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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희 시인 Feb 11. 2022

우리들의 유년시절 감성을 일깨워준 <소나기>같은 소설

김현숙 작가의 <산우>를 읽고...

우리들의 유년시절 감성을 일깨워준 <소나기> 같은 소설

-김현숙 소설집 『히스의 언덕』 중 <산우>를 읽고...

이은희


작년부터 유독 ‘마른장마’라는 말을 들어가며 여름을 보내고 있다. 도무지 시원스레

내려주지 않는 빗줄기로 인해 습하고 후덥지근한 불쾌함까지 느껴졌던 요즘 어제는 모처럼 예전의 장마답게 제법 굵은 빗줄기가 종일 내려주었다.

봄 동안의 가뭄에 비하면 아직도 부족함이 있을 테지만...


이런 무더위 장마철에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준 소설이 있어 노트북의 자판을 두드리게 됐다.

종종 읽었던 김현숙 작가의 소설들은 여자이며 주부인 내겐 늘 잔잔한 여운과 감동을 주곤 했다. 지난 2018년 단편소설 10편을 묶어 발간한 소설집 『히스의 언덕』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든 작품이 다 잔잔하게 여운을 그려주었지만 특히 <산우>는 내게 아프도록 절절하게 가슴을 흔들어줬던 작품이었기에 이렇게 참지 못하고 글을 쓰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밖은 쫙쫙 시원스레 내려주는 빗줄기로 세상이 온통 젖어있다. 이런 젖은 날에 젖은 마음으로 산우(山友)를 생각한다.

산에서 만난 벗, 나에게도 얼마 전 우연하게 집 근처 산엘 갔다가 산우(山雨) 중에 만난 사람이 있다. 사십 중반이 넘어가고 건강을 생각해서 혼자서 산행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무것도 갖추지 않고 그저 편한 맘으로 산에 올랐다가 그만 비가 와서 쫄딱 비를 맞을 뻔했던 날 다행히도 고마운 분을 만나 우의를 얻어 입고 무사히 산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내가 고마운 그분을 운 좋게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김현숙 작가의 소설 <산우> 속 ‘그’를 떠올리는 충분한 계기는 될 수 있었다.




퇴직 후 점차 허물어져가는 평범한 일상에서의 의지를 다지며 어렵게 산행을 시작한 그에게 행운처럼 찾아온 산속에서의 우연한 만남, 익숙해진다는 것은 불필요한 것을 절하고 극히 간편화 되어 가는 것이라 평소 생각하는 그에게 요란스러운 등산복이 아닌 단아한 차림의 엘라와 레아 두 여자의 뒷모습은 앞모습까지 확인하고 싶은 욕구를 주는 것만으로 충분히 임팩트 있는 첫 만남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산행에 동반된 애견 토토가 그런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그녀들에게 먼저 달려가 짖는 바람에 깜짝 놀란 분홍 모자를 쓴 조금은 까칠한 엘라를 보게 되었고, 그녀와 대비되게 토토를 다정히 대하던 단발 커트 머리가 잘 어울리는 작고 여윈 얼굴의 따스하고 맑은 눈빛이 모든 것을 압도하여 포근한 느낌마저 주는 레아를 보게 되었다.

아마도 엘라의 까칠함에 반하는 레아의 모습이 그에게는 더욱 좋은 첫인상으로 또렷이 각인되었을 것이다. 그의 마음에 레아는 그렇게 자리를 틀기 시작했을 터였다.




두 번째로 우연히 마주친 산행에서 그와 그녀들의 산우(山友)의 인연은 산우(山雨) 중에 더욱 견고히 이루어진다. 비를 피해 산막에 들어선 그는 ‘투명한 비닐 막을 통해 산의 능선을 감싸고 뿌옇게 피어오르는 비안개를 바라보는 여자들의 모습이 초라한 산막의 느낌을 일시에 바꿔버렸음을’ 알았다. 그 순간 자신의 손길이 가볍게 떨리고 있음을... 그것이 레아 그녀를 향한 마음이었음을 내심 알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스스로의 운명을 어쩌면 막연히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일기예보를 통해 비가 올 것을 알고 미리 준비해 온 우의는 자신이 입고 여분으로 가져온 2단 우산을 ‘나중에 우연히 산에서 만나면 돌려 달라’며 그녀들에게 건넸을 때 점차 파리해져 가는 낯빛의 레아를 바라보며 그는 엷은 미소를 띠었지만 산을 내려가는 그녀들의 뒷모습을 보며 ‘까닭 없이 텅 비어 오는 그의 마음에 희뿌연 안개비가 피어올랐던’ 것은 어쩌면 그와 레아의 슬픈 엔딩을 암시했던 복선은 아니었는지 싶다.




어느새 가을이 깊어 가고 단풍이 짙어가는 늦가을 오후 세 번째 그가 그녀들을 만났을 때, 단발머리가 유난히 잘 어울리던 레아의 모습은 더욱 야위고 핼쑥해진 짧은 커트로 바뀌어 있었고 그녀가 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날 이후 산에서 몇 번인가 그는 그녀들을 만났고 이제 그들은 개인적 이야기도 자연스레 털어놓을 만큼 가까운 산우(山友)가 되어있었다.

 그의 병든 노모를 엘라와 레아가 다니는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게 그녀들은 성심껏 도왔고, 병세가 악화된 노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극진한 장례 미사로 그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노모를 잃은 후유증으로 그는 아득히 밀려오는 슬픔과 허탈에 잠식되어갔다.

폭설이 며칠째 계속되고 노모 없는 아파트에 홀로 있던 어느 저녁 견딜 수 없이 산우(山友)가 그리워졌을 때 그는 알았다. 너무 오래 레아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과 함께 자신의 감정을 너무 오래 참고 참아왔다는 것을... 아마도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더 이상 레아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숨길 수 없음을 그는 확신했을 것이다.




만나자는 그의 전화에 비눗방울 같은 웃음을 터뜨리며 흔쾌히 응했던 레아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녀를 기다리는 차가운 겨울 거리에서 그의 가슴은 주체할 수 없이 뛰놀았고 그 마음을 참지 못한 채 마주 선 레아의 어깨를 감싸 안았을 때 처음 한 스킨십에 움찔거렸지만 그의 손길을 그대로 둔 채 소녀처럼 살포시 웃었던 레아의 마음은 정말 무엇이었을까?

함께 들어가 마주 앉은 일식집 창가에서

 “누군가와 꼭 한번 들르고 싶은 집이었는데 오늘 왔네요”

“그 누군가가 저였음 좋겠는데요…….”

 “아하…….”

느닷없이 비약한 그의 반응에 묵인도, 부인도 아닌 말없는 웃음을 보였을 때 그녀의 마음은 진정 무엇이었을까?

눈발이 어지러운 창을 배경으로 레아의 눈을 바라보며 캐나다에 다녀온 후 자신의 거취를 결정하겠다고, 이제는 마음 가는 대로 살고 싶다고 그때까지 건강히 잘 지내고 있어야 한다는 그의 말에 말없이 시선을 피하며 도리질을 했던 그녀의 심정은 진정 어땠을까?




겨울에 캐나다로 떠났던 그가 봄이 되어서야 돌아왔을 때 엘라에게 전해 들은 엄청난 비보, 레아의 죽음!

칼바위, 하얀 벼랑을 뒤덮은 붉은 진달래 덤불에 술을 뿌리며 오열하는 그, 화장하여 납골당에 안치 후 유골 한 줌은 이 산, 이곳에 뿌려야 한다고...

그렇게 봄이 오면 산우들과 조우해야 한다고 내내 우겼던 레아, 그를 만났던 마지막 폭설의 밤, 결코 그에게 말할 수 없었던 그녀의 한 마디가 가슴에 와서 맺힌다.

봄이면 다시 산을 오르며 칼바위 진달래를 산우들과 함께, 아니 그와 함께 보고 싶었을 그녀는 얼마나 그를 기다렸을까? 아니 그때까지만 목숨을 연명할 수 있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기도했을까?




황순원 선생의 소설 <소나기>를 읽으며 나는 처음으로 진정한 사랑이란 것을 떠올려봤었고, 소년과 소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울어야 했다. 정말 가슴이 너무 아파서 엉엉 소리 내어 울었던 그 기억을 아직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산우>를 읽으면서도 그렇게 어린아이 마냥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책을 읽으며 우는 엄마의 모습을 종종 보는 내 아들들이 묻는다.

“엄마, 이번엔 또 무슨 책을 보면서 우는 거야?” 아들의 질문에 울면서 웃는다.




아마도 김현숙 작가의 <산우>는 마흔의 중반을 살아온 나에게 유년의 <소나기>를 떠올리게 했던 ‘그’와 ‘레아’의 이룰 수 없는 마지막 사랑에 대한 기억으로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어쩌면 꼭 이루어져야만 행복인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들의 수많은 첫사랑이 아름다웠던 것은 아마도 이루지 못한 사랑이었기에 아름답고 애절하고 오래도록 간직되었을 것이다.




지금의 남편과도 누구 못지않게 사랑하며 젊은 날을 울고 웃었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남편을 그렇게 절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또 남편은 여전히 나를 사랑스럽던 가슴 뛰게 예뻤던 그 시절 그녀로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랜 시간을 아옹다옹 함께 하며 속된 말로 지지고 볶고 하는 그 삶을 살며 살아져 왔을 것이다.

가끔은 정말 다시 눈물이 나고, 다시 두근거리고 설레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여전히 나는 엄마이고, 아내이기에 이 삶을 사랑하며 살아내는 것이다.

아마도 김현숙 작가 역시 한 가정의 엄마로서, 아내로서 그런 마음으로 우리들의 감정에 대리 만족을 주기 위한 선물로 <산우>를 집필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의문을 가지며 좋은 작품을 읽게 해 준 김현숙 작가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 2019년 7월 29일 씀.





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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