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스텔화의 유행과 여성화가 로살바 카리에라
초인, 프라고나르에게 잠시 회화의 기초를 가르친 장 밥티스트 시메몽 샤르댕(Jean Baptiste Siméon Chardin, 1699~1779)이 그런 인물이었다. 로코코 시대에 그의 삶과 작품의 비중은 절대 가볍지 않다. 15세기부터 제단화에서 인물화, 풍경화 등 다양한 장르가 독자적으로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회화 장르 간 위계질서가 조장되었다. 1648년 프랑스 왕립 미술원에서 이를 공식화했는데, 역사화(성경, 신화, 역사)→초상화→풍경화→정물화→장르화(풍속화) 순이다. 정물화와 장르화가 저급하게 평가받은 이유는 기독교 사회에서 일상에 대한 관심보다 내세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풍경화와 정물화가 유행했다. 해골, 책, 죽은 동물의 사체, 과일 등에 각각 상징을 부여하고, 교훈과 풍자를 담았다. 그 위계가 남아 있던 18세기 로코코 시대에 샤르댕은 하찮은 일상의 정물(靜物)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플랑드르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덕분이다. 초기작 <가오리가 있는 정물화>와 <고양이와 홍어가 있는 정물화>에서 젊은 그가 지향하고자 하는 작품세계가 잘 나타나 있다.
일반 가정의 부엌 선반 위에 물병과 탈, 야채 파와 함께 굴, 물고기가 보인다. 고양이 녀석의 시선이 본능처럼 생선에 꽂힌 것은 그의 유머 코드로 보인다. 작품의 주인공 가오리는 벽에 걸려 내장이 금세 쏟아져 내릴 듯한 시뻘건 뱃속을 드러낸 채 벌린 입과 점처럼 작은 눈이 애처롭다. 그러나 인간의 식탁에 오르기 전 그의 희생적인 모습은 한편으론 장렬하다. 화려한 프랑스의 귀족 미술이 지배하던 시대에 평범한 가정의 일상과 하찮은 물건에서 삶의 본질을 찾는 위대한 작가정신을 보여주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그를 위대한 예술혼을 지닌 엘스티르의 모델로 선택한 이유다. (이가림, <미술과 문학의 만남>) 그런데 이 그림을 통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또 다른 작품이 있다. 렘브란트의 <도살된 소>이다. 그 역시 네덜란드의 황금 시대에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현하면서 고통스럽게 살았다.
샤르댕과 동시대에 라 투르라는 화가가 있었다. 그는 촛불 하나로 심오한 의미를 전달할 줄 알았다. 그러나 자기 작품만큼 삶에 깊이가 없었다. 부(富)를 충분히(?) 축적했으면서도 고리대금업으로 가난한 소작인들을 핍박하여 가슴 아프게 했다. 결국, 1652년 농민 반란이 일어났을 때 가족들이 몰살을 당했다. 그러나 샤르댕은 달랐다. 장르화에서 서민의 내면을 잘 표현했던 그는 라 투르와는 살리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물론 1779년 여든의 나이로 자택에서 눈을 감은 후 신고전주의의 유행에 잠시 잊히긴 했다. 그러나 곧 진실하고 소박한 그의 작품세계는 재평가를 받았다. 예술에서도 ‘돈이 인간의 행복과 성공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믿기 어려운 교훈을 선사한다.
1728년 도핀 궁에 전시된 샤르댕의 뛰어난 그림을 보고 대중들도 정물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꾸밈없고 담백한 그의 독특한 작품으로 인해 '동물과 과일의 화가'로 찬양했다. <담배 도구가 있는 정물>은 푸른색과 흰색이 섬세한 조화를 이룬 그림으로, 샤르댕이 첫 아내에게 선물한 것으로 짐작된다. 담배는 쾌락과 방종을, 담배 연기는 무상함을 상징한다. 그러나 애써 해석할 덧붙일 필요가 없다. 서민 가정의 소박한 정서가 느껴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물 주전자의 질감과 배치된 정물의 안정감을 즐기면 그만이다. 다만 그의 작품에 조금씩 인물이 들어가는 장르화 경향이 나타나는데, 이는 생활고 때문으로 여겨진다.
<장터에서 귀가한 하녀의 모습>은 그의 뛰어난 관찰력과 진솔한 표현, 특히 구성이 매우 돋보이는 작품이다. 불필요한 장식을 없애고, 곧바로 주제에 몰입하게 하는 구성이 그의 특징이다. 하녀가 시장에서 방금 도착해 부엌에 장바구니를 내려놓으려 한다. 앞에 있는 그릇과 포도주병, 도기, 왼쪽 구리 물통. 그녀의 일상을 읽을 수 있는 단서가 보인다. 당연히 화단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대중과 직접 대면할 기회인 살롱전의 중요성을 인식했고, 제1회 살롱전에 일곱 점을 대중에게 선보이면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셔틀콕을 들고 있는 소녀>는 유채로 그렸으면서도 파스텔화처럼 색조가 전체적으로 부드럽다. 실제 그는 말년에 유화 물감의 납 성분으로 시력에 문제가 생긴 후 파스텔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파란색 머리띠, 분홍 머플러, 그리고 코 끝에 간신히 걸친 <안경을 쓴 자화상(1771, 제목 사진)>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슬며시 미소를 짓게 한다. 그러다가 일흔이 넘은 그의 눈과 마주 치면, 순간 위축된다. 부드러운 파스텔로도 그의 어쩔 수 없는 카리스마를 잘 표현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유화에서처럼 색조의 미묘한 차이와 섬세함을 드러내기 위해 색을 조절했다. 그리고 각각의 파스텔 흔적들은 매끄러운 표면에 문지르기보다 그대로 남겨 두었다. 철학자이자 미술 평론가인 드니 디드로가 샤르댕의 색의 조화와 반사에 대한 예민한 감각에 갈채를 보냈다.
“오! 샤르댕, 당신이 팔레트에 섞고 있는 것은 흰색, 빨간색, 검은색이 아닙니다. 사물의 본질입니다. 당신의 붓 끝으로 붙잡고 있고, 캔벗에 칠하는 것은 공기이자 빛입니다.” (스텔라 폴, <컬러 오브 아트>)
참고로 파스텔화는 18세기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파스텔은 입자를 곱게 가루를 낸 색채 안료를 고령토와 점토, 그리고 소량의 접착제를 섞어 만든다. 파스텔화는 마른 상태에서 희미하게 지워지고 번지면서 서로 다른 색과 섞여 다양한 색채 효과를 낸다. 그리고 수정이 비교적 쉬워 당시 많은 아마추어 화가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엷은 노랑, 분홍, 보라, 그리고 하늘색 등의 색조가 특히 로코코 시대의 사회적 경향과 맞아떨어졌다. 얼굴이나 가발, 비단이나 벨벳 같은 사치스럽고 화려한 옷의 질감을 표현하는 데도 매우 효과적이었다.
파스텔 전문화가로는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화를 그려 유명세를 치른 모리스 캉탱 드 라 투르가 뛰어나다. 많은 귀족의 주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권세를 가진 주문자의 까다로운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것이 불편했는지 모리스는 크게 기뻐하지 않았다고 한다. 파스텔화가 그만큼 경제적으로 여유를 안겼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러나 로코코가 선호한 파스텔화의 위상을 높인 화가는 베네치아 출신 로살바 카리에라(Rosalba Carriera)다. 간결하면서도 파스텔만이 주는 기교를 십분 활용함으로써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파스텔을 사용한 초상화의 선구자로서 자부심이 대단했다. <여동생이 들고 있는 자화상(1709)>과 <겨울로서의 자화상>은 여성 화가로서 당당함이 빛난다.
우연처럼 프랑스혁명 이전까지 유럽의 왕실은 여성이 지배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루이 15세의 정부 퐁파두르 후작부인, 오스트리아는 마리아 테레지아, 러시아는 예카테리나 여제가 그 주인공이다. 그러나 혁명 이후 로코코 시대는 저물었다. 사람들은 격랑이 잦아들자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화려한 로코코의 미혹에 취할 법도 했지만, 흔들리지 않고 대중을 미래의 감성으로 이끌었던 샤르댕을 일러 선구자라 칭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