에스파냐가 가톨릭을 신앙하고 있는 이곳을 자기네 편으로 만들려고 했고, 어느 정도까지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런 남과 북의 기질 차이가 이후 국력을 가름했다. 플랑드르(벨기에) 지역 사람들은 큰 욕심 없이 그만그만하게 살아간다. 이런 플랑드르 지역민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작품이 바로 피테르 브뤼헬의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이다.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1555~1558)>

언뜻 보면 목가적인 풍경이다. 하지만 브뤼헬이 신화를 소재로 그린 유일한 작품이며, 알레고리(寓意)가 숨어 있다. 그림 속 바다 한복판에 떠 있는 바위섬이 크레타섬이다. 아테네의 명장이자 발명가인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루스와 함께 자신이 만든 미궁에 갇힌 곳이다. 그는 새의 깃털과 양초의 밀랍으로 두 벌의 날개를 만들어 하늘을 날아 탈출을 감행했다. 세상의 물리를 깨친 그는 아들에게 “네가 달고 있는 날개는 태양에 너무 가까이 날면 녹아 떨어질 것”이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이카루스는 아버지의 경고를 잊은 채 높이 날아 태양에 다가갔다. 결국, 밀랍이 녹아 떨어지면서 에게해(海)의 그리스 사모스섬 남쪽 이카리아 해에 빠져 죽는다. 

재밌는 것은 이카루스를 오른쪽 구석에 허우적대는 모습으로 아주 작게 처리했다. 오히려 작품의 주인공은 어리석은 신이 아니라 주변에 관심을 주지 않고 쟁기질에 충실한 인간 농부처럼 보인다. 신의 죽음과 인간의 삶이 동떨어져 있다는 의미도 된다. 그나저나 함께 날던 아버지 다이달로스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목동이 쳐다보는 하늘 어디쯤이리라. 그리고 말 머리 바로 위 덤불 그늘 속에 시신이 희미하게 그려져 있다는데 잘 안 보인다. '사람이 죽었다고 쟁기질을 멈추지 않는다'라는 속담을 담았다. 


“바다에 너무 가까이 날면, 습기에 굳어 날갯짓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다이달로스의 또다른 당부는 이것이었다. 결국, 너무 높게도, 너무 낮게도 날지 말라는 경구(警句)는 인간에게도 피할 수 없는 원형적인 고난과 역경이다. 그러니 피할 수 없는 역경이라면, 크게 괘념치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플랑드르 사람의 이런 태도는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그의 최대 규모의 작품인 <갈보리로의 행진(1564)>에서도 예수가 500여 명의 인물 한가운데 조그맣게 표현되었다. 물론 이런 태도가 개개인의 행과 불행을 나누는 결정적 기준이 아니다. 그러나 개인, 국가, 그리고 신마저도 무탈하면서 그만그만하게 지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결혼식 무도회(1566)와 그림 세부 샅 주머니

또 앞서 잠시 언급한 <결혼식 무도회>에서는 당시 환경으로 생긴 재미있는 복식의 변화상이 발견된다. 125명의 결혼식 하객이 어울려 춤추는 중에 허리춤 장식용 칼을 찬 남성들의 두 다리 사이 중요한 부분이 불룩하게 튀어나왔다.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 유럽에서 유행했던 ‘샅 주머니(음낭 덮개)’이다. 당시 남자들은 바지와 같은 색으로 샅 주머니를 만들어 착용하면서 그 크기가 커야 체면이 선다고 여겨 그 속에 솜과 짚 등을 뭉쳐 채워 넣었다. 우스워 보이지만, 당시 에스파냐와 전쟁을 겪었던 시대 상황에서 남성의 용맹과 담력을 상징했다고 한다. 군인들은 갑옷 위에 쇠를 두드려서 만들었고, 상류층은 그곳에 돈 지갑과 손수건을 넣고 다녔다. 사과와 오렌지를 넣어 두었다가 귀부인에게 꺼내서 내밀었다고 하니 좀 민망하다. 이제 본격적으로 화제를 종교 개혁의 정국 속에서 번민했던 작가 이야기로 옮겨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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