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8년 이노센트 3세(재위 1198년~1216)는 교황직에 오른 직후 자신은 “신보다 낮지만, 인간보다 높다”고 선언했다.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같은 기독교 국가를 침략한 십자군 전체를 파문했던 교황이다. 교황은 영적, 세속적인 권력을 장악하며, 군주들은 교황으로부터 위임된 세속적 책무를 수행하는데, 이는 마치 달이 태양의 빛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황에게 예속되어 있다는 주장을 실천했다. (신덴톱, <개인의 탄생>) 이는 신권정치(神權政治)를 이름이다. 교황들은 세속의 간섭에 맞서 파문과 성무 금지를 무기로 삼았다. 파문은 물론이고 교회의 모든 일에서 손을 떼야하는 성무 금지는 영혼 없는 몸뚱어리만 존재하는 조치로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오랜 십자군 전쟁은 결과적으로 교권의 약화와 상당수의 제후가 사망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계기로 작동했다.
이번엔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재위 1294~1303)가 성직자에 대한 과세 문제로 프랑스 필리프 4세와 대립했다. 그 역시 모든 인간이 교회에 종속해야 한다고 믿었다. 1296년 칙령 '클레리키스 라이코스(Clericis Laicos)'를 공포하여 “세속인이 성직자에게 과세하는 것을 금지하고, 과세자와 납세하는 성직자를 함께 파문으로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1300년에는 칙서 '나의 아들아! 들어라'를 통해 자신에 맞서 화폐의 국외 반출을 금하는 필리페를 공격했다. 교황이 세속적인 문제에 관해 법관 같은 태도를 취함으로써 전 세계를 통치하는 듯 보였다. (앙드레 모루아, <프랑스사>) 그러나 필리페는 1303년 의회의 지지를 바탕으로 로마 남동부 아나니에서 보좌관 기욤 드 노가레를 통해 난폭한 장면을 연출하며 교황을 겁박했다. 교황은 죽음을 택하겠다고 맞서 책동을 막아냈으나 고령과 정신적 충격으로 1305년 사망했다.
프랑스는 영향력을 행사해 보르도 주교를 교황으로 선임했다. 바로 클레멘스 5세다. 로마가 안전하지 않다고 느낀 그는 아비뇽을 매입하여 교황청을 옮겼다. 1309년부터 1377년까지 7대에 걸쳐 교황은 프랑스 왕의 영향력 아래 놓였다. 로마의 교황과 아비뇽 반(反) 교황(anti-Pope)이 공존하는 교회의 ‘대분열 시대’(1378~1417년)가 도래했다. 두 교황은 반목하며 서로 파문했다. 유럽인의 신앙심도 덩달아 흔들렸다. 지상에 있는 신의 대리자라고 스스로 칭하는 이가 이런 싸움을 일삼는다면, 그 신성과 선의가 의심받는 것은 당연했다. (J. 네루, <세계사 편력 1>)
1414년 보헤미아의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지기스문트(Sigismund, 재위 1411∼1437)가 스위스 콘츠탄츠 공의회를 개최하여 3명의 교황을 모두 폐위하고, 마르티누스 5세를 선출하면서 급한 불을 끄려 했다. 그러나 막상 새 교황이 개혁 법안을 거부하자 속수무책이었다. 3년간 진행되던 공의회는 장고 끝에 악수를 두었다. 1415년 죽은 영국의 성직자이자 옥스퍼드 대학교수인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의 뼈를 파헤쳐 화형에 처했다. 그는 법을 어기면서까지 소수 사제의 전유물인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첫 번째 인물이다. 교회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던 그는 살아 있을 때 면했던 화가 죽은 지 31년째 되던 해에 들이닥쳤다.
공의회는 같은 해 7월, 이번에는 살아 있는 얀 후스(John Huss)와 프라하의 제롬(히에로니무스 프러포겐시스)을 화형에 처했다. 대립교황 요한 23세가 자신을 향한 비난을 돌리려는 계책을 지기스문트가 방조했기 때문에 벌어진 불행이었다. 프라하 대학의 총장이 된 후스는 위클리프의 저서에서 감명을 받은 보헤미아의 종교개혁가로, 교회의 타락을 비판하면서 유일한 권위가 성서에 있다고 소리를 높였다. 지기스문트 황제가 그에게 안전을 보장하는 통행증을 발급하여 공의회에 참석시킨 후 이루어진 비겁한 처형이었다. 황제의 함정은 보헤미아의 반가톨릭 운동에 기름을 부어 ‘후스 전쟁(1419년~1434년)을 유발했다. 교황 군과 황군이 합세하여 세 차례 진압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그 결과, 내분이 벌어지기도 했던 후스파(派)가 빵과 포도주에 의한 성체배령(聖體拜領)을 인정받는 등 부분적으로 목적을 달성하였다.
이런 차제에 레오 10세가 면죄부를 대량 판매했다. 그가 서른일곱 살에 교황이 되었을 때 하느님이 자신에게 준 직위니 “그 역할을 마음껏 즐겨 보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앤드루 마, <세계의 역사>) 그러나 외적 즐거움에 여념이 없었던 레오에게도 골칫거리가 있었으니 바로 성 베드로 성당(산 피에트로 대성당, San Pietro Basilica) 설립 문제였다. 율리우스 2세가 벌인 일로, 354년에 헌당식을 가진 기존의 건물이 너무 낡아 나름 당위성을 인정받고 있었다. 또한, 면죄부 혹은 면벌부(免罰符)는 십자군 종군 당시 병사에게 주어진 보상으로 출발했다. 이전에도 줄기차게 비난을 받아왔던 문제이며, 레오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나온 제도가 아니라는 의미다. 적어도 300년간 존속해 온 관행으로서 레오가 다시 공포했을 뿐이다.
다만 라파엘로의 감독 아래 추진되고 있는 성당 건립은 당시 엄청난 액수의 돈을 빨아들여 교황청 재산을 모두 바닥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 결국, 생각해 낸 결론이 더 많은 면죄부를 더 비싼 값으로 팔아서 기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바닥 수준의 통찰력을 드러낸 짓으로, 그는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채 최악의 시기에 가장 쉬운 방법을 선택했다. 루터가 활동한 작센에는 도미니코 수사 요한 테첼이 교황을 대신하여 협박적인 설교를 펼쳤다. 그곳엔 알프스 산맥을 피하고자 하는 신자를 위해 똑같은 면죄부를 얻을 수 기회가 있었다. 그는 연옥에서 수백, 수천 년을 고통받고 싶지 않으면, 돈을 내놓으라며 이렇게 기만했다.
“돈궤에 돈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연옥에서 한 영혼이 해방될지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사이자 신학과 교수인 마르틴 루터(1483~1546) 때에 이르러서야 대중의 호응이 폭발적이었느냐는 합리적인 의문이 생긴다. 흔히 인쇄술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그러나 루터가 태어나기 30여 년 전 마인츠의 구텐베르크(요하네스 겐스플라이슈)와 하를럼의 로랑 코스테르를 필두로 독일 북부 지역에서는 이미 활판인쇄 기술자들이 꽤 많았다. 1455년 <구텐베르크 성경>이 인쇄되었다. <36행 성서>와 <42행 성서>다. 낱글자가 독립된 가동활자(금속 합금 주물로 만들어진 글자들을 단어로 조합한 후 템플릿으로 함께 고정해 하나의 활자 면이 완성)로 제작된 유럽 최초의 책이다. 필경사가 한 권의 성경을 쓸 시간에 구텐베르크는 180권을 제작했다.
1462년을 기점으로 마인츠 시가 약탈되자 인쇄공들이 라인강을 건다. 덕분에 인쇄술이 퍼져 1480년경에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 인쇄기가 보급되었다. 그리고 1500년쯤에는 대략 천 대의 인쇄기가 최소 236개 지역에서 가동된 것으로 집계된다. 여하튼 루터의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독일어로 쓰인 성서의 판본만 19개였고, 프랑스어로 번역된 구약성서는 24개 판본이 존재했다. (뤼시앵 페브르·앙리 장 마르탱, <책의 탄생>)
성서의 자국어 번역은 간단치 않은 문제다. 교회는 라틴어를 공통어로 강요했고, 그 해석을 독점적으로 주재했다. 언어의 독점은 권력의 독점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자국어 성서는 교회의 독점적 해석을 무너뜨리기 위한 선결 과제였다.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기능 외 교회와 맞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배경을 조성했다. 이런 배경에서 루터도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으나 16세기부터 유럽에서 자국어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했으니 시대를 앞섰다고 할 수 있다.
인쇄술이 종교개혁의 발전에 동력이 되었다는 주장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갑작스럽게 조성된 환경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인쇄술이 특별히 루터의 인쇄물만을 빨리 전달했을 리가 없다. 이런 측면에서 구텐베르크가 교회의 면죄부 역시 찍어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구텐베르크를 움직인 것은 한마디로 돈이었다. 당시 종교 서적은 독자층이 두터워 위기에도 판매량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출판물이었을 뿐이다. 1500년대 이전 인쇄본 전체의 77%가 라틴어 서적이었고, 종교 관련 서적이 약 45% 정도를 차지했다.
필사본에 의존했던 교회에서도 인쇄술에 감동했다. 그러나 성경 등 종교 서적의 확산에 대한 교회의 낙관적인 전망이 빗나갔다는 점을 먼저 지적하고 싶다. 책값이 싸지면 독자가 늘어나리라는 예상은 맞았으나, 새로 성경을 읽게 된 사람들이 성서에 대한 교회의 해석을 비판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자크 아탈리, <인류는 어떻게 진보하는가>)
오히려 루터가 인쇄업의 번영을 촉진한 측면이 있다. 당시 종교 서적의 인기는 이전 세기 비종교 서적보다 더 넓은 독자층을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차제 루터로 인해 상황이 돌변했다. 그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성(城) 만인성자교회(제목 사진 참조)의 떡갈나무 문에 ‘95개 논제를 제시한 반박문을 벽보 형식으로 붙였다. 당시 벽보와 유인물 등 선전홍보물은 오늘날 신문과 잡지의 전신이다. 루터는 인쇄술을 활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전파할 줄 알았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이와 병행하여 루터는 반박문 내용을 독일어로 간략하게 요약하여 역시 벽보 형태로 전역에 배포했는데, 불과 2주 만에 그 내용이 도처에 알려졌다. 대중의 반응은 루터의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대중의 목말라 하는 욕구를 그가 대신 분출해 주었기 때문이다. 독일 전역에 개혁의 불길이 타올랐고, 루터는 소위 ‘돈이 되는 작가’로 등극했다. 1520~1530년 동안 배포된 소책자의 수가 약 630개로 집계되었다. 루터의 저서는 1518년에서 1535년 사이에 판매된 독일어책 가운데 1/3 이상을 차지했다. 이 시기의 출판물은 루터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뤼시앵 페브르·앙리 장 마르탱, <책의 탄생>)
이쯤 해서 다시 1439년 피렌체 공의회 때로 거슬러 올라가 볼 필요가 있다. 당시 비잔틴의 성직자와 학자, 그리고 희귀 사본들을 통해 동방의 ‘신지식’이 대거 이탈리아반도로 유입되었다. 대부분 교회 역사와 관련된 사실들로, 로마의 언어학자이자 인문학자인 로렌초 발라(Lorenzo Valla)에 의해 초대 교황 베드로에게 있다는 수장권(首長權)의 근거가 무너졌다. (스티븐 그린블랫의 <1417년, 근대의 탄생>) 메디치 가문이 지녔던 구식 인쇄기로 제작된 관련 서책들이 어느덧 북유럽 사회까지 파고들었다. 이렇게 인쇄술은 읽고 쓰는 능력과 더불어 동 시대인들의 의식에 대변혁을 초래했다. 코시모도, 로렌초도, 더 나아가 레오 10세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게다가 엄청난 인구를 휩쓸고 지나간 페스트로 인해 유럽 전역은 인류의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분위기에 휩쓸렸다. 그 꼭짓점에서 루터가 화약 더미에 불을 지폈다고 볼 수 있다. 자신과 자신을 지지하고 숨겨주는 모든 자를 파문에 처하겠다는 교황의 교서도 1520년 함께 불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