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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mi Jul 29. 2021

"Welcome to My World (2/4)"

관심이었을까 또는 일탈이었을까?

늦가을로 접어들던 1997년 당시 저녁 시간대의 Koreatown 은 꽤 바쁘더군요. 당시 뉴욕에는 불법체류자 분들을 포함해서 대략 50만 명의 한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80만 명일 수도 있다고도 했지요. 그 당시 이 수치가 과장이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날 초저녁 한인타운의 분위기는 이 수치가 정말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할 정도로, 평소에는 잘 볼 수 없었던 규모의 많은 한인들이 걸어 다니고 있었습니다. 식당들과 가게, 핸드폰 가게, 문구점, 식품점, 그리고 저 멀리 교보문고 (이름만 교보였던 듯합니다만)까지, 낮에는 사람들의 움직임보다는 UPS 트럭과 Fedex 트럭, 그리고 기타 cargo truck 들로만 채워진 32가의 양 쪽에서 화물을 올리고 내림을 반복하며 바쁘게 움직이던 거리가 저녁에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거리로 변하더군요.


제가 있던 2층의 식당 내에서는 (나중에 형이 말해주어 알게 되었지만) 가수 김종서의 "아름다운 구속" 이란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스크린에는 이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아닌 어느 긴 머리의 키가 큰 여자가 춤을 추는 영상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 이 또한 Morgan Stanley 형이 나중에 알려주었는데, 이 여자는 배우 전지현 씨였더군요.


첫인사로 파악한 이 여자에 대한 인상이 매우 나빠서였는지, 저녁 내내 저는 Morgan Stanley 형 하고만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형은 그런 제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저와 이 여자를 두고 교대로 여러 이야기들과 질문을 해 가며 그 특유의 허풍스러운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이런 형의 성격 때문에 저와 이 여자 간에 존재한 어색함과 불쾌함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기에 다행이었지요.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이 두 사람이 연인 사이는 아니었음이, 한 시간 내내 서로가 손 또는 몸으로 접촉하는 일이 전혀 없더군요. 우연히 또는 무의식적으로도 이 두 사람은 확실한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애인은 아닌 것은 확실했지만 이 여자가 형에게 있어 어떤 존재인지 여전히 몰랐고 또한 특별한 소개도 없었으며, 형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아까 경험한 이 여자의 무례함을 경험한 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친절하게 대할 정도의 아량이 제겐 있지 않았었습니다. 그의 왼쪽에 앉아있던 이 '정체모를 여자' 또한 제게 말을 건네지는 않았지요 - 오히려 자신의 무례함을 만회하기 위해 제게 말을 걸어왔다면 오히려 제가 더 난감해졌을 것임이 분명하기에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고 저녁을 마쳤습니다.


형이 계산을 하는 동안 저는 먼저 1층으로 내려온 후 거리에 서서 지나가는 차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조금 후에 그 '정체모를 여자'가 내려오더군요. 형이 바로 그녀의 뒤를 따라 내려올 것으로 생각하고 그녀가 내려오고 있는 계단 쪽으로 다가갔지만 그 형은 아직 내려오지 않고 있었고, 괜히 이 여자에게 제가 먼저 다가간 것처럼 보인 저는 매우 난감한 위치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식사 내내 눈길도 주지 않았던지라 이 여자의 외모를 파악할 수는 없었기에, 이때가 이 사람을 처음 눈앞에서 대면하게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형이 언제 내려오는지 계단 위를 올려다보면서 스쳐가는 듯 본 이 '정체모를 여자'의 외모는 특별했습니다 - 키가 저만큼 큰 사람이었고, 손이 눈에 띌 정도로 길었습니다. 얼굴도 그 당시에는 귀여운 인상이었지요. 연분홍색 반코트와 같은 색 치마를 입고 있었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은 잘 정돈되어 있었으며 (아마도 염색을 한 머리겠지만) 그 색감이 매우 고르고 투명한 듯 보이기도 하며 짙은 갈색 크리스탈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의 깊은 색채를 띄고 있었습니다. Broadway 뮤지컬 Les Miserables의 무대에 드리워진 짙은 갈색의 커튼이 조명을 받아 은은하게 발산하는 그런 부드러운 분위기의 색채였습니다. 거기에 정장 차림으로 검은색 스타킹에 같은 색의 힐을 신고 있었지요. 이 여자가 착용하고 있던 그 수에서 많지 않아 보이던 액세서리들은 제가 보기에도 매우 비싸 보이는 것들이었고, 다시 보게 된 이 '정체모를 여자'의 옷들도 길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류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급격히 변하기 시작한 뉴욕의 교포 사회상이 반영하듯 20대 그리고 30대의 1.5세 또는 2세 교포들이 자주 하던 이야기들 중 하나가 - 이렇게 남다른 외모와 옷차림을 한 여자는 아마도 부모가 부유한 유학생이거나 또는 어느 '특별한 업계'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gossip을 하곤 했는데, 이 사람은 전자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이 모든 '관찰' 이 단 5초 만에 일어났다면 믿으실지 - Morgan Stanley 형이 내려오려면 더 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이 여자를 뒤로 하고 다시 돌아서서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고 있기도 애매한 처지에 있게 된 저는, 계단을 다 내려와서 저를 (의미 없는 눈길로) 바라보는 그 여자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뉴욕엔 처음이신가요? 한국에서 오신 분 같습니다."

"네."

"... "


"우리 형과 잘 아는 사이신가 봐요."

"제 계좌를 관리하시는 분입니다."

"아, 그렇군요."


"호텔에 계시나요? 뉴욕은 있을 데가 참 만만치 않아요."

"네, 미드타운에 있는 호텔에 있습니다. 있을 만합니다."


제가 질문을 하고 이 여자가 답을 하는 Q&A 식의 대화가 건조함을 넘어 바싹바싹 말라가는 것을 느끼며 더 이상의 체면치레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던 그때 마침 형이 내려왔습니다. 빨리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두 사람에게 한꺼번에 인사를 하고 떠나기로 생각했습니다:


"자, 두 분과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기회에 또 만나요."

"벌써 가게? 같이 좀 더 있자 -- "

"아니야, 형. 사실 나 차 안 가지고 왔어. 다시 사무실로 가서 차 빼고 집에 가야지."

"아, 그래? 그럼 빨리 가야겠다. 벌써 9시야."


이때까지도 꼿꼿하게 서 있던 이 '정체모를 여자' - 제가 자리를 뜨려 하던 순간 한 걸음 앞으로 나오더니 제게 상반신을 숙여 인사를 하더군요:


"같이 한 시간 소중했습니다. 차후 연락드릴 일이 있을 듯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여태껏 보였던 행동과는 달리 인사를 마치고 다시 똑바로 서서 저를 찬찬히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옅은 미소까지 띠고 있었습니다.


내색하지 않고 짧게 한 번 더 인사를 두 사람에게 한 후 저는 근처에서 바로 cab 하나를 잡고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머릿속이 조금 혼란스럽더군요 -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을까? 혹시 영화배우였나? TV 배우? 부잣집 애들은 다 저런가? -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저는 다시 제 사무실이 위치한 downtown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


이 일이 있은 후 저는 이 여자에 대한 기억을 잊고 지냈습니다. 제게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이었고 거기에 좋은 인상을 남긴 사람도 아니었기에 기억할 이유가 없었지요. Morgan Stanley 형도 그 후 연락이 없더군요.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것도 아닌데, 왜 연락이 없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평소에 제가 먼저 전화를 하는 사이도 아닌지라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고 지내고 있었지요.


대략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오후 212 지역코드가 찍힌 번호로 전화 한 통이 울려왔습니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potential client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안녕하세요. 한 달 전 만나 뵈었던 지아입니다."


목소리의 주인은 기억이 나더군요. 그때 그 ''정체모를 여자'였습니다.


- Con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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