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1096~1291)이 종료되고 조반니 디 비치가 메디치 가문을 일으켜 피렌체 르네상스를 선도할 때쯤 알프스 이북에서 지난한 전쟁의 서막이 열렸다. 매우 안 좋은 시기에 벌어진 전쟁이었다. 1300년경부터 유럽은 추워지기 시작했다. 1315년 부활절이 지나고 3주 뒤부터는 엄청난 비가 오래도록 내렸다. 유럽 북부 지역의 마을은 절망적이었고, 1316년 말경 농부들과 노동자들은 결국, 거지가 되었다. 결정적으로 1348년의 흑사병이 유럽 공동체를 무너트렸다. (강유원, <책과 세계>)
1337년 5월 24일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는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의 기옌 땅을 몰수한다”라고 선언했다. 보르도 지방이 속한 당시 기옌(프랑스 남서부의 피레네 산맥 북쪽 아키텐 분지를 포함하는 지방의 옛 이름) 공국은 프랑스 국왕의 직접 통치에서 벗어난 지방이었다. 유럽 최대 포도주 생산지로, 척박한 잉글랜드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또한 가스코뉴 어를 사용하는 그곳 주민들은 잉글랜드인을 자처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자 그해 10월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는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가 ‘프랑스 국왕을 참칭한다’며 공식 서한을 보내 왕위가 자기에게 있다고 맞섰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발발한 전쟁이 아니었다. 양측은 충분히 예상했고, 나름대로 준비 끝에 벌어진 일이다. 그래서 1453년까지 116년 동안 양국은 5대에 걸쳐 전투와 휴전을 되풀이했다.
전쟁의 명분은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처럼 보인다. 1328년 프랑스 카페(Capet) 왕조의 마지막 혈통인 샤를 4세가 죽으면서 시작되었다. 세 명의 후보자가 있었지만, 영국 국왕 에드워드 3세가 적통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삼부회는 선왕의 사촌에 불과한 필리프 드 발루아가 프랑스 왕국에서 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선택되었다. (앙드레 모루아, <프랑스사>) 에드워드의 문제 제기 역시 새삼스러웠다. 필리프가 즉위한 지 9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였다. 물론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1300년대로 접어들기 직전부터 프랑스 왕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지배자로 부상해 있었다. 로마 교황마저 1309년 로마에서 프랑스로 이주하도록 강제할 정도였다. 1330년대 프랑스 인구가 약 2,100만 명으로 추정되었는데, 당시 잉글랜드 인구의 다섯 배에 해당했다. (데즈먼드 수어드, <백년전쟁 1337~1453>)
따라서 실리를 택한 에드워드는 필리프의 요구에 따라 프랑스령 기옌 공국과 퐁티외 지방을 걸고 충성 선서를 했다. 심지어 1331년 3월에는 발루아 왕가에 신의와 충성을 바치겠다는 문서를 받아들였다. 자신이 신하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인정한 행위였다. 그가 충성 서약을 거부한다면, 아버지 에드워드 2세 때처럼 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백년전쟁은 오늘날 프랑스 역내 잉글랜드 영토를 둘러싼 분쟁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이 땅의 소유권을 이해하려면, 이번엔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이킹으로 알려진 루스 족이 번창했던 시대로 되돌려야 한다. 그들이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Normandie, ‘북쪽 사람이 사는 곳’이란 뜻)에 정착한 지 약 100년 후인 1066년, 윌리엄 공작이 루앙 지방을 출발하여 잉글랜드를 정복했다. 그는 잉글랜드 지배계급에 프랑스어인 노르망어를 강요하고, 자신은 노르망디 공과 영국 왕을 겸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연유로, 잉글랜드의 앵글로 노르만 왕조는 프랑스인이라고 할 수 있으며, 노르망디 공국은 도버해협을 끼고 잉글랜드와 프랑스에 걸쳐 있는 영토였다.
결과적으로 잉글랜드 왕은 기옌 지방에서 '프랑스 국왕의 제후'라는 이중구조를 갖는다. 반면 프랑스 왕 입장에서도 자신의 왕국 내 강대한 이웃 국왕이 신하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위협을 느꼈다. 당연히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 영토를 둘러싼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13세기 말에는 잉글랜드 국왕이 프랑스 내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는 때도 있었다. 예를 들어 아버지 헨리 2세에 맞서 왕위를 빼앗은 사자왕 리처드 1세의 경우 정식 직위가 ‘영국 왕, 노르망디 공작, 앙주 백작, 아키텐과 가스코뉴(기옌) 공작, 푸아티에 백작’이었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전쟁의 원인을 찾아보면, 두 가지 측면이 서로 맞물린다. 프랑스 필리프 6세가 잉글랜드에서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기옌 지방을 도모하려고 기회를 모색하고 있었다. 따라서 필리프가 잉글랜드를 유럽 대륙에서 몰아내려는 의도 아래 저질러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프랑스 측에서는 현실적이고 냉정한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노리면서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 증거로 사전 준비에 철저했던 잉글랜드가 전쟁 초기 압도적으로 우세했다는 점을 꼽는다.
잉글랜드는 플랑드르와 기옌 공국의 보르도 지방을 목표로 했다. 첫 전투인 슬라위스 해전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에드워드 3세가 직접 병력을 이끌고 1346년 노르망디로 상륙하면서 캉을 공략했고, 카엔 전투와 블랑셰타크 전투에서 연거푸 승리했다. 무기 체계에서 압도적으로 앞섰다. 잉글랜드 군의 장궁은 화살을 갈아 거는 속도에서 월등하게 뛰어났다. 프랑스군이 석궁 한 발을 발사하는 동안 6인치 자루로 이루어진 장궁은 대여섯 발을 쏠 수 있었다. 게다가 장궁은 14세기 후반에는 400야드 거리까지 치명타를 입힐 수 있었다. 살상력에서는 석궁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쇠미늘 갑옷을 관통할 수 있었다. (마이클 하워드, <유럽사 속의 전쟁>) 반면 프랑스군은 기사도를 앞세우며 기사 간 전투를 고집하면서 공격 대열이 무질서했다.
잉글랜드 보병은 1346년 8월 26일 토요일 크레시 전투에서 거의 세 배나 많은 필리프 6세의 프랑스군을 궤멸시켰다. 서양사에 길이 남을 대승이었다. 1356년 프랑스 중남부 도시 푸아티에에서 잉글랜드 흑태자 에드워드와 프랑스의 새로운 국왕 장 2세와 맞붙었다. 양상은 크레시 전투와 흡사하게 전개되었다. 결국, 병력이 네 배나 많았음에도 장 2세가 포로가 되는 수모를 겪었다. 잉글랜드는 1360년 브레티니 화약(和約)에 따라 기옌 지방을 포함 푸아투, 페리고르, 리무쟁 등 프랑스 영토의 1/3을 차지했다.
그러나 잉글랜드가 방심했다. 프랑스 지방을 약탈하여 값비싼 전리품을 확보하고, 인질들의 몸값을 두둑하게 받아내어 흥청망청 써댔다. 그 사이 1364년 새로 샤를 5세가 즉위했다. 그는 먼저 내정에 힘써 초기 절대왕정의 기틀을 마련했다. 1369년 11월, 샤를이 잉글랜드 흑태자의 아키텐 영지를 몰수함으로써 전쟁이 재개되었다. 프랑스군은 전면전을 피하고 급습과 매복, 야간 공격으로 구성된 전술을 택했다. 1377년 6월 21일 에드워드 3세가 죽자 가공할 만큼 성장한 해군 4,000명을 실은 프랑스 함선 50척이 영국해협을 건넜다. 라이를 약탈했고, 내륙 루이스를 불태웠다. 잉글랜드인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프랑스는 잉글랜드가 정복했던 많은 땅을 되찾았다.
반면 열두 살 어린 나이에 왕위를 이은 샤를 6세가 허약한 혈통에 무절제한 생활로 피로가 겹치면서 광기를 드러냈다. 그는 잉글랜드의 리처드 2세와 마찬가지로 미성년자였다. 차제 프랑스 중심부에 있던 부르고뉴 공국의 필리프 2세(재위 1363~1404)가 1384년 플랑드르의 유일한 상속녀 마르그리트 3세와 결혼했다. 현재의 베네룩스 3국 전역을 지배하게 된 그는 독일-프랑스 접경지대인 알자스 로렌까지 점령하면서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변수로 급부상했다. 게다가 그의 통치 중심은 점점 플랑드르 지방으로 이동했다. 한편 전투가 오랫동안 답보 상태를 보이는 가운데 1389년 6월 18일 칼레 근처 루링겐에서 양국은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열 살에 왕위에 오른 잉글랜드 리처드 2세는 필리프 2세의 주선으로 샤를 6세의 아홉 살 딸 이사벨과 결혼했으나 반대파로부터 지나치게 프랑스에 경사되었다는 불만을 샀다. 결국, 1399년에 폐위되었고 헨리 4세가 즉위했다. 이로써 랭커스터 왕조의 시대가 열렸다. 프랑스는 정신병을 앓고 있던 샤를 6세가 발작이 매우 잦아져 통치가 어려워졌다. 그러자 섭정의 자리를 놓고 부르고뉴 공과 오를레앙 공이 대립했다. 1407년 필리프의 아들 장이 1407년 그의 종형인 오를레앙 공 루이를 암살했다. 죽은 루이의 아들 샤를이 아르마냑 백작의 딸과 결혼하여 부르고뉴 공에 대항했다. 두 세력은 다투어 적국 잉글랜드 측에 지원 병력을 요청하는 기괴한 상황을 연출했다.
헨리 4세의 아들 헨리 5세가 기회라고 판단했다. 1415년 8월 11일 함대의 닻을 올렸다. 그의 전쟁 준비는 치밀했다. 병력의 1/3 가량 손실을 보았음에도 아르플뢰르를 얻었다. 칼레를 향해 260km 행군을 강행하여 아쟁쿠르에서 전투를 벌였다. 병력에서 절대 열세였으나 위치 선정과 전술 능력에서 앞서 승리했다. 1417년 8월 1일 다시 투크 강어귀로 상륙한 잉글랜드 군은 9월에 캉을 정복했고, 아르장탕과 알랑송을 장악했다. 거칠 것이 없었다. 1419년 아름다운 도시 루앙을 접수했다. 우세 속에서도 헨리는 프랑스 내 부르고뉴 파와 결속을 단단히 했다.
그러나 자신을 프랑스 국왕으로 받들겠다고 약속한 부르고뉴 공작 장(Jean)이 사망했다. 1419년 도팽(프랑스 황태자, 훗날 샤를 7세가 된다)의 친구 샤텔에 의해 파리 몽트로 다리에서 살해당했다. 그의 아들 필리프 3세는 비탄과 분노에 이를 갈았다. 잉글랜드와 부르고뉴는 도팽과 아르마냐크 파를 징벌하는 데 힘을 모았다. ‘도팽을 참칭 하는 자’와 아르마냐크 파가 점령한 모든 영토를 정복해 나갔다. 1420년 9월 1일 헨리 5세와 부르고뉴의 필리프, 그리고 샤를 6세가 성대한 의례와 함께 파리에 입성했다. 잉글랜드의 15년 파리 점령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424년 8월 17일 베르뇌유 전투가 벌여 도팽과 스코틀랜드 연합군을 물리쳤다. 국민국가로서 체계가 잡히지 않은 이 시기가 잉글랜드로서는 프랑스를 합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