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반 에이크와 베이던의 '성모'
많은 사람이 ‘플랑드르’ 지역 자체를 낯설어한다. 알프스 북부에서 북유럽 르네상스를 꽃피운 곳이다. 플랑드르는 프랑스어이며, 네덜란드어로는 ‘플란데런’, 영어로는 ‘플란다스’이다. 862년 백작령(領)으로 출발했다. 플랑드르는 네덜란드에 포함되어 있었다. 네덜란드가 북부 홀란드(Holland)와 남부 벨기에(Belgium)로 구성했으며, 플랑드르 대부분은 오늘날 벨기에 지역에 포함되었다. 네덜란드(Nederland)라는 말은 '낮은(Neder) 땅(Land)'이라는 뜻이다. 북부 홀란드(‘Hollow land’)도 요지(凹地)라는 의미이기에 지명 모두가 해수면 아래 낮은 지역이라는 사실을 적시한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 에스파냐령 ‘저지대 국가’보다는 협소한 지역 개념이다. 저지대 국가는 스헬데강, 라인강, 그리고 뫼즈강의 낮은 삼각주 지대를 일컬으며, 오늘날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그리고 프랑스 북부 지역과 독일 서부 지역 일부를 포함한 넓은 지역이다. 결론적으로 지역의 크기는 저지대 국가> 네덜란드> 플랑드르 순으로 나타난다. 이후 네덜란드에서 에스파냐와 독립전쟁이 벌어지면서 1830년에 이르러 북부와 남부는 각각 오늘날의 네덜란드와 벨기에로 분리 독립했다.
양모 산업이 발달한 플랑드르는 북부 이탈리아 국가들과 함께 유럽의 자본주의가 피어난 곳이다. (홍익희, <유대인 경제사>)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한 이곳은 척박한 네덜란드의 노른자였다. 오늘날의 프랑스 북부 일부를 포함한 이곳의 미술은 후기 르네상스 때 가장 발달했으며, 부르고뉴의 공작 필리프 2세 때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그는 백년전쟁 중인 1384년 플랑드르 백작의 유일한 상속인 마르가리트 공주와 결혼했다. 점점 마음이 플랑드르 쪽으로 기울어지던 그는 궁정을 프랑스 동부 수도 디종에서 플랑드르 브뤼헤(제목 사진 참조)로 옮겼다. 재능 있는 화가들이 프랑스 왕실과 귀족을 찾아 기웃거릴 이유가 없어졌다. 새로운 후원자로 양모 산업을 기반으로 하는 상업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화가는 제단화 형식을 빌려 초상화와 함께 풍경화, 정물화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부르고뉴 공국에 속했던 플랑드르의 행정수도는 1477년까지 브뤼셀이었다. 그러나 상류사회의 문화 중심지는 브뤼헤였다. 잉글랜드와 북해가 인접한 유럽 경제의 중심지로, 운하가 발달하여 '북유럽의 베네치아'라는 별명을 지녔다. 한때는 34개국의 해외 상관(商館)이 있었던 이곳에 1439년, 메디치 은행 지점이 문을 열었다. 피렌체와는 활발한 상업적 교류와 함께 문화적 경쟁도 이루어졌다. 플랑드르 회화의 첫 번째 황금기를 구가했던 이곳 문화의 중심지에 피렌체의 부르넬레스키와 동시대의 인물인 얀 반 에이크가 활동했다. 그는 플랑드르의 대표 화가로, 북유럽 사실주의 미술의 시작이자 절정이었다. 그와 함께 초기 북유럽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선구자로는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과 로베르 캉팽이 있다. 그리고 독특한 작품 세계를 보여주었던 히에로니무스 보스와 대(大) 피테르 브뤼헬이 유명하다.
플랑드르 회화란 일반적으로 16세기까지 네덜란드와 벨기에서 발전한 미술을 가리켰다. 네덜란드가 독립한 후에는 벨기에 지방 미술의 대명사로도 쓰였으며, 17세기 바로크 회화의 대가 루벤스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한편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법을 북유럽으로 도입한 인물은 독일 지역의 알브레히트 뒤러이다. 그는 종교 개혁의 와중에 루터와 함께 지냈던 인물로, 따로 분류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백년전쟁의 끝자락과 연결 짓기 위해 플랑드르 미술을 대표하는 두 작품을 먼저 보자.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의 <롤랭 재상의 성모 혹은 오툉 성모상>과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Rogier van der Weyden)의 <성모를 그리는 성 누가>이다. 두 화가 모두 플랑드르 프리미티브(primitive, 르네상스 이전 중세 시대의 화가와 작품)를 대표한다. 참고로 베이던의 출세작이자 세계적인 명작인 <십자가 내림>이 유명하다. 높이 2.2m, 폭 2.6m로, 등장인물들이 실제 크기로 그려진 이 대형 제단화는 당시 유행하던 ‘역 T자형’ 공간을 열 명으로 꽉 채운 구성이 뛰어나다.
그런데 한 눈으로 보아도 앞의 두 작품 모두 구성이 꼭 닮았다. 실내 인물 배치, 세 개의 아케이드, 중경의 두 사람, 마을 풍경. 그리고 공기 원근법에 의한 색채 변화와 이곳 대표산업인 직물의 질감 표현이 정밀하다는 점에서도 매우 흡사하다. 작품 완성 시기와 친밀했던 두 사람의 관계를 고려해 볼 때 베이던이 에이크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인물 위치와 색조에서는 차이가 난다. 가장 두드러지게 구별되는 점은 성모와 마주한 인물이 속세의 니콜라스 롤랭(Nicolas Rolin)과 ‘화가들의 수호성인’ 누가(Saint Luke)로 나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작품 속 주인공은 성모가 아니라 롤랭과 (베이던 자화상 성격의) 누가라 할 수 있다.
오툉의 미천한 가문 출신인 롤랭은 부르고뉴 공국에서 40년간 공직 생활을 하며 재상의 지위에 오른다. 그가 바로 백년 전쟁에서 필리프 3세를 도와 외교와 전쟁을 수행한 인물이다. 그는 잔인했고, 잔 다르크를 생포해 잉글랜드군에게 넘겼다. 프랑스 샤를과 내통하여 필리프가 잉글랜드와 등을 지게 했다. 왕실 재산을 착복하면서까지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작품 속 롤랭 머리 부분 아케이드 안을 보면, 언덕으로 이루어진 넓은 포도밭이 보이는데 디종 근처 자신 소유의 땅이다.그리고 최초 얀 반 에이크가 그린 허리에 찬 돈주머니(일명 자선 주머니) 흔적이 엑스레이 검사에서 발견되었다.
롤랭의 작품 속 비중이 그 크기와 위치에서 감히 성모와 대등하다. 반을 가르면, 개인 초상화라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이 때문에 미술사에서 성스럽게 표현되던 종교화가 세속화 과정을 걷게 되는 출발점이라는 의미가 부여된다. 역사적으로는 시민계급의 성장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는 불경(不敬)이다. 화려한 금실로 수놓은 그의 다마스커산 모직 외투가 눈을 아래로 향해 있는 성모의 붉은 망토를 초라하게 한다.
또한 베이던이 그린 성 누가와 비교해 볼 때 롤랭은 경직되고 거만하다.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경배를 올리는 형식을 취했지만, 벼락출세한 롤랭의 내면 깊숙이 꽈리를 튼 과시욕이 드러난다. 이 그림은 프랑스와 공작령이던 부르고뉴 간 아라스 조약(1435)을 체결한 직후에 그려졌다. 결과적으로 백년 전쟁을 끝낸 조약으로, 부르고뉴 필리프 공작을 도와 이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롤랭이다. 따라서 작품 제작 당시 부풀어 오르는 자신감을 스스로 억누르기 힘들었으리라 판단된다.
1347년 10월 이탈리아 시칠리아섬 북동쪽에 있는 항구도시 메시나에서 페스트가 처음 발병했다. 1441년 다시 유럽 대륙에 맹위를 떨치자 60대에 접어든 그는 죽음이 두려웠다. 오툉에 가난한 병자를 돕기 위해 본(Beaune) 자선병원을 짓는다. 넓은 포도밭이 딸린 이 병원에서는 오늘날까지 이곳에서 이익을 얻고 있다. 선행이 분명하다. 또한 교황에게서 설립 인가를 받아 지은 당대 최고의 병원 안에 베이던에게 의뢰하여 제대화 <최후의 심판(1445~1450)>을 봉헌했다. 그러나 사후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기를 소망한 기복(祈福) 행위로 선의가 빛을 바랬다. 지금 포도 산지인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롤랭 대신 포도주와 함께 베이던과 에이크의 그림 이야기만 나눈다고 한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했더라면, 그의 송덕(頌德)은 결코 마를 날이 없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