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나가던 잉글랜드가 삐끗했다. 1428년 오를레앙 포위전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전쟁 자금이 부족한 형편에서 솔즈베리 백작을 사고로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도팽 측에는 ‘신의 부름을 받았다’는 열여섯 살 양치기 소녀가 전선에 나타났다. 오를레앙의 처녀 잔 다르크(1412~1431) 한 명의 등장으로 전쟁 판도가 거짓말처럼 완전히 뒤집혔다. 분석컨대, 지도력 부재에 시달렸던 도팽파 병사들에게 그녀가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준 결과이다.
1429년 90일간 지속한 공성전 끝에 마침내 적의 포위망을 뚫었다. 잔 다르크가 양 떼를 지키다가 들은 신의 계시를 실천한 것이다. 그녀는 도팽을 설득하여 7월 17일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샤를 7세가 공식 등극하는 동안 그녀는 한 손에 군기를 든 채 국왕 옆에 시립했다. 그녀는 5개월 내에 모든 소명을 완수했고, 정통성을 확보한 샤를은 자신감을 회복했다.
이후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대로 진행되었다. 1430년 5월 23일 콩피에뉴 외곽에서 교전 중 잔 다르크는 부르고뉴파의 뤽상부르 백작에게 잡혔다. 그녀는 잉글랜드 측에 인도되어 루앙에서 마녀재판을 받고 1431년 5월 30일 화형에 처해졌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열아홉 살이었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샤를 측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1435년 샤를 7세는 부르고뉴 필리프와 화친을 맺음으로써 내란은 종료되었다. 부르고뉴라는 지지대를 잃은 잉글랜드는 산발적인 전투를 벌였으나 1444년 투르에서 멘을 양보하는 조건으로 2년간의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샤를은 전쟁을 통해 눈에 띄게 성장했다. 휴전 기간 중 풍부해진 재정을 바탕으로 상비군을 모집했고, 군사 개혁에 착수했다. 1449년, 때맞춰 잉글랜드가 샤를을 거들어 주었다. 잉글랜드가 브르타뉴 요새를 침공하여 먼저 휴전을 깨트린 것이다. 샤를은 전문화된 전력과 개량한 대포를 앞세워 루앙으로 입성했다. 1450년 4월 15일 포르미니 전투에 승리하며 노르망디 전역을 재정복했고, 1451년 마지막 잉글랜드 땅 기옌으로 쳐들어갔다. 잉글랜드는 1453년 7월 17일 카스티용에서 일흔다섯 살 백전노장 틸벗이 분전했다. 그러나 프랑스에는 포술 전문가 장 뷔로가 있었다. 그의 십자 포화와 컬버린 소총을 이겨내지 못하고 틸벗은 전사하고 말았다. 10월 19일 기옌의 수도 보르도가 마침내 무조건 항복했다. 백년전쟁은 이렇게 프랑스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끝이 안 보이던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백년전쟁은 거짓말처럼 결말이 났다. 그러나 전쟁을 치르면서 많은 봉건귀족이 죽거나 몰락했다. 국왕의 권력이 그 공간을 채웠다. 중앙집권제의 절대 왕정이 세워지는 계기가 조성된 것이다. 그리고 국가와 국민이라는 인식이 싹터 기존의 용병을 상비군으로 대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양국의 중앙집권화의 모양새가 같은 듯 달랐다. 잉글랜드는 1215년 마그나 카르타 이후 입헌군주국으로 꾸준히 발전했다. 반면 프랑스는 국왕의 독점적 권력을 삼부회가 견제하는 체제를 갖추었으나 명목상으로만 존재했다. 왕권신수설을 기반으로 계급의 장벽이 높았다. 삼부회가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때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때에 이르러서이다.
패전국 잉글랜드에서는 전쟁에서 터득한 전투 기술을 내란, 즉 ‘장미 전쟁(1455~1487)’에서 유감없이 발휘했다. 흰 장미 문장의 요크 가문이 부상하여 붉은 장미 랭커스터 가문과 싸웠다. 다시 수많은 봉건귀족이 죽었다. 30년에 걸쳐 힘을 소진한 가운데 헨리 7세가 이를 수습하면서 중앙 집권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자 기옌 수복을 꿈꾸면서 1492년 프랑스를 침공했다. 그의 아들 헨리 8세도 프랑스 왕위를 얻어 잉글랜드 랭커스터의 이중 왕조를 되살리려 했다. 심지어 잉글랜드 군주들은 마지막 교두보였던 칼레를 상실한 뒤에도 1802년 아미앵 화약 때까지 계속해서 프랑스 국왕임을 자처했다. (데즈먼드 수어드, <백년전쟁 1337~1453>) 하지만 의외의 경제적 실속을 챙겼다. 전쟁을 피해 유입된 플랑드르 양모 기술자로 인해 모직물 산업은 원료에서 생산까지 원스톱 시스템을 갖추었다. 따라서 모직물 생산의 중심지가 플랑드르에서 요크셔로 이동했다. 훗날 모직이 면직 산업으로 대체되면서 산업혁명을 이루게 된다.
마지막으로 전쟁 막바지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부르고뉴 공국의 외교적 선택에 주목해야 한다. 앞으로 기술할 플랑드르 미술을 잉태한 곳이기 때문이다. 잔 다르크를 팔아먹으면서 잉글랜드 편에 선 ‘선량공’ 필리프 3세가 샤를 7세와 아라스 조약을 체결했다. 23세의 필리프가 검은 상복을 입고(‘블랙 패션’의 시작) 부친의 복수를 벼른 지 16년 만에 이룬 결과였다. 필리프는 넓은 지역의 영유권과 함께 왕에 대한 신종(臣從)의 예를 평생 면제받음으로써 프랑스와의 수직관계를 청산했다고 믿었다.
플랑드르는 샤를에게도 중요했다. 유럽 최대의 모직물 산업단지로 그 타격이 프랑스 경제로 직접 이어졌다. 샤를은 자신의 후원 세력이었던 아르마냐크파를 버리고 전략적 완충지를 끌어안음으로써 전쟁에서 승리했다. 잉글랜드로서도 필리프의 배신에 치를 떨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공기술과 생산 설비를 갖추고 있는 플랑드르는 대체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부르고뉴는 다시 프랑스와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샤를 7세는 필리프에 대한 감정을 거두지 않았다. 필리프는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지만, 힘도 써보지 못하고 1467년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담대공’ 샤를 1세(샤를 르 테메레르)가 1468년부터 영토 문제를 둘러싸고 유럽 최초의 상비군을 창설한 프랑스의 루이 11세와 싸웠다. 샤를은 잉글랜드 마가렛과 결혼하면서 그녀의 오빠 에드워드 4세(재위 1461~1470)를 부추겼다. 그러나 1475년 영국군이 패했고, 샤를도 자신의 꿈을 이루지는 못한 채 1477년 낭시(Nancy)에서 전사했다.
죽은 샤를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루이 11세로서는 행운이었다. 부르고뉴 공국의 영토 중 왕자령인 부르고뉴와 피카르디 지역을 환수했다. 고삐를 더욱 좼다. 부르고뉴의 스무 살 된 딸 마리에게 일곱 살이던 자기 아들 샤를과 혼사를 치르라고 협박했다. 그러나 그녀는 합스부르크 가문인 오스트리아 막시밀리안 1세와 혼인함으로써 플랑드르를 혼수품으로 바쳤다. 유럽의 정치 판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1482년 이번엔 마리가 아들 필리프와 딸 마르그리트를 남겨두고 낙마로 사망하자 루이는 왕세자 샤를(훗날 샤를 8세가 된다)과 마르그리트와 혼약을 기어이 성사시켰다. 프랑슈콩테와 아르투아까지 가져오면서 1483년쯤 부르고뉴는 결국, 프랑스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샤를 8세의 영토욕도 대단했다. 브르타뉴 여공작 안이 홀아비가 된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하려 하자 이를 막기 위해 마르그리트와의 약혼을 파기했다. 그녀의 영토를 돌려주는 대신, 1491년 안과 결혼을 통해 브르타뉴 공작령까지 병합했다. 그것도 성에 안 찬 샤를 8세는 1494년 나폴리 왕국을 차지하려고 이탈리아반도로 향했다. 이탈리아 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