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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Oct 18. 2021

북유럽 미술의 선구자 얀 반 에이크

로버트 캉팽의 '성모'

<헨트 제단화(1432)>가 열렸을 때와 닫혔을 때 모습

형 후베르트 반 에이크(Hubert van Eyck, 1370?~1426)가 시작하여 동생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5?~1441)가 완성한 <헨트(Ghent) 제단화(1432)>다. 일명 <어린 양의 경배> 또는 <신비의 어린 양>으로 불리는 참나무 12폭 작품이다. 15세기 초 플랑드르 지역 헨트(겐트)시 성 바봉(Saint Bavo) 성당의 가족 예배당을 장식하기 위해 시장 요스 베이트(Joos Vijd)가 반 에이크 형제에게 주문하여 제작했다. 

전체적으로 열린 화면의 그림은 도상학적 의미가 매우 복잡하다. 화면(365x515cm)은 천상과 지상 2단으로 나뉜다. 하단 다섯 폭이 <어린 양의 경배>이다. 양은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이었으나 중세 시대 미술에서는 통상 예수의 고난과 부활을 상징한다. 상단이 복잡한데, 왼편부터 열두 폭을 순서대로 서술하면, 아담-노래하는 천사들-마리아-하나님-세례자 요한-연주하는 천사들-이브 순이다. 중앙 인물을 예수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바로 아래 <어린 양의 경배> 위쪽 반원의 성령(비둘기)과 연결할 때 아무래도 하나님으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 

닫혔을 때는 상-중-하 3단으로 구성되었다. 하단에는 봉헌자 요스 베이트-세례자 요한-사도 요한-이사벨 보루트, 가운데는 수태고지하는 가브리엘 천사와 성모 마리아, 상단은 선지자 즈카르야-이교도 무녀 에리트 레이와 쿠마이-선지자 미가 등 한 폭, 한 폭이 마치 개인 초상화처럼 그려졌다. 하지만 뒤쪽 배경을 이루는 풍경은 사실주의의 선봉이라 할 수 있으며, 르네상스 미술의 특징을 담고 있다.


제단화는 가톨릭 교회에서 ‘제대화’라 불린다. 교회 동쪽 중심 제단 뒤에 수직으로 서 있는 패널화로, 미사 때 모든 신자가 볼 수 있었다. 설교가 청각이라면, 제단화는 시각적 교화 수단이다. 라틴어 성경을 읽지 못했던 당시 대다수 신도에게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미술사에서는 내용 못지않게 외형이 중요하다.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는데, 가장 단순한 것이 한 폭으로 된 이탈리아 르네상스 형식의 ‘팔라(Pala)’이다. 두 폭 제단화로는 작가 미상의 <월턴 두 폭 제단화>가 유명하며, 개폐가 가능한 세 폭 제단화(트립 티콘 Trypticon)가 가장 일반적이었다. 날개형은 마인 프랑크에서 활동한 그뤼네발트가 완성했다. 통상 다섯 개 이상의 패널로 구성된 것이 다폭 제단화다. 

제대화는 습기가 많은 북유럽 고유의 양식으로 그곳 미술의 발전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세에는 일상생활을 그리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내세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점차 제단화에서 벗어나 15세기부터 독자적인 장르로 발전한다. 풍경화와 정물화는 17세기에 와서 네덜란드에서 유행한다. 그러나 장르 간 위계질서가 조장되었다. 1648년 프랑스 왕립 미술원에서 공식화하는데, 역사화(성경, 신화, 역사)→초상화→풍경화→정물화→풍속화 순이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1434)>

또 다른 그의 대표작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은 부르고뉴 공국 필리프의 고문이었던 조반니 디 니콜라오 아르놀피니로부터 주문을 받고 그린 초상화다. 그의 가문은 직물업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루카 출신의 상인 출신이다. 그림 속 감귤은 지금이야 흔하지만, 당시 부르고뉴 지방에서는 부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귀했다. 조반니의 첫 아내 코스탄자 트렌타가 1433년 사망했기에 두 번째 아내 조반나 체나미를 맞이한 장면으로 추정한다. 피렌체를 포함, 동시대 어떤 작품보다 작품성이나 완성도에 있어서 훨씬 뛰어났다. 대중이 피렌체의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에 지나치게 경사되어서 그렇지, 플랑드르 미술은 시대를 앞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특히 광학 기구의 발전으로 세필화 솜씨는 다른 지역에서는 흉내를 낼 수 없는 경지에 올랐다. 

결혼식 장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인이 임신했는지 여부가 쟁점이 되었다. 그러나 결혼이 교회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신랑, 신부가 주체가 된 성사(聖事)이기에 언제 임신하든지 상관없었다. 왕과 귀족, 성직자가 아닌 시민계급(상인)을 대상으로 최초로 그렸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11세기부터 발전한 중세 상업 혁명이 성공하여 도시에 부가 축적되었고, 이곳이 부르주아 계층, 즉 상인, 은행가들의 역할이 증대된 사회임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초기 스푸마토 기법과 원근법을 사용했는데, 10개의 그리스도의 수난 장면으로 둘러싸인 중앙 볼록거울이 매우 독특하다. 부부의 뒷모습과 화가 자신의 모습을 세필로 그려 넣었다. 위에는 “얀 반 에이크가 여기 있었다. 1434”라고 썼다. 그가 결혼식(혹은 약혼식)의 증인 역할을 자처한 셈이다. 회화가 최초로 개인적 사건을 증거 했다는 새로운 가치를 부여했다. 이후 플랑드르의 많은 화가가 거울을 자신에 작품에 담아 여러 의미로 사용했으며, 에스파냐의 벨라스케즈도 유명한 <라스 메 니나스(시녀들)>에서 흉내 냈다. 

작품에 등장하는 사물에는 많은 상징이 숨어 있다. 세필로 털 하나하나를 그린 강아지는 ‘충절’을, 샹들리에의 불 켜진 촛불 한 자루는 신과 함께 있음을, 그리고 벗어 놓은 나막신은 맨발로 신 앞에 엄숙하게 결혼을 선언한다는 의미이다. 당시 초상화로는 혁명적이다. 두 사람의 전신상, 현실적 방안 배경, 화면 속 인물의 행위와 동작 등 이전에 찾아볼 수 없는 시도였다. 또한 빛의 변화와 붉은색과 녹색의 보색 대비를 보여준다. 이렇게 세밀한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힘은 광학 기구의 도움 외에 그가 발명한 유화가 있어 가능했다. 특히 밝은 녹색은 19세기에 합성 원료가 등장하기 전까지 화가들이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별로 없었다. 노란색과 파란색을 섞어 썼으며, 녹토와 같이 천연 녹색을 띠는 안료들은 대개 광택이 부족했다. 얀 반 에이크가 최초로 초록빛을 남기는 녹청색을 사용했고, 그 선명성은 오늘날까지 거의 600년간 유지되고 있다. (스텔라 폴, <컬러 오브 아트>)

유화는 이미 7세기 아프가니스탄의 예술가들이 천연 안료를 갈아 호두나 양귀비 씨 오일과 섞어서 바미안에 있는 동굴 단지를 장식할 때 사용했다. 유럽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한 수단으로 오일을 사용한 것은 11세기에 처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범용적으로 사용된 것은 아마씨 오일의 정제 방법에 개선이 이루어진 1400년대 이후이다. 플랑드르 예술가들은 오일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린 최초의 유럽인들이었다. 서유럽 사회에서는 캔버스의 발명이 티치아노라면, 유화는 얀 반 에이크의 몫으로 평가한다. 얀과 후베르트 반 에이크 형제는 물론, 로베르 캉팽,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덴도 선구적으로 사용했다. 여기서 ‘누가 진짜 먼저 사용했느냐?’는 문제로 다투는 짓은 소모적이다. 바사리의 말을 믿고, 그냥 얀 반 에이크의 손을 들어주자. 다만 '통섭'의 개념을 처음 제시한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통찰력 있는 말은 기억해 둘 만하다.


"기억하기 쉽도록 몇몇 극소수의 사람들만 천재라고 부르지만, 그 업적은 그들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낸 공통의 산물이다."


여하튼 유화는 가루로 된 안료(피그멘트)를 바르기 위한 고착제를 말한다. 템페라화에서 사용했던 달걀노른자 대신 호두 기름이나 양귀비 기름을 사용했다. 이 린시드 오일(linseed oil)은 물감을 매우 얇게 칠하고, 덧칠해도 혼합되지 않기에 채도와 질감을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한 더디 말라 프레스코화보다 섬세하고 사실적인 표현이 가능하다. 인물의 뺨에 난 수염 구멍까지 묘사할 정도이다. 이 과정에서 표면 처리가 잘 된 캔버스가 필수적이었으니 둘은 서로 보완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로베르 캉팽의 ‘성모’


<불가리개 앞에 앉아 있는 성모자(1425?)>

로베르 캉팽(Robert Campin, 1375~1444)은 얀 반 에이크와 판 데르 베이덴과 더불어 초기 플랑드르 지역의 3대 화가로 대접받는다. 그도 성모를 그렸다. <불가리개 앞에 앉아 있는 성모자>가 그것으로, 여러 면에서 회화사적 의미가 담겨 있다. 같은 상업자본이 후원했지만, 플랑드르의 미술은 피렌체와 다른 특성을 보이고 있다. 피렌체는 고대 그리스·로마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목적의식이 뚜렷했던 반면, 플랑드르에서는 패트론의 현실적인 욕망을 비교적 자유롭게 반영했다.

플랑드르 지역은 습지로, 이탈리아처럼 프레스코화가 유행하기 어려웠다. 화판, 즉 패널화(panel畵)가 유행했다. 얀 반 에이크에 이르러 유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이 작품은 그 이전 템페라화이다. 템페라 기법은 유화보다 빨리 말라 빠르게 붓질해야 한다. 그런데도 작품은 이 지역의 자랑인 정밀한 묘사가 뛰어나다. 성모의 머리카락과 털 소매, 붉은 쿠션 위에 펼쳐 놓은 성경의 글자 하나하나가 선명하다. 

영리하게도 작가는 벽난로의 화염을 막아주는 왕골로 만든 둥근 불가리개를 마치 성모의 후광처럼 배치했다. 바닥의 바둑판 모양이 훗날 베르메르의 것에는 못 미치지만, 초기 형태의 원근법이 발견된다. 도상의 많은 기독교 상징에도 불구하고 미술사적 특징은 창문을 통해 내다보이는 바깥 풍경이다. 천상의 예루살렘, 상상의 낙원도 아닌 15세기 초 플랑드르의 부유한 상업 도시를 그렸다. 성모자상을 배경으로 등장한 최초의 사실주의 풍경화이다. 원근법의 비례를 따라 자연의 공간을 깊이 있게 표현했다. 당시로서는 매우 독창적인 방법으로 주류인 종교화에 세속화가 스며드는 현장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작품 속에 나타난 작가의 신앙심에는 어떤 균열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후 기독교 분열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었던 북유럽인들은 영(靈)과 육(肉)이 고통받는다. 특히 교회 후원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던 미술가들의 입장에서는 그 번민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시각언어인 북유럽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종교 개혁을 개괄적으로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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