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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Nov 01. 2021

뒤러의 판화와 지적 호기심

<멜랑콜리아 Ⅰ(1514)>

뒤러는 유럽 전체를 통틀어 가장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최초의 '예술가'로 대접받았다. 여기에는 ‘빈자의 그림’ 판화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24.2x19.1cm 크기의 작은 판화 작품 <멜랑콜리아 Ⅰ>은 바사리가 '전 세계를 경탄시킨' 예술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인그레이빙'이라는 방식의 동판화로, 뷰린으로 파낸 선만으로도 빛, 그림자, 입체감과 질감 등 미세한 표현이 가능하다. 

헝가리 태생 아버지로부터 금세공 일을 배운 덕분이다. 이후 철침으로 금속에 바로 그리는 드라이포인트와 산(酸)의 부식을 이용한 에칭, 애쿼틴트 기법 모두에서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다. 스승 미카엘 볼게무트의 <세델의 세계 연대기(뉘른베르크 연대기, 1493)>에 일부 참여했다. 1498년에 출판된 <성 요한 묵시록> 삽화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판화제작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판화는 새로운 미술 장르이며, 가격이 저렴하여 대중 친화적이다. 뒤러는 일생 동안 350여 점의 판화를 제작함으로써 경제적 이득과 함께 유럽 전 지역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그리스어 '멜랑콜리아(melancholia)'는 멜랑(melan, 검다)과 콜레(cholē, 담즙)의 합성어로, 체액 중에서 흑담즙이 과잉에서 생기는 우울증으로 여겼다. 1501년 아버지가 죽은 후 셋째 아들이었던 뒤러는 가족을 돌보면서 책임이 무거워지자 자신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확신했다. <멜랑콜리아 Ⅰ>은 이런 그의 심리를 대변한다. 우울증은 천재 예술가의 특성이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화가의 지적인 세계를 묘사한 것으로, 기하학과 관련된 도구들도 그 상징이다. 이런 측면에서 작품은 뒤러의 영적 자화상이기도 하다. 

제목에서 'Ⅰ'은 우울증의 창조적 활동 세 단계 중 첫 번째 단계를 말한다. 작품 왼편의 삼각형 2개, 오각형 6개로 구성된 다면체 돌은 '현자의 돌'이다. 연금술사가 찾던 돌로, 물질을 다른 물질로 바꿔주는 촉매 역할을 한다. 무지개 역시 연금술사가 사랑하는 지혜의 상징 중 하나이다. 그는 수학에 열광했다. 오른편 위쪽 '마방진'이 대표적이다. 1부터 16까지 수를 사용하여 가로, 세로, 대각선 수의 합이 모두 34로 같다. 특히 4x4 마방진은 목성을 상징하며 우울한 기질이 있는 사람이 목성의 힘을 빌리면 기분을 전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명옥·김흥규, <명화 속 신기한 수학 이야기>) 중앙 맷돌 위에 푸토(Putto)가, 그 오른편에는 천사가 오른손에 컴퍼스를 쥐고 왼손으론 턱을 받친 채 앉았다. 드레스에 드리운 그림자보다 얼굴을 훨씬 더 검게 그렸다. 흑인을 그린 게 아니다. 날개가 있음에도 날지 못하는, 행동해야 함에도 행동하지 못하는 멜랑콜리를 의인화했다.

천사가 날개를 접고 앉아 시름에 젖어 있다면, 날 수 없는 처지를 비관한 것일 수도, 날기를 포기한 것일 수도 있다. 쥐와 뱀과 박쥐가 뒤섞인 듯한 왼편 상단의 짐승 날개에 ‘Melancholia'라고 쓰여 있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고대 의학에 기반을 둔 흑담즙은 실제 인간의 몸에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블랙’에 대한 편견이 인간의 마음에 원래 없었던 것과 같다. 인류에게는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편견으로 진화했다. 어둠이나 ‘검은색’에 대한 부정적 태도도 그중 하나이다. 그러나 완벽한 검은색은 없다. 아니 검은색은 엄밀한 의미에서 색이 아니다. 모든 광자(光子, 빛의 입자)를 흡수함으로써 공간에 생기는 '현상'이다. 그리고 빛의 완벽한 흡수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검은색은 실재하기 어렵다. 빛에 천착한 19세기 인상주의자들은 이 점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니 색이나 뇌에 속지 말고, 마음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활용하는 게 좋다.


<코뿔소 연작(1515)>

판화는 정보의 전달이라는 중요한 기능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판화 작품 중에는 <코뿔소>가 돋보인다. 1513년 5월 1일,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는 인도로부터 처음 유럽으로 들어온 '리노케로스'라는 이름의 코뿔소를 선물 받았다. 왕은 고대 로마 플리니우스가 쓴 <박물지>에서 ‘코뿔소와 코끼리는 날 때부터 앙숙’이라고 한 말이 사실인지 궁금했다. 왕은 1515년 6월 3일 대중이 보는 앞에서 둘 간의 대결을 펼치게 했다. 코뿔소는 가죽이 두꺼운 같은 후피동물 코끼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런데 여기서 맥 빠지는 일이 발생했다. 많은 구경꾼이 열광하는 소리에 놀랐는지 코끼리가 꼬리를 내리고 도망가버렸다. 싸움은 시시하게 끝났지만, 이야기가 부풀려지면서 코뿔소의 모습을 몹시 궁금하게 여겼다. 1516년 1월, 코뿔소는 교황에게 선물로 옮겨졌는데, 그 과정에서 배가 난파되어 지중해에 빠져 죽었다.

코뿔소의 출현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은 뒤러의 예술혼을 자극했다. 그리고 판화로 제작하면, 큰돈이 되리라는 점을 직감했다. 그는 친구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독일 상인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철갑 코뿔소를 그렸다. 관찰력이 대단했던 그로서는 상상력을 발휘한 첫 작품이었다. 하지만 다른 어떤 화가의 작품보다 실제 코뿔소에 근접했다. 단지 몸이 지나치게 투구 장식처럼 보이는 것이 가장 눈에 띄는 흠이다. 이후 많은 이들이 1741년부터 1758년까지 유럽 전역을 돌아다닌 '처녀 클라라'라는 인도코뿔소를 실제 보았다. 그러나 명성은 뒤러의 <코뿔소>가 압도했으며, 18세기 후반까지 유럽인의 인식을 지배했다. 예술의 힘이 진실을 누른 희귀한 사례였다. (디터 잘츠게버의 <알브레히트 뒤러>)

당시 뒤러의 고향 뉘른베르크는 활판인쇄와 목판화 제작에서 가장 선구적인 기술을 자랑했다. 판화는 인쇄술과 결합하여 전문적인 지식에 이르기까지 작품 소재를 확장했다. 뒤러는 주문에 의존하던 화가가 예술의 주체가 된다는 사실에 매력을 느꼈다. 원본 제작부터 인쇄 및 유통 과정까지 책임져야 하기에 전 과정을 치밀하게 챙겼다. 이런 연유로 글을 덧붙인 뒤러의 <코뿔소>가 8쇄까지 인쇄되며 4,000~5,000장 정도가 유럽 전역으로 팔려나갔다. 이런 식으로 <요한 묵시록> 삽화 등 판화는 뒤러가 ‘최초의 유럽화가’라는 명성을 얻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큰 잡초 덤불(1503)>

그의 호기심은 넓은 스펙트럼을 갖추었다. 기사 헬멧, 운석, 앵무새, 토끼, 코뿔소에서 작품에 관한 영감을 받았다. 특히 생명체에 관한 관심은 <큰 잡초 덤불>에서 정점을 찍는다. 기독교에서는 자연을 신의 피조물로 간주하면서도 자연에는 신성이 조금도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에 와서야 새로운 관점에서 자연을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플로리안 하이네, <거꾸로 그린 그림>)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미술에 즉각 반영되지 않았다. 그런데 뒤러가 마분지에 수채와 구아슈를 배합하여 대담하고 독창적인 수채화 기법으로 하찮은 풀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그것도 곤충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자연, 혹은 생명체에 관한 그의 공감 능력이 이로써 완성되었다고 평하고 싶다. 

우리는 식물이 생명체임을 잊고 산다. 그러나 2억 5,000만 년 전 페름기 말, '대멸종' 시기가 끝나고, 다윈이 ‘지독한 신비’라 했던 흥미로운 일이 발생했다. 쥐라기 말(약 1억 6,000만 년 전)부터 식물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고, 씨를 안으로 맺는 속씨식물의 등장했다. 속씨식물은 미리 씨앗을 성숙시킨 후 꽃가루를 받으면 즉시 수정에 착수하는 시스템이다. 속도에서 큰 장점을 보이는 이것이 지구에 식물의 번성을 가져왔고, 다른 생명체들의 번식과 생존을 도왔다. 대신 속씨식물에겐 바람이라는 기존의 매개체보다 동물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래서 꽃을 피워 꿀을 생산했다. 또한, 특정한 곤충이나 새의 시각, 후각, 촉각 등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어떤 낭상엽 식물은 파리를 잡아먹으려고 냄새까지 썩은 고기로 위장하고, 오프리스 난초는 암컷 곤충의 뒷모습을 닮은 꽃을 피운다. 그래서 '매춘란'이라 부른다. '루고사스'와 '티' 같은 장미는 일본 딱정벌레에게 배를 채워주고, 자신의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교미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원추리는 깊숙이 들어와 꿀을 실컷 먹고 나가는 작은 말벌에게 꽃가루를 흠뻑 뒤집어씌운다. (마이클 폴란, <욕망하는 식물>) 

아기가 말을 못 한다고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듯 식물을 그리 판단했다면, 먼저 인간의 오만과 무지를 먼저 챙겨보는 것이 현명하다. 작품 제목에 등장하는 ‘잡초’라는 표현이 바로 인간 중심적인 오만이다. 잡초만큼 각자의 강점이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지점에서 성장하는 생물은 없다. 그리고 베이거나 뿌리째 뽑힐 것을 대비해 그들만큼 완벽하게 대비하는 식물도 없다. (아나가키 히데히로, <식물학 수업>) 혹자는 성경 이야기를 담은 판화를 더욱 실감 나게 표현하기 위한 습작을 두고 무슨 설레발이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습작임에도 불구하고 역작 <산토끼(1502, 제목 그림)>와 나란히 인구에 회자한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단순히 기법만의 문제가 아니다. 작품 속 시선의 높이를 보면, 분명히 뒤러의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루시언 프로이트, <정원, 노팅힐게이트(1907)>

바로크를 이끈 안니발레 카라치의 <푸줏간(1580~1590)>은 렘브란트와 샤임 수틴으로 하여금 소고기 정물화를 그리게 했다. 인상주의자의 지도자 격인 마네는 <아스파라거스>를 그려 정물화의 외연을 넓혔다고 격찬한다. 그러나 뒤러 이후 어느 누가 잡초를 주인공으로 대해주었는가? 홀씨가 날아간 민들레를 포함한 한낱 풀밭을 어떤 화가가 위로 올려다보고 그림을 그렸는가? 다행히 루시언 프로이트의 <두 가지 풀(1977~1980)>과 <정원, 노팅힐게이트>에 와서 식물이 독립 작품으로 대접받았다. 지금 런던 테이트 갤러리에 <두 가지 풀>이 당당히 전시됨으로써 잡초가 훌륭한 주제가 될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따라서 뒤러의 초기작 <여우 코트를 입은 자화상>이 오만이 아니라 그의 자존감이라면, <큰 잡초 덤불>은 그 확장선상에 있다는 판단이 선다. 자기 자신에서 출발하여 하찮은 생명체까지 이르는 위대한 사랑의 완성이다. 사랑은 관심이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그의 지적 호기심은 건강한 윤리관을 바탕으로 했기에 위대했다. 그러나 여행길에서도 동물원 사자를 관찰하던 남다른 호기심은 그를 죽음으로 내모는 원인으로 작동했다. 1520년 11월 말엽, 네덜란드 여행 중 고래가 썰물에 해변으로 떠밀려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곧바로 뒤러는 젤란트의 늪지대로 달려갔다. 5년 전 코뿔소를 직접 보지 못한 아쉬움이 한몫했으리라. 그러나 고래는 이미 만조로 인해 파도를 타고 바다로 돌아간 뒤였다. 대신, 그가 급성 말라리아에 걸려 정신을 잃었다. 이후 주기적으로 열병 발작을 앓으며, 의사와 상담이 일상으로 되었다. 결국, 1528년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자연에 관한 그의 호기심을 천국으로 옮겨 가야만 했다. 

뒤러는 당대인 1519년 알프스 이북에서 자신의 메달을 갖는 최초의 화가가 된다. 에라스무스에 의해 ‘검은 선(線)의 아펠레스’라는 찬사를 받았다. 아펠레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총애하는 여인 캄파스페를 선뜻 내줄 정도로 아꼈던 고대 그리스 화가이다. 마지막으로 1560년경 토스카나 공작 코시모 1세가 피렌체에서 개최한 유명한 인물과 최고 화가들의 초상화 컬렉션에서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티치아노와 나란히 옆자리를 차지한 유일한 외국인 화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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