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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Oct 25. 2021

종교개혁 이후 교회 미술의 후퇴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풍경화

교회 미술의 후퇴


제2차 교회의 분열은 유럽 대륙의 정치·경제에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더불어 미술의 유통 체계를 붕괴했다. 비록 루터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를 추종했던 군중에 의해 들불처럼 번진 ‘성상 파괴 운동’ 때문이었다. 이 문제의 출발점은 1세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엘비라 공의회에서 그림을 전면 금지한 바 있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인정받은 391년 이후에는 이전의 모든 신앙은 이단으로 취급되었고, 화가들이 무엇을 그려야 하는지를 지시하고, 어떤 모양새를 갖춰야 하는가에 대한 결정권을 행사했다. (플로리안 하이네, <거꾸로 그린 그림>) 

기본적으로 신앙심과 존경심은 하나님과 성인들을 위한 것이지 그림이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그 그림이라는 것이 우상이나 이교도들의 신상과 너무나 비슷했다. 따라서 교회에 어떤 조상(彫像)도 허용되지 않았다. 최초의 교회사가(敎會史家) 유세비우스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누이가 예수의 화상을 한 점 보내 달라고 했을 때 ‘신의 화상을 만드는 행위는 이교도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거절했다는 기록을 갖고 있다. (오브리 메넨, <예술가와 돈, 그 열정과 탐욕>)


그러나 서로마 지역 사람들은 회화에 대해서 생각을 달리했다. 대부분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림은 교화를 위한 최고의 매체였다. 특히 이제 막 개종한 라틴계 이교도들이 받아들인 하느님의 가르침을 회중에게 상기시키고, 또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 여겼다. 6세기 말 대교황 그레고리우스(재위 590~604)는 마치 어린이들을 위한 그림책처럼 유용하다고 주장했다. (E.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따라서 ‘교회에 있어서 미술의 정당한 목적이 무엇이냐’라는 문제는 유럽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제1차 로마와 정교회 간 동서 교회의 분열 때도 성상 파괴 문제는 주요 갈등 요인으로 작동했다. 이콘(그리스어 icon, 판화 형식의 예배용 성상) 정도만 허용했던 동방정교회는 로마 교회와 대립했다. 그리고 동로마 교회 중에서도 어떤 일파(一派)는 종교적인 성격을 갖는 모든 형상에 반대했는데, 이들을 성상 파괴주의자 또는 우상 파괴자라고 불렀다.


이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항거’라는 의미의 라틴어 protestatio에서 유래)들이 서유럽 내 지나치게 화려해진 교회 미술을 다시 우상 숭배라고 지적했다. 달은 안 보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집중함으로써 성서의 순수성을 해친다는 의미지만, 불신과 경멸이 내포되어 있다. '가장 아름다운 치장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었던 장 칼뱅이 가톨릭 교회를 가리켜 '의식과 치장의 추잡한 극장'이라 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스텔라 폴, <컬러 오브 아트>) 다른 측면에서는 교회 미술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자국어로 된 성경 등 종교 서적을 직접 접하게 된 차제, 교회 미술이 라틴어 성경을 못 읽는 신자를 위한 시각 언어라는 논거가 상당 부분 훼손되었다는 주장이다. 백 번 양보하여 교회에 머무르고 있는 신이 특정한 미적 취향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다. 

그러자 신교가 활성화된 독일 지역에서는 교회 미술이 삽화 형식의 판화로 대체되어 대중에게 보급되기 시작했다. 사실 목판화 삽화는 필사본 시절에 유행한 장르이다. 반 에이크와 반 데어 바이든도 필사본으로 된 목판화를 지녔다. 그러나 첨단 기술인 활판 인쇄 초기에는 기술적 어려움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15세기 후반 인쇄된 본문과 목판화 삽화를 결합하는 방법이 발견되면서 활판 인쇄로 제작한 책 속표지에 목판화 삽화를 한 개 정도 실을 수 있었다.

<뉘른베르크 연대기> 중 '빌람과 천사'

1493년 하르트만 셰델(Hartmann Schedel)의 <세계 연대기>가 출간되면서 삽화는 전환점을 맞이한다. 지역 이름을 따서 <뉘른베르크 연대기>로 알려진 이 서적은 인쇄물 사상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이 책자에는 전례 없이 600점 이상의 삽화가 사용되었다. (뤼시앵 페브르는 <책의 탄생>에서 약 2,000장의 판각을 주문했다고 전한다) 이 정도의 양이면, 장식용이 아니라 독자적인 삽화 출판물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 이 책의 목판화 삽화는 셰델을 가르친 미하엘 볼게무트(Michael Wolgemut)와 빌헬름 플라이덴브르프가 제작했다. 뉘른베르크는 화가 뒤러가 마침 활동하던 곳으로, 1486년에서 1490년 사이 볼게쿠트와 함께 일한 것으로 보인다. (플로리안 하이네, <화가의 눈>) 여기 동참한 인쇄전문가 안톤 코베르거(Anton Koberger)는 훗날 <성녀 브리짓타의 고백(1500)>, <흐로스비타 작품선(1501)> 등을 제작할 때 뒤러의 판화를 삽화로 이용하기도 했다. 

독일 활판 인쇄공들은 고국을 떠나 멀리 가서 일하는 경우가 많아 삽화가 들어간 책이 유럽 각지로 전파될 수 있었다. 뒤러가 수많은 책의 목판화 삽화와 이어 질감과 세밀함이 뛰어난 동판화 삽화를 제작함으로써 유럽 전역에 자신의 명성을 높였다. (이언 자체크, <미술사 연대기>) 목판화와 동판화는 제작 방법이 정반대이다. 목판화는 나타내고자 하는 선 외에는 모두 다 파내야 한다. 반면 동판화는 뷰린(burin)이라는 특수한 조각칼로 동판을 눌러 긁는다. 그리고 표면에 새긴 선 위로 물감이나 인쇄 잉크를 바른 후 동판 표면을 깨끗하게 닦아낸다. 그 다음 동판을 종이에 힘껏 누르면 뷰린으로 새긴 선 속에 남아 있던 물감과 잉크가 종이에 묻어 나온다. 뷰린으로 선의 깊이와 강도를 조절하는 기술을 습득하기만 하면, 목판화보다 훨씬 풍부한 세부 묘사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E.H.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풍경화로도 분류하는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의 <이수스 전투(1529)>

모든 생명체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도래하면, 이에 대처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다양성을 발휘한다. 교회 분열 이후 미술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텐베르크에서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가 루터와의 친분에 힘입어 그의 소책자 작업에서 판화를 제작했다. 레겐스부르크의 화가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Albrecht Altdorfer)는 풍경만으로 많은 동판화를 남겨 새로운 변화를 이끌었다. 한스 홀바인은 직접 판화를 새기지는 않았으나 뤼첼부르거 같은 판화가들이 그가 그린 밑그림을 매우 능숙하게 판화로 표현했다. 동판화의 발달과 기술 확산은 위대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을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 급속히 전파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북유럽의 중세 미술에 종지부를 찍는 요인의 하나로 작용했다. 르네상스 미술의 승리라 할 수 있겠다. 한편, 홀바인을 비롯한 몇몇 명망 있던 화가들은 생계의 위협을 벗어나기 위해 해외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남아 있던 화가들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북유럽 미술은 새로운 후원자의 취향에 따라 풍경화, 정물화, 그리고 민속화 등의 장르가 발전했다. 특히 공화정 체제의 네덜란드에서는 수백 년간 주요 고객이었던 절대 군주가 사라짐으로써 새로운 취향을 가진 부르주아 계층을 위한 ‘시민적 바로크’ 양식으로 발전한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풍경화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에서 풍경은 인물과 사건의 배경을 장식하는 역할에 불과했다. 그러나 플랑드르에서는 일찌감치 풍경화가 하나의 독립적인 장르로 대접받았다. 그중 가장 독특한 풍경화를 그렸던 화가가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다. 같은 플랑드르(네덜란드) 화가지만, 얀 반 에이크 작품과 큰 차이를 보인다. 로베르 캉팽의 <성처녀의 구혼>이나 판 데르 베이던의 <십자가 강하> 같은 종교화와 공통점을 찾기 어렵다. 


<지상의 환락 정원(1504?)>

그의 대표작 <지상의 환락 정원>은 요즘도 패러디할 정도로 독특하고 현대적이다. 좌에서 우, 세 폭에 천국-지상-지옥을 각각 표현했다. 그리고 각각은 원근법을 이용하여 아래에서 위로 다시 삼등분했다. 첫 번째 그림의 주제는 ‘에덴동산’이다. 가운데 가장 큰 제단화는 지상의 인간세계, 즉 그림의 주제인 ‘세속적 쾌락의 동산’이다. 마치 놀이동산 같다. 하지만 타락해가는 인간 군상이 소개된다. 쾌락의 결과가 지옥이라는 뜻일까? 맨 마지막 화폭엔 나무 인간을 중심으로 한 지옥의 세계를 섬뜩하게 담아놓았다. 화면 구석구석 자신들이 저지른 죄로 인해 잔혹한 고통을 받고 있는 인간 군상들이다. 현실적인 고통과 공포를 적나라하게 담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thias Graünewald)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1515)>와 좋은 대조를 보인다.

주류에서 멀리 떨어진 소도시에서 작품 활동을 해서일까, 아니면 천문학과 점성술 그리고 여행 서적에 심취해서일까? 기상천외한 초현실의 기이한 세계를 그렸으며, 해석도 무척 난해하다. 처음에는 그를 괴물과 키메라의 발명자 정도로만 생각했다. 조금 뒤 “놀랍고 기묘하다”는 평으로 발전하였으나 감상하기에 불편한 점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리비도에서 창출한 초현실주의 성향은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떠올리게 한다. <월리를 찾아라> 형태의 전체적인 화풍은 피터 브뤼헬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죽음의 승리(1560?, 제목 사진)>는 마치 연작처럼 주제가 동일하다.

* Libido : 성 본능으로 번역되며, 프로이트 정신 분석학의 기초 개념으로, 이드(id)에서 나오는 정신적 에너지를 지칭한다.

 

그의 삶의 터전이자 작품 무대인 스헤르토보스는 오늘날 벨기에 국경에서 가까운 네덜란드의 조용한 도시이다. 그의 이름도 이곳 지명에서 따왔다. 보스가 살던 시절에는 부르고뉴 공국의 영토인 브라반트 지역의 가장 큰 4개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이곳은 신앙의 도시로, 보스는 성모를 섬기는 형제단의 일원이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그와 관련된 기록이 거의 없어 작품의 시기가 부정확하다. 이 작품에는 인간을 부정적으로 보는 중세의 시각, 즉 인간의 죄악과 어리석음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그의 작품 절반 이상이 성인들의 삶과 그리스도의 생애, 특히 수난과 관련된 에피소드 등 전통적인 기독교 주제들을 다루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월터 보싱, <히에로니무스 보스>) 

그런데 <지상의 환락 정원>을 감상하려면, 네덜란드가 아니라 의외의 장소인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프라도 미술관으로 가야 한다. 이 지역을 소유했던 에스파냐의 음울한 국왕 펠리페 2세가 이 그림을 포함 그의 작품 여러 점을 샀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로부터 스페인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무적함대’를 앞세워 신대륙 식민지를 포함한 광대한 대륙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가톨릭을 수호하겠다며 북유럽 프로테스탄트 국가들과 전쟁을 불사하였고, 이로 인한 과다한 재정 지출로 스페인의 국가 파산을 초래했다. 그리고 종교적 경직성으로 인해 16세기 말엽 작품은 “이단적인 색채에 물들었다”는 주장에 휩쓸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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