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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Oct 22. 2021

카를 5세와 칼뱅파의 성장

자본주의 탄생의 비밀

카를 5세와 독일 선제후 간 대립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등극할 당시 열아홉 살이던 카를 5세가 루터의 행위를 반역이라고 간주했다. 교회가 쇄신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지금 독일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저항에 단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521년 루터를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의회에 소환하여 이단자로 규정하고 파문한다는 법령을 공표했다. (제목 그림; 안토니 반 다이크의 <카를 5세 초상(1620)>)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당시 신성로마제국 내 작센 선제후국

그러나 황제가 직접 나섬으로써 권력의 독점을 경계하던 독일 제후들이 반발하는 사태로 발전했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점은 당시 제후는 자신의 영역 내 교회에 관한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정치적 지배를 연방교회제(領邦敎會制)라 한다. 왕 혹은 황제에 대한 영주의 의무는 전쟁이 났을 때 참전하는 것밖에 없었다. 따라서 종교와 관련 황제나 교황의 예속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선택이 가능했으며, 백성들의 믿음까지도 지배했다.

 

루터가 사는 도시의 영주이자 제후의 대표 격인 작센 지역의 선제후(選帝侯) ‘현명공’ 프리드리히 3세(재위 1486~1525)가 그를 보호하겠다며 나섰다. 선제후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7명을 말하며, 중세 유럽에서 유일하게 독일 지역에만 존재했던 제도이다. 따라서 제후 자신이 뽑은 황제와 직접 대결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용기를 얻은 다른 제후들도 루터파를 자칭하며,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하여 황제와 맞섰다. 

반면 황제도 제국을 선거제에서 세습제로 바꿀 기회로 여겼다. 이번에 제후들을 확실하게 굴복시켜 독일 지역의 패권을 거머쥐려고 했으니 물리적 충돌은 불가피했다. 여기에 덧붙여 프랑수아 1세가 죽고 새롭게 등장한 프랑스 앙리 2세가 황제를 벼르고 있었다. 그는 부친의 약속에 대한 담보로 마드리드에서 유폐되었을 때 당한 수모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의 독일 분할계(計)는 훗날 아르망 장 뒤 리슐리외와 레몽 푸앵카레로 이어진다. 결과적으로 신·구교 전쟁은 황제에게는 정치적 영향력의 상실과 함께 제후들이 힘의 우위에 섰다. 그러나 강력한 리더십을 상실한 독일 지역에서는 19세기 후반까지 통일된 국민국가를 출범시키지 못했다.

루터의 95개 조 반박문

루터의 주장을 요약하면, 순수했던 초기 그리스도교 시절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그는 저서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에서 개인의 신앙을 중시하고, 교회 같은 조직보다는 신과 직접 대면하는 개인의 내면세계를 강조했다. 1522년 비텐베르크에서 루터파를 조직하여 가톨릭교회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엄격한 루터파는 과격해지고 있었다. 걸린 그림을 떼어냈고, 아이의 뜻에 반해 세례를 주는 것도 부당하다고 가르쳤다.

이런 상황에서 농노들은 자신들이 철저히 자유로울 수 있다고 오해했다. 예수의 가르침은 신 앞에서는 모두가 똑같은 죄인이며, 신이 우리를 대하는 방식대로 우리도 다른 사람을 대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1524년~1525년에는 대규모 농민 반란이 헝라기에서부터 스위스와 중부 독일까지 유럽 전역에서 봇물 터지듯이 시작되었다. 루터의 초기 추종자로 카리스마를 지녔던 토마스 뮌처(Thomas Münzer)가 제세례파를 이끌며 저항했다. (앤드루 마, <세계의 역사>) 하지만 현실에서 농노는 노예에 다름 아니었다. 왕국의 시민이 아니었기에 영지 바깥으로 이주할 권리가 없었다. 농토를 경작하거나 경작하지 않을 자유도 없었다. 농노의 자식은 농노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루터는 ‘농노제 철폐’라는 농민들의 요구를 외면했다. 그는 “지상의 왕국은 인간의 불평등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단정 지었다. 따라서 군주의 편에 서서 농노들이 기존 체제에 도전하는 행위를 강력히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터 자신이 부유한 가문의 출신인 데다 귀족인 프리드리히의 보호를 받고 있었기에 세속적 권위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독일 군주들은 루터파 기독교에 충성을 서약했다. 신 앞에서도 신분 차별은 여전했으며, 종교 개혁은 군주나 상류 계급에만 관계되는 것이었다. 결국, 종교 개혁이란 로마 교회의 전횡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한 ‘기득권 다툼’이 아니었을까? 


“자유니, 자율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상류 계급에만 관계되는 것이지 일반 대중을 위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중은 거의 어느 시대에나 동물과 별로 다르지 않은 생활을 해 왔다.” (J. 네루, <세계사 편력 1>) 


칼뱅파와 자본주의의 결합


루터파는 신성로마제국 북부와 스칸디나비아반도로 확산하였다. 반면, 루터의 뒤를 이은 칼뱅은 가톨릭 신앙이 투철한 모국 프랑스 대신 스위스에서 출발했다. 그곳은 루터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에 열정을 보이는 도시들이 있었다. 칼뱅은 제네바에서 시작하여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영국 등지로 급속히 세력을 확산시켰다. 그는 루터와는 달리 조직과 집단의 존재를 중시했다. 칼뱅 자신이 거대한 교단을 이끄는 경영자였으며, 거대한 조직을 운영하려면 거액의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금의 공급원을 당시 태동하고 있던 부르주아 계급에 의지했다. 이는 그가 ‘이윤 추구, 재산 축적을 긍정’하는 부르주아 자본주의를 종교적 입장에서 옹호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17 세기 종교개혁-베자, 마르틴 부서, 하인리히 불링어, 장 칼뱅, 존 녹스, 퍼킨스, 버르미그리, 잔스키, 외코람파디우스, 쯔빙글리-를 그린 삽화

기존 교회에서는 구약성서를 근거로 이자를 받고 돈을 꾸어 주는 일을 ‘죄악’이라고 일러왔다. 그러나 칼뱅은 루터의 반대에도 5% 이자율 한도 내에서 대부를 허용했다. 이런 태도는 네덜란드와 영국 청교도들이 근대에 와서 금융산업을 기반으로 상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원인이기도 하다. <홍익희, <유대인 경제사>) 이 문제와 관련하여 구약성경은 "이방인에게는 이자를 받고 꾸어주어도 되지만, 너희 동족에게는 이자를 받고 꾸어주어서는 안 된다(신명기 23장 21절)"라는 구절이 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고리대금은 금지되었다. 1179년에 열린 라테라노 종교회의에서는 고리대금업자가 기독교도의 묘지에 매장되지 못하도록 결정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 중에 지중해 무역활동이 활발해졌고, 이를 위해 무역상들은 자본금을 빌려올 수밖에 없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양대 기축통화, 즉 베네치아의 '두카트'와 피렌체의 '피오리노(플로린)'다. 그리고 이민족간의 돈거래와 환전의 형식을 빌어 이자를 지급하면서 성경의 굴레를 피해갈 수 있었다. (이케가미 히데히로, <쉽게 읽는 서양미술사>) 따라서 고리대금업자와 환전상은 동일한 언어 ‘Moneylender’를 썼다. 교황 니콜라스 5세가 유대인에게만 고리대금업을 ‘공식적’으로 허용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순결한 기독교인을 죄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태도는 800년 초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한 샤를마뉴 시대에도 이미 나타났다. 당시 국가 수입이 빈약했음에도 유대인에게만 이교도(이슬람교도)와 교역을 허용했다. (앙드레 모루아, <프랑스사>) 여하튼 유대인들은 이로 인해 금융 전문가가 되었고, 부를 축적했다. 1185년 아론이라는 유대인 대부업자가 1만 5,000파운드를 430명에게 빌려주었는데, 이 규모는 당시 잉글랜드 연간 국고 수입의 3/4을 차지했다고 한다. (홍익희, <유대인 경제사>)


앞에서 언급한 메디치 가문의 권력과 예술의 후원이 금융자산을 배경으로 하였다. 그리고 백년전쟁 당시 군비 충당 문제로 고심하던 집권자들을 유혹했던 자금 출처가 바로 유대인의 주머니였다. 그러니 권력은 있으나 재정이 부족하고 돈을 갚을 의지가 없는 왕이라면, 유대인을 배척하고 학대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윌리 톰슨, <노동, 성, 권력>) 

잉글랜드 헨리 2세는 십자군 전쟁 참전 비용을 ‘살라딘 십일조’란 징수제도를 만들었고, 그의 아들 ‘사자 왕’ 리처드 1세는 대출을 통해 해결했다. 그러나 더 쉬운 방법으로 유대인 300명을 신성 모독죄로 교수형에 처하면서 그 재산을 가로챘다. 동생 존 왕도 1210년 잉글랜드 내 모든 유대인을 체포하여 그들의 재산을 실사 후 총 6만 6,000마르크에 이르는 거액을 세금으로 징수하였다. (홍익희, <유대인 경제사>) 

이러한 유대인 재산의 약탈 행위에 프랑스 국왕도 기꺼이 동참했다. 필리프 2세는 유대인의 돈을 정기적으로 수탈하였으며, 국왕 중 가장 지출이 많았던 필리프 4세는 1306년 모든 유대인을 체포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이러한 수탈은 추방이라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1492년 레콩키스타(Reconquista, 기독교인에 의한 국토회복운동)를 완성한 에스파냐에서 가장 극성했다. 종교재판으로 금과 은, 그리고 화폐를 빼앗기고 길을 떠나야 했던 유대인 상당수가 플랑드르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1290년 잉글랜드 에드워드 1세에 의해 추방당한 유대인과 합류했다.


브뤼헤가 퇴적작용으로 인해 바닷길이 단절되자 또 다른 항구도시인 안트베르펜(네덜란드어 Antwerpen, 영어 Antwerp 앤트워프)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이곳은 직물산업과 함께 에스파냐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이 다이아몬드 유통을 시작했다. 안트베르펜은 국제적인 무역 시장으로 성장했고, 1500년 무렵에는 인구가 두 배가 불어나 5만 명이 사는 유럽 5대 도시로 급성장했다. 그러나 1576년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 동원되었던 에스파냐 용병들이 임금을 못 받게 되자 이곳 시민을 무차별적으로 약탈하는 사건이 터졌다. ‘스페인 광란’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또한 반(反)에스파냐 세력들이 단결하는 계기를 조성했다. 

1585년 안트베르펜이 다시 에스파냐에 정복되었다. 그러자 절반 가까운 시민들은 척박한 북부 네덜란드로 탈주했다. 암스테르담은 1580년대에 비해 도시 규모가 이전보다 3배나 커졌다. 결과적으로 유대인은 네덜란드를 세계 최강의 중상(重商)국가로 올라서는 데 힘을 보탰다. 유대인들이 주축이 되어 동인도 회사를 주식회사로, 도시를 금융과 보험이 기반이 된 물류기지의 중심지로 바뀌었다. 이런 상황에서 칼뱅파의 이자와 부에 관한 태도는 북부 유럽에서 금융·무역업, 나아가 건강한 자본주의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을 들어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를 통해 근대적 자본주의는 칼뱅 신학을 받아들인 나라에서 발전했다고 주장한다.


한편 교회 분열의 마지막 대단원은 잉글랜드의 헨리 8세가 장식했다. 앤 블린과 재혼을 위해 이를 허용하지 않는 교황과 결별했다. 1533년 로마 교회와 분리하여 독자적인 교회를 설립하고 결국, 결혼 무효 판결을 얻어냈다. 이후 잉글랜드의 국교회는 유럽 대륙에서 건너간 칼뱅파가 진화한 청교도(淸敎徒, Puritan)가 주체를 이루었다. 이들은 신교 중에서도 엄격했는데, 1559년의 엘리자베스 1세가 내린 통일령에 순종하지 않아 박해를 받았다. 그중 상당수 인원이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으며, 1620년 메이플라워호(號)를 타고 떠난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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