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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Nov 03. 2021

소(小) 한스 홀바인의 사실성

소(小)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the Younger, 1497~1543)은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태어나 아버지 대(大) 한스 홀바인의 공방에서 도제 수업을 받았다. 그리고 1515년경부터 학문의 중심지인 스위스 바젤(Basel)에서 활동했다. 교통 및 통상의 요지이기도 했던 바젤은 이탈리아 반도와 밀접한 무역 중심지 뉘른베르크, 아우크스부르크와 더불어 알프스 북쪽으로 이르는 주 통로였다. 이곳엔 홀바인 작품 중 개인적으로 가장 감탄을 했던 <무덤 속 예수의 시신>이란 작품이 있다. 


<무덤 속 예수의 시신(1512)>

1521년에 일차 완성했으나 1522년 극단적으로 긴 수평적 구성으로 변경했다. 안나 도스토예프스카야는 <회상록> 1867년 8월 12일 자 글에서 남편인 러시아 작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가 오로지 홀바인의 이 그림을 보려고 여행 중에 바젤에 들렀다고 적었다. 그 앞에 선 도스토옙스키는 돌처럼 굳어져 마치 간질 발작을 일으키려 할 때처럼 공포에 휩싸였다고 한다. '스탕달 신드롬'이다. 그리고 몇 달 후 제네바에서 쓰기 시작한 소설 <백치>에서 미슈킨 공작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했다.


“거기에는 인간의 시체가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을 뿐이다. 십자가에 매달리기 전에 받았던 끝없는 고통, 상처, 고뇌, 십자가를 지고 가거나 넘어졌을 때 행해졌던 보초의 채찍질과 사람의 구타... 적어도 6시간 동안 계속되었던 십자가의 고통을 다 참아낸 자의 시체였다.” 


전지전능한 창조자인 신을 삼켜버린 자연의 힘, 그 무자비한 사실성에 대한 예찬이다. 1501년 이곳 바젤은 신성 로마제국령에서 스위스 연방령으로 바뀌었다. 홀바인 활동 당시 신교 강경파인 칼뱅파가 지배적인 이곳에선 화가들의 작업 환경이 좋지 않았다. 신자들은 근검하고 절제된 생활 태도를 지향하였으며, 집을 꾸미는 것도 일종의 사치라고 반대했다. 따라서 화가들의 가장 큰 수입원인 교회 제대화를 그리는 일은 점점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홀바인은 "여기 바젤에서는 미술이 철저하게 냉대받고 있습니다"라고 쓴 에라스무스의 추천장을 들고 영국 런던으로 건너갔다. 그와는 유명한 <우신예찬>의 삽화를 그리며 알게 되었다. 당시 런던 주민의 수는 8만 500명 정도로, 그곳에서 홀바인은 토머스 모어 경을 만나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당시 영국의 회화는 낙후되어 있었다. 호렌보우트 가문 등 몇몇 네덜란드 미술가들이 장악하던 중에 영국 궁정에서 독일 르네상스의 대표 화가를 반겼다. 홀바인은 1526년부터 1528년까지 활동하고 바젤로 소위 금의환향했다. 

<화가의 가족(1528)>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불행하게도 일부가 잘려 나간 <화가의 가족>이다. 성모자 형식을 빌렸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아내도, 아이들도 즐거운 표정이 아니다. 장크트요하네스포어슈타트 구역에 집도 한 채 사주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이들이 어렸다. 아들 필리프가 여섯 살, 딸 카타리나가 두 살이다. 한창 아버지의 존재가 필요한 때다. 아내 엘스베스에게 살림과 양육을 모두 맡기고, 혼자 타국으로 몇 년을 떠나 있었던 홀바인이 반가울 수만은 없었으리라. 돈도 좋고 입신양명도 좋지만, 가족에겐 희생 그 자체였다. 아내의 시선을 보면,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입을 꼭 다문 표정에서 남편에 대한 서운함이 묻어난다. 

여기서 한스 홀바인의 정직성이 돋보인다. 사진이 아니니 일부러 밝은 표정을 만들 수도 있었을 게다. 그러나 그는 가족들의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마치 속죄하듯이. 심리 묘사가 뛰어난 그의 초상화의 특징이자, <무덤 속 예수의 시신>에 나타난 사실성이다. 따라서 이런 깊이를 지닌 그가 세상의 부조리를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마음을 지키기 어려운 법(無恒産 無恒心)’이다. 홀바인은 거친 저항 대신 타협 없는 사실성으로 내면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바젤에서 다시 붓을 잡았다. 하지만 1528년 독일어권 전역에 종교 개혁 운동의 여파로 성상 숭배 금지령이 크게 확산했다. 1529년 2월 9일과 10일에 일어난 사육제의 소란이 성상 파괴 폭동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4월 1일 바젤시가 공식적으로 신교 개종을 선언한 후 교회 일감이 완전히 끊겼다. 그는 에라스무스에게 다시 한번 추천서를 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1529년 바젤을 떠나 프라이부르크로 가버린 그는 이 부탁을 듣고 격분했다고 한다. 이유는 밝혀지지 않는다. 바젤시에서는 연봉 50길드와 자유로이 외부 청탁을 받을 수 있게 해 주겠다며 그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1532년쯤 런던에 도착했다. 홀바인은 다행스럽게 1536년부터 헨리 8세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이는 영국 최고의 화가로서 대접을 받게 되었다는 의미다. 

그러나 시절은 하 수상했다. 헨리 8세가 자신의 이혼 문제로 교황 클레멘스 7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 사이에서 줄타기하고 있었다. 1534년 영국 교회와 의회는 각각 교황의 수위권을 부정했다. 교황은 헨리와의 균열을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카를 5세의 으름장에 교황도 어쩔 수 없었다. 그해 7월 교황이 헨리에게 앤 블린과 헤어지고 아라곤의 캐서린과 다시 합하지 않으면, 파문을 내리겠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두 달 후 클레멘스 7세는 쉰여섯 살 나이로 그토록 집착했던 이승과의 인연을 끊었다. 


<대사들(1533)>

홀바인의 유명한 <대사들>과 <헨리 8세의 초상(1536)>이 이 무렵 남긴 작품들이다. <대사들>은 최초의 실물 크기 초상화로 꼽히는 작품이다. 헨리의 심복인 런던 주재 프랑스 대사 장 드 댕트빌의 주문으로, 특사로 온 프랑스 교단의 실세 조르주 셀브 주교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두 사람은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요청을 받은 프랑스 프랑수아 1세의 지시로 런던에 모였다. 명목상 헨리와 1533년 결혼한 앤 사이에서 태어난 딸(훗날 엘리자베스 1세)의 세례식에서 대부(代父)인 왕을 대리하여 참석했다. 하지만 그 배경에는 앤 블린과 결혼하기 위해 가톨릭 교회와 결별한 헨리 8세의 야망을 인정한다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 파견된 인물들이다. 

작품 세부(사각 왜상)

작품 속에 알레고리를 나타내는 사물들이 가득하다. 특히 중앙 2단 탁자에는 당시 시대 상황과 정치적 환경, 두 사람이 처한 입장 등이 함축되어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상징하는 천구의,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1492년 맞추어져 있는 해시계, ‘네 가지 학문’, 즉 천문학, 산술, 기하학, 음악을 상징하는 기구와 서적 등이 그것이다. 류트의 끊어진 줄 한 가닥, 받침대를 잃고 나뒹글어 있는 지구의, 자를 끼워둔 산술서 <카우프만의 계산>에서 첫 단어 ‘분열’을 뜻하는 라틴어 ‘Dividirt’, 신구교 종교와 강대국의 불협화음을 의미한다. 

해골을 ‘사각(斜角) 왜상’으로 표현했다. 댕트빌의 좌우명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를 상징한다. 그런데 "살아 있음을 잊으라"는 경구는 댕트빌만의 것이었을까? 그가 격랑의 세월을 보내면서 관조했던 그의 세계관을 우회적으로 반영했다고 볼 순 없을까? 다시 주의 깊게 작품 구석구석을 살핀다. 류트 옆 루터파 찬송가인 ‘영혼의 창조자여 오소서’가 펼쳐 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왼쪽 상단 커튼을 살피자 비로소 십자가에 못 박힌 작은 그리스도의 고난상을 발견하곤 깜짝 놀란다. 홀바인은 이승이 아닌 커튼 뒤의 저세상이 진실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암시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한 동의 여부는 보는 이의 몫이다. 여하튼 이로써 단순했던 초상화가 인간의 생과 죽음을 내포한 깊이 있는 작품으로 격상했다. 

* 사각왜상 : 왜곡된 형태, 즉 歪象(아나모르포시스 anamorphosis) 기법이며, 그중 원근법의 극단적 형태인 사각(斜角)으로 표현한 것이 사각 왜상이다.


1543년, 런던에 불어닥친 흑사병으로 인해 마흔여섯 살 홀바인은 짧은 생애를 뒤로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뒤러처럼 예술가로서의 자존감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 그의 냉소적인 입장이 언뜻 비치기는 하나 실제 정치나 종교개혁이라는 커다란 담론에는 침묵했다. 심지어 교회 설립에 반대하던 은인 토머스 모어가 1535년 반역죄로 참수를 당했을 때 홀바인은 정반대로 약진을 거듭했다. 그렇다고 그가 위대한 화가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가 고국을 떠나자 독일의 회화가, 그가 죽자 영국의 미술이 쇠퇴했다. 

그의 무덤은 지금도 그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사후 친구들이 그의 작품을 정리해 사생아인 두 자녀를 도왔다고 한다. 바젤의 가족과는 여전히 떨어져 살았으며, 1538년 대륙 여행 도중 잠시 바벨을 들렀다. 바젤 시의회는 그가 아주 돌아오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1539년 헨리 8세의 새 부인 안나 폰 클레베(클레브스의 앤)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10월 16일 런던으로 갔다. 그 길에 큰아들 필리프를 금세공인 야콥 다비트의 도제로 들여보냈다. 바젤에 남아 있던 아내의 뒷얘기는 분명치 않다. 그래도 남편의 죽음을 맞이한 그녀는 “예전에 좀 더 잘해 줄 걸” 하는 회한이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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